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의 숨결 따라 찾은 고구려 오녀산성

한국방정환재단 어린이·청소년 고구려 문화유적답사[1]

등록 2007.09.13 16:02수정 2007.09.14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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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오녀산성(자료사진) ⓒ 오명록


"선조들 높은 기상 가슴에 담다"

한국방정환재단은 지난 7월 31일부터 지난달 6일까지 동북아역사재단의 후원으로 6박7일동안 어린이·청소년 고구려 문화유적 답사를 다녀왔다. 만주벌판을 달리던 고구려의 기상과 동북공정에 관한 심도있는 이해를 위해 떠난 이 여정을 자유로운 신화해석을 곁들여 연재한다


#1. 심양공양 도착, 999계단 올라 돌아본 첫 도읍지

심양공항에 내리자 하늘이 잔뜩 흐려있었다. 내심 '비라도 와서 답사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었지만 이국의 풍경에 공항을 배경으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우리의 어린학생들 일행들에게는 "7·8월 땡볕보다는 구름 낀 날씨가 여행에 오히려 제격"이라 일러주며 서둘러 대기하고 있던 차량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버스가 출발할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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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안의 우물 '천지'라고 성안의 우물 지금은 물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한다. ⓒ 오명록



새벽 5시에 사무실을 나서며 참가인원을 일일이 전화로 확인하고 6시40분에 인천 공항에서 만나는 약속을 지켜 차질 없이 중국입국까지를 마쳤는데 막상 심양공항을 벗어나야 할 버스에서 우리 일행 13명은 한 시간이 넘도록 발이 묶여있는 것이다. 운전기사가 차량에 비치해야 하는 무슨 자격증 같은 걸 갖추지 않아서 그렇대나, 공안이 돈이 필요해서 일부러 단속을 한 대나…. 아무튼 한참을 지나서야 뒷돈이 오가고 했는지 우리는 심양 고궁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 중국에서는 교통경찰이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전화 한통화로 신원 확인에서 자격 여부까지 금방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과 어떤 나라(?)에서는 '권력이 깡패더라'는 이야기가 생각나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심양 고궁은 작은 자금성이라고 하는 청나라 초기의 문화유적이다. 만주족(여진족)의 누루하치가 후금에 이어 청나라를 건국하고 중원으로 옮겨가기 전까지의 통치 무대가 바로 이 곳이다.

궁궐은 우리의 고궁에 비해 웅장하고 화려하다. 깃발의 나라답게 다양한 울긋불긋한 깃발들이 전시되어 있고 활이며 칼, 대포 등의 당대를 호령했던 무기들과 황실의 아기를 키웠던 요람까지도 잘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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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의 주거흔적 온돌자리가 드러나 있다. ⓒ 오명록


우리 학생들의 키에 견주는 큰 활을 보며 이번 답사의 길잡이로 나선 구준모 선생(한국방정환재단 문화사업팀 백두대간 대표)이 설명한다. "여기에서 보는 활과 우리 고구려시대의 조상들이 사용했던 활은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마치 중국무협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무기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학생들을 향해 구준모 선생의 설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고구려 시대에 사용했던 활은 이렇게 큰 활이 아니야. 생각을 해봐. 말을 타고 달리며 어떻게 저 큰 활을 자유자제로 사용 할 수 있겠어? 여러분들이 책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았을 텐데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활 쏘는 무사들의 모습은 말을 달리며 뒤쪽을 향해서도 거침없이 자유자제로 활 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었지 않니? 그러려면 활은 훨씬 더 작았어야 하는 거야…."

잔뜩 찌푸린 하늘이 기어코 한바탕 소나기를 퍼부었다. 궁궐 마당을 장식한 검은 대리석이 굵은 빗방울과 어울려 반짝이며 소나기의 위세를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주었다. 순식간에 마당은 텅 비었고 누르하치의 위엄만 하늘로 치솟은 대궐의 기와지붕으로 다가왔다.

조선시대 인조임금 시절 병자년의 호란을 일으켰던 누르하치의 기세가 이런 소낙비였을까? 비를 피해 이리저리로 흩어지는 관광객의 모습과 난리를 피해 산천으로 짐승들 사이로 숨어들었던 우리네 역사의 동선이 결코 같을 수 없을 줄은 알지만 비가 그치고 관광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리를 나서고 우리는 지금 관광객이 되어 사라진 누르하치의 옛 흔적을 살핀다.

혹자는 청태조 누르하치를 그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를 들어 신라의 후예이자 우리 민족의 일원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금사에 자신의 시조를 신라계 김함보라고 썼다고도 하는데 아직 이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한편으로 어린 시절 읽었던 박씨부인전이 떠올라 실웃음이 났다. 궁궐 뒤편에서 본 하늘 높이 솟은 굴뚝이 자꾸만 눈길을 뒤돌아보게 한다. 굴뚝이라. 아궁이도 있을 것인데…. 온돌방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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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오르는 계단 오녀산성 오르는 길이 999계단이라 한다. ⓒ 오명록


#2. 본계수동과 환인

본계수동에 들렀다. 심양에서 약 50km쯤 떨어진 곳이다.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거대한 석회암 동굴이다. 바닥으로 제법 깊은 물이 흐르고 그 물길을 따라 전기 보트를 타고 내부를 관람한다. 한여름인데도 추위를 피하고자 보트를 타기위해 입었던 두툼한 덧옷을 입어야 했다.

종유석이 머리에 스칠 듯한 물찬 동굴을 둘러보며 옛사람의 감상에 젖어본다. 보통 동굴은 아득한 옛사람에게 있어서 자연이 주는 1차적 터전이자 삶의 보금자리였을진데 10리 가까운 물찬 어두운 동굴에서 이 땅의 옛사람은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아늑함에 앞서 두려움과 신비함은 없었을까? 이곳은 분명 삶의 터전이 아니라 신비로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리라.

동굴을 들어 설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나오는 길에서 차려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발굴되었다고 유리 상자 안에 보관하여 발굴된 그 자리인 듯한 곳에 진열해둔 질그릇들이 그것이다. 입구에 늘어서서 옛사람의 생각을 전해 주는 듯하다. 의식을 올리는 곳, 신성한 공간. 다음 행선지에 들어있는 국동대혈을 기대하며 옛사람의 긴장으로 그 삶을 가늠해 보게 한다. 

환인으로 갔다. 지명이 예사롭지가 않다. 우연인지 우리 역사서의 신화에 맨 처음 등장하는 분의 이름이기도 한 이곳에 고구려의 첫 도읍지가 있었다. 오녀산성이라는 이름을 찾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졸본성 내지는 홀승골성을 찾아온 것이다.

비류수(혼강)가 돌아 흐르는 이 곳, 어떤 이는 비류수라 말하는 이곳을 주몽(추모)이 대소에게서 도망치며 물고기 등의 도움을 받았던 엄리수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하자. "나는 천제 해모수의 아들이자 물의 신 하백의 외손이다 나에게 물길을 열어다오." 쫓기던 주몽이 이렇게 외치자 자라며 거북이 등 온갖 물고기들이 길을 만들어 주어 주몽의 일행은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홍해를 지팡이로 쳐서 가른 모세보다는 더 현실적인 해석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러자면 주몽의 주문과 물고기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주몽의 외할아버지였던 하백과 그 부족들을 상상해 본다. 옛날의 원시 부족들은 자신들의 삶의 환경에서 숭배와 극복의 대상을 찾아 섬겼으리라. 물가에서 살았던 이들은 물에서 자유로운 대상을 부러워했을 터인즉 그것이 거북이나 자라였을 수도 있겠고 잉어나 붕어나 미꾸라지였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것들은 물가에 살던 옛사람 집단의 상징이자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고 그래 거북이부족, 자라부족, 잉어부족, 붕어부족 또는 미꾸라지 부족이라 한들 어떠랴. 그 들은 자신들 수상세력의 우두머리였던 하백의 외손이 보내는 절규에 기꺼이 도움을 더해 물길을 열어주고는 뱃머리를 돌렸을 것이다.

주몽은 그렇게 도망쳐 하늘 가까운 산(오녀산 정상은 823m라고 한다)에 올라 한숨을 돌리고 제 둥지를 틀어쌓았을 것이다. 그곳을 졸본성 혹은 홀승골성, 지금의 이름인 오녀산성이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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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성문자리 오녀산성 성문입구 자리에서 성벽 쌓기에 관해 설명을 듣다 ⓒ 오명록


#3. 드디어 오녀산성, 댐 건설로 수장된 유적 안타까워

오녀산성 주차장에서 산성 위로 오르기까지는 999계단이 아스라이 놓여있다.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 18반이라는 표지판이 말해주듯이 무려 열여덟 굽이를 돌아서 올라가야 하는 산성은 험준한 요새 그 자체이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쳐지고 더러는 굳게 쌓아올린 성곽으로 바위틈의 푸른 이끼가 세월을 지켜온 채 단단함을 드러내 보인다.

주몽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피신처를 찾아 숨 가쁘게 올랐을 이 길에서 문득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저 높은 곳에 목을 축이고 생활을 영위할 만한 물이 있을까? 언젠가 남한의 해방공간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전력을 지닌 어떤 이가 들려준 산 생활 이야기에서 "빨치산 들은 산속의 샘물을 꿰뚫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이 곧 생명이라는 설명이었다. 하긴 바다의 섬들도 예전에는 그 크기와 상관없이 먹을 물이 없는 곳은 여지없이 무인도일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었으니…. 아이들이 자꾸만 뒤쳐진다. 헐떡이는 일행을 다그쳐 산성을 올랐다.

성문의 흔적은 아직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짝을 세웠음직한 움푹 팬 돌 받침이 빈자리에 빗물을 머금고 입구에 남아 옛 사연을 전해준다. 산성 위는 생각보다 평평하고 넓다. 오르는 길에 의문을 지녔던 샘물도 제법 큰 웅덩이로 자리하고 있었다. '소천지'란다. 산성 안에는 여기저기에 옛 사람들의 흔적을 발굴해 보여준다. 추모왕 시절의 궁궐자리라는 설명이 있는 곳에서 아이들이 의문을 표시한다. "나라를 세웠다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왕궁이 겨우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단 말 이예요?" 선생님의 설명을 기다리는 눈빛들에 실망감이 역력히 보인다. 그럴 만도 하다 고작 크기가 가로 13.5m 세로 6m의 여섯 칸 집 자리를 고구려 초기 궁궐터로 추정한다고 하니….

구준모 선생은 태극정으로 일행을 이끌어 와서 환인 댐에 갇힌 비류수 강물을 내려다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평저성과 산성을 세트로 도읍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가볼 국내성이 환도산성과 어울려 그렇고 평양성 역시 마찬가지의 구조란다. 아래 내려다보이는 환인댐 물속에는 수없이 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수몰되어 있다고 한다. 그중에는 많은 고구려 고분들도 함께 수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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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정에서 본 환인댐 태극정에서 바라본 환인댐과 비류수 강 ⓒ 오명록


초등학교 4학년인 경일이가 질문한다. "그럼 그 고분들에 있을 벽화는 모두 어떻게 되지요?" 중학 2학년인 정훈이가 거들었다. "다 망가져 버렸겠지. 철제 유물들도 모두 부식되어 사라질 것이고…." 한쪽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이렇게 물속에 처박아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결국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묻고 답하기를 해버린 꼴이다. 아쉬움 가득한 어린 눈망울에 비친 환인댐이 한스러움을 더한다.

발길을 돌려 점장대로 향했다. 그곳에는 '요녕 제1경'이라는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환인댐에 갇힌 비류수 물굽이 너머까지의 장쾌한 경관이 요녕 제1경이라 할만도 했으련만 저 물속에 말없이 수장되어 있을 고구려의 고분이며, 이 산성과 어울려 평저성으로 도읍을 이루었을 우리 조상들의 유물 유적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라렸다. 아이들도 그저 묵묵히 둘러보기만 할뿐이다. 비가 내렸다. 

산성 안에 발굴해둔 거주지 흔적에서 온돌 자리를 몇 곳 확인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온돌이 중국의 한족 문화와 차이가 나는 바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 표징이라는 점이다. 불을 다루고 활용함에 있어서 앞섰던 우리 조상들은 아예 불을 깔고 살 요량으로 온돌을 고안해 사용했으니. 올라왔던 길로 다시 내려갔다. 비가 와서 이미 다른 길은 모두 폐쇄했다는 것이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사회신문에도 함께 올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사회신문에도 함께 올렸습니다.
#방정환 #고구려 #주몽 #오녀산성 #오명록 #송정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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