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은 중년의 빛깔을 닮았다

[포토에세이] 가을빛

등록 2007.09.27 17:50수정 2007.09.2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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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알이 익어가는 벼,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그네들의 삶이 아름답다. ⓒ 김민수


가을이 익어간다. 올해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기후변화를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폭우와 태풍으로 인한 피해뿐 아니라 쌀쌀한 가을밤을 맞이해야 할 요즘까지도 열대야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으니 가을이라고 제대로 여물어갈까 걱정이 된다.


그래도 가을은 온다는 것이 새삼 고맙기만 하다. 추석에 강원도 물골에서 알밤을 많이 주워 날로도 먹고, 삶아도 먹었다. 맛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추억으로도 먹는 밤이라 나는 그 맛을 잘 모르고 먹었는데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밤맛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삶은 밤을 먹어보니 역시나 햇살 가득 머금은 밤보다는 맛이 덜한 듯하다. 그래도, 가을이 왔고 알밤이 떨어지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을빛이 온전해지려면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이미 가을은 우리에게 왔고, 지금 우리에게 온 가을빛을 하나 둘 찾아보니 다양한 빛깔들로 우리 앞에 이미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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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 가을햇살에 나른한 청개구리가 고구마잎에 앉아 졸고 있다. ⓒ 김민수


오랜만에 만나는 청개구리, 비가 오면 울어대는 그들을 보고 사람들은 그럴 듯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청개구리를 불효자의 상징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개구리 중에서는 가장 예쁜 걸 어쪄랴!

다른 개구리들이라면 질겁을 하는 아이들도 청개구리를 잡아 손에 가만히 놓아주면 예쁘다고 하니 개구리 중 귀염둥이 개구리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볼라치면 오줌을 찍하니 갈기고는 풀섶으로 사라진다. 얼굴에 청개구리 오줌이 튀면 퉤퉤거리며 씻을 물을 찾던 유년의 기억, 그 기억의 한 자락은 가을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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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과 호랑나비 백일홍의 진한 색깔은 곤충들을 유혹하기에 딱 좋다. ⓒ 김민수


가을빛깔, 꽃 중에서는 아마도 백일홍이 으뜸이 아닐까 싶다. 여름부터 피어난 백일홍은 진짜로 100일을 피어나려는 듯 시골집 화단을 가득 메우고 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짙은 색깔에 끌려 날아드는 곤충들의 날갯짓은 작은 음악과도 같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하는 말을 그냥저냥 지나쳤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넘치지도 말고 부족하지도 말라"는 이야기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런데 가을은 꼭 그렇다. 그 중용의 미를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한 사람들 모두에게 풍성한 계절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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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매화 가을 숲의 잔잔한 흰물결 같은 물매화 ⓒ 김민수


말 한마디로 어머니의 가슴에 못 질을 한 적이 있다.
"어머니, 추석 때 토란국을 먹지 않으면 추석을 쇤 것 같지가 않아요."
올해 어머니는 물었다.
"토란국을 먹지 않으면 추석을 쇤 것같지 않다며?"
그러나 그건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이젠 가을꽃, 그 중에서도 물매화를 보지 않고 가을을 보낸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아직 썩 맘에 드는 것을 만난 건 아니지만 물매화의 새싹과 몽우리, 활짝 피어난 모습을 모두 보았으니 겨울이 와도 가을꽃에 대한 미련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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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국 가을꽃 해국은 바닷가의 모든 소리를 담고 피어난다. ⓒ 김민수


가을은 무슨 빛깔일까? 익어가는 벼의 빛깔도 아니고, 푸릇푸릇 청개구리의 빛깔도 아니고, 화사한 백일홍의 빛깔도, 수수한 물매화의 빛깔도, 은은한 보랏빛을 간직한 해국의 빛깔도 아니다. 그런 빛깔들이 조금씩 조금씩 들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가을은 중년을 닮았다.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소시민적인 행복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중년을 닮았다. 내세울 색깔은 없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결실들을 간직하고 있는 가을과 중년도 역시 닮아 있다. 가을빛이 쓸쓸한 까닭이기도 하다. 결실이라는 것 속에는 쭉정이와 껍데기가 없을 수 없으니.
#벼 #청개구리 #백일홍 #물매화 #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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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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