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선물! 마음입니까? 관행입니까?

해마다 추석 즈음이면 '선물 처치'로 곤욕입니다

등록 2007.09.21 14:02수정 2007.09.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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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다녔을 때로 기억합니다. 교실이 왁자지껄했던 추석 즈음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침 조회 시간 때 선생님께 드리기 위해 손마다 선물 꾸러미를 든 친구들 틈에 끼어 무척 부끄러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예쁘게 포장이 된 친구들의 선물 꾸러미 안에는 꽤 값비싼 것이 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와 몇몇 아이들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그들의 설레는 표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들 중에는 설령 선생님께 선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친구들에게 가난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분기별로 내야만 했던 '육성회비'를 학교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면제해주는 혜택이 있었음에도 드러내기 싫어서 거부했던 적도 많았고, 반찬이라야 김치뿐인 도시락을 보여주기 싫어서 굶은 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간 제게 선생님께 선물을 '드려야 하는' 날은 쉬는 날이었음에도 그 날이 오는 것 자체가 싫었습니다. 가정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어머님께 떼를 써서 종이 포장된 양말 한 켤레라도 선생님께 갖다 드릴라 치면 '어떻든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습니다.

선물을 건네는 모든 아이들의 마음이 다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저는 어렵사리 준비한 것을 건네면서도 은혜에 대한 고마움은커녕 이런 '안타까운 사연'을 몰라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선생님의 눈빛이 싫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분명 '선물'이었지만, 제게는 '선물'일 수 없었습니다.

한 번은 용기를 내어 선물 대신 편지를 써서 교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적이 있었는데, 봉투에 넣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꼬깃꼬깃 접은 모양이 성의없게 느껴져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업무가 많고 바쁘셔서인지, 펴 보지조차 않은 채 옆 휴지통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야 있었겠지만, 2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할 만큼 그땐 정말 섭섭했습니다.

학창시절 그런 아픈 추억을 떠올리는 제가 교사가 되었고, 또, 교사인 아내를 만났습니다. 세월은 많이도 흘렀지만 '선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집으로 배달되는 선물을 처치(?)하느라 골머리를 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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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명절을 앞두고 선물 고르는 손길이 분주하다. 사진은 지난해 추석을 앞둔 서울 명동의 한 백화점 선물세트 매장. ⓒ 오마이뉴스 김시연


택배회사에서 집으로 직접 배달되는 것이야 '수신거부' 형식을 빌어 돌려보내면 그만이지만, 아파트 경비실에 맡겨둔 것은 직접 되돌려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학생의 주소를 일일이 확인하고 찾아가 똑같은 방식으로 경비실에 맡겨놓고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주소가 아파트가 아닌 일반 주택의 경우에는 무척 난감합니다. 집배원이 아닌 다음에야 번지수로 집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작년에는 경찰의 도움으로 주소를 확인해 반송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것은 선물을 돌려주며 '양해'를 구하기 위해 학부모에게 전화나 편지를 하는 일입니다. 선물을 돌려받는 입장에서 보면 속상하다 못해 매우 불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애걸하듯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봐야 '진심'을 받아주는 경우는 여전히 많지 않은 듯합니다.

저도, 아내도 '교사'와 관련된 선물은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습니다. 학생이든, 학부모든 선물을 주는 사람과 제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면, 애초에 선물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담임으로서 학급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선물을 받는다면, 그 안에는 '다른 아이들에 견주어 조금 더 신경 써 달라'는 의미가 담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선물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 이태 전 졸업한 제자와 그의 아버지로부터 값진 술 한 병 받은 적이 있고, 지난해 졸업식을 마치고 어느 학부모로부터 꽃다발과 함께 주유 상품권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 아이에게 더 이상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자유로운' 입장으로 여겼기 때문에 별 거리낌이 없었으며, 외려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여기고 고맙게 받았습니다.

이런 고지식해 보이는 '원칙' 때문에 저도, 아내도 귀찮고 피곤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중학교 때 제가 받아야 했던, 또 견뎌야 했던 (앞서 말한) '스트레스'가 그것입니다. 누군가가 선생님이 고마워서, 진정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선물을 한다고 해도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줄 수밖에는 없습니다.

'남들 다 하는데 나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주는 사람의 기쁨과 받는 분에 대한 고마움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는 '무난한' 선택이며, 어느새 거스르기에는 찝찝한 관행이 되고 맙니다.

관행이라는 게 다 나쁜 것은 아닐 테지만, 잘못된 것일지라도 일단 굳어진 관행은 깨뜨리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관행을 깨는 것이 바로 역사의 발전이고 진보라며 말하기까지 합니다.

선물을 주는, 아니 줘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관행을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곧 조금이라도 오해와 불신의 소지가 있는 선물이라면, 받는 사람 쪽에서 거부할 수 있어야 비로소 관행에 균열을 낼 수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주니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백년하청일 뿐입니다.

오늘 아침 출근해서 메일을 열어보니 작년에 졸업한 아이 세 명과 학부모 두 분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를 했던 작년이 그립다는 추억 얘기와 추석 잘 보내라는 단순한 안부 편지일 뿐이었지만, 한참 시간이 흘렀어도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고마웠습니다.

비록 종이 위에 펜으로 눌러 쓴 것은 아니지만, 그 편지들에는 굴비 세트나 사과 상자, 상품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성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행복을 나누어야 할 명절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지만, 선물에 담겨야 할 정성과 마음은 점점 관행화되어가는 듯해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추석 선물 #교사 #선물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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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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