백만달러짜리 영화 찍을 감독을 뽑습니다

On-Style의 < ON THE LOT >

등록 2007.09.05 18:40수정 2007.09.0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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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달러짜리 영화 감독을 뽑는 '온 더 랏' ⓒ 온스타일



'LOT'란 영화 촬영 현장에서 감독들이 앉는 조그만 간이 의자를 말한다. 비록 작은 간이 의자지만 이것은 큰 의미가 있다. 수많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의 목표가 바로 자기 이름이 새겨진 이 작은 의자를 갖는 것이다.

경쟁을 통해 스타를 발굴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많고 또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며 오랫동안 인기를 누려왔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아메리칸 아이돌>인데, 시청자들이 경쟁하는 당사자들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전미 수천만 명의 시청자들의 눈과 손을 집중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예선에서는 (그들도 이미 스타가 되어버린) 심사단이 본선 진출자를 가려내고, 본선에서도 심사단은 시청자들의 판단에 도움이 될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아메리칸 아이돌을 뽑는 것은 시청자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아이돌>은 <아메리칸...> 제작팀이 제작한 프로그램으로, 후발이지만 제법 큰 인기를 얻고 있고 미국 춤의 지존을 뽑는다는 <유 캔 댄스>와 다르다. <유 캔...>은 시즌 2까지 제작을 마쳤다.

<유 캔...>은 심사 방식의 차이를 눈여겨본다. 시즌 1에서 예선은 심사단의 평가에 의해 본선진출자를 가려내었고, 본선에서도 탈락 후보를 심사단이 골라내면 그 중에서 시청자들이 투표로 탈락자를 선정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시즌 2가 되자 그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예선은 같지만 본선에서 탈락 후보자를 가리는 권한을 시청자들에게 넘기는 대신 탈락자를 결정하는 권한을 심사단이 넘겨받은 것이다.

<아메리칸 아이돌>은 전적으로 대중 스타가 될 사람을 뽑는 것이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다가가는 정도에 따라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 맞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유 캔 댄스>는 대중적인 즐거움에 호소하는 것 이외에도 춤에 대한 전문적인 평가의 측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최종 결정권을 전문가들이 넘겨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탈락자를 선정하는 과정이 다소 복잡해지는 단점을 무릅쓰면서 시청자이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도록 탈락 후보를 뽑는 역할을 맡겼다. 어차피 방송 프로그램은 대중문화의 하나일 뿐이다.


드림웍스가 제작하는 영화감독 뽑는 <온 더 랏>

또 하나의 경쟁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온 더 랏>(On-Style 방송)이 있다. 영화감독을 발굴하는 이 프로그램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공동제작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우승자는 대형 영화제작사인 드림웍스와 백말달러의 계약을 하게 되는 꿈같은 프로젝트이다. 영화감독이 되어서 자기 이름으로 영화를 발표하고 싶은 감독지망생들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주로 영어권에서이지만) 만 이천 여명이나 지원했다고 한다.

이제 고작 2회가 진행된 프로그램이지만, 본선에 오른 18명 중 3명을 탈락시키는 첫 번째 과정을 시청하면서 어떤 대하 사극이나 멜로드라마도 보여주지 못한 극적인 순간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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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더 랏> 제작자인 스필버그 ⓒ 온스타일


본선에서 <온 더 랏>은 <아메리칸 아이돌>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심사단은 의견을 피력할 뿐 탈락자를 선정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중음악 스타를 발굴한다는 취지의 <아메리칸 아이돌>과 다르게 영화감독은 대중적인 인기만으로 평가받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온 더 랏>의 각본 없는 드라마를 바라보는 심정이 개운하지 못했다.

첫 회에 본선 진출자 18명은 각자 1분짜리 코미디 단편영화를 만들어 선보였다. 심사단은 어떤 작품은 극찬했지만 어떤 작품은 혹평했다. 그리고 방송이 끝난 후 시청자들은 투표를 시작했다. 2회에 사회자는 본선 진출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심사평을 요약해주었다. 그리고 시청자들의 평가가 그와 같은지 다른지를 알려주었다.

기본적으로 경쟁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은 그 결과가 재미있어서만은 아니다. 경쟁의 형식은 수많은 인간 드라마를 함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이 보고 싶은 것이다.

<도전! 수퍼모델>(원제 'America's Next Top Model', On- Style 방송)이 시즌 8까지 제작되면서 승승장구하는 것은 20대 안팎의 감성을 지닌 여자들이 13명씩 합숙을 하면서 벌어지는 일들과, 각각의 캐릭터들이 갈등하고 화합하는 모습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살 빼는 경쟁인 <도전! Fat 제로>(원제 'The Biggest Looser', On-Style 방송)에서도 힘든 과정을 함께 하면서 생기는 우정과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내가 살아남는 경쟁 사이의 갈등의 일화들이 살 몇 파운드를 뺐는가 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

우연찮게도 경쟁의 결과가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경쟁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합숙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메리칸 아이돌>이 그렇고 <온 더 랏>도 그렇다. 합숙은 기술적인 부분일 뿐 프로그램의 내용을 좌우하는 핵심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 <온 더 랏> 2회에서 가장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한 감독은 누구일까? 바로 <Get a Room>을 선보인 제임스이다. 웰 메이드 영화이며 주제 의식이 좋다고 평을 들었던 <Deliver Me>가 탈락했을 때보다, 식상하고 허술한 영화라는 평을 들은 오줌 급한 여자 이야기인 <1번 버스>가 통과했을 때보다, <Get a Room>의 통과는 <온 더 랏>이 앞으로도 이와 비슷하게 재미있을 것이라는 기대보다 영화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현실적인 체감을 앞서게 했다.

<Get a Room>은 한 '머저리'가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극장에서 쫓겨나고 버스에 치여 죽고, 마침내 천당 문 앞에서도 그 입 잘못 놀려서 쫓겨난다는 내용이다. 말 한 마디란 바로 제목인 "get a room"인데, 극장에서 키스하는 연인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방이나 잡지" 하면서 놀리는 말을 그 사람이 따라한 것이다.

스튜디오에 있던 방청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아주 많이 웃고 박수를 쳤다. 그러나 심사단들은 심히 불쾌감을 드러냈다. 주인공이 지체장애인같이 보였으며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는 것 같아서 매우 불편한데다가 싸구려영화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영화를 만든 제임스는 사회적 약자를 조롱할 뜻은 없었다고 말하며 시청자들이 재미있게 보았으면 좋겠다며 혹평에 의연했다.

이변이 있었다고 이미 밝힌 대로 <Get a room>은 통과했다. 그것도 시청자들의 투표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상위 3등 이내에 들면서 통과해버렸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제임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심사단은 재치 있게 넘겼지만 나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졌다. 영화란 무엇인가, 하는 의미 없는 질문 말이다.

약자들만의 연대에 기대는 약자에 대한 관심 싫어

영화는 상품과 예술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이다. 제임스의 코미디는 분명 매우 웃긴 코미디 영화였고 시청자들은 그에게서 제대로 웃긴 코미디 영화를 기대했다. 그것이 대중의 속성이지, 라고 넘긴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스필버그가 제작하고 드림웍스가 지원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진지한 주제의식을 잘 다루는 작가주의 감독을 발굴할 일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절에 국경 없고 계급 없는 사이버 세상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견해가 지지 받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이 시도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당연하게 소통되리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사이버 세상에서도 조회수의 정치학이 존재하고 분배의 차별이 존재한다.

얼마 전 어느 인터넷신문의 기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그 신문의 주 독자층은 3,40대 직장인 남성인데, 편집국에서 아무리 의식적으로 중요하게 배치해도 조회수가 오르지 않는 기사들이 있다고 했다. 장애인, 여성,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기사들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했다.

왜 내가 제임스의 영화가 3등 안에 드는 쾌거를 보면서 그 일간지 기자의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이건 단순히 대중의 속성과 대한민국 3,40대 직장 남성들의 일상적 관심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신문에 전폭적인 애정을 가지지 못하는 변명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약자들만의 연대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 싫어서이다.
정말 웃긴 코미디 영화를 기대하는 것은 좋은데, 제임스 같은 유능한 영화감독이 심사단의 의견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까봐 그게 싫은 것이다. 대한민국 3,40대 직장인 남성들이 한국의 정치 상황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뭐라 할 수 없는데, 그것 밖에 모르는 밴댕이들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 #온스타일 #온더랏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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