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시대에도 칼이 존재하였나?

[국립대구박물관 ②] 선사시대엔 어떤 칼을 사용했을까?

등록 2007.10.08 08:39수정 2007.10.0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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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관 내부로 들어오니, 우선 유리로 된 천장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천장이 우중충한 빛인 것이 날씨가 흐리기 때문이리라. 국립대구박물관에는 이번이 두 번째로 온 셈인데, 작년에 북한의 문화유산이라는 특별전을 보려고 모처럼 기회를 내어 왔었다. 그때도 날씨가 흐렸는데, 특별전을 보다보니 상설전시를 보지 못한 게 아쉬워, 이번에 기회를 내어 온 것이기도 하다.

 

국립대구박물관은 총 4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실과 미술실, 그리고 민속실과 특별전시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특별전시실은 2개로 나뉜다. 내가 방문하였을 때는 ‘심수상응 전시’와 ‘한국의 칼’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를 하고 있었다. ‘심수상응 전시’는 이미 끝난 지 오래이며, ‘한국의 칼’은 이제 얼마 후면 막을 내릴 예정이니, 생각이 있는 분은 급히 가서 보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번 ‘한국의 칼’ 특별전은 한국에서 출토된, 그리고 전래되는 칼들을 집합시켜 놓았다. 한국의 칼에 대해서 그 역사와 종류 등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 하겠다. 그리고 <한국의 칼>이라는 특별전 도록까지 사서 같이 본다면, 모르긴 몰라도 머릿속에 한국의 칼에 대한 역사는 제대로 인식이 되리라 본다.

 

이번 한국의 칼 특별전은 자세히 보면 크게 3가지로 구분되어 전시됨을 알 수 있다. 간돌검, 비파형동검, 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의 칼의 역사, 그리고 고리자루칼로 대표되는 삼국시대의 칼의 역사, 마지막으로 환도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칼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에서 역사란 기록으로 쓰여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그 이전의 기록이 없는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좀 더 세분한다면, 주체적인 역사기록이 남아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고 하며, 외부, 혹은 외국에서 쓰인 글로서 역사를 알 수 있는 시대를 원사시대라고 하여 구분하고 있다.

 

한국사에서의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그리고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다. 그리고 원사시대를 주로 원삼국시대로 보고 있는데, 사실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 바로 <삼국사기>의 초기기사의 신뢰성 여부라는 점이 쟁점이라 하겠다. 역사시대는 본격적인 문헌자료, 즉 금석문 자료의 존재 등을 보면 삼국시대 중기부터라고 해도 되겠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아직도 그 토론의 열기가 가시지 않을 정도로 논란이 되고 있다.

 

석기시대에도 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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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의 돌칼. 위의 것은 통영 욕지도에서 발견된 것이며, 아래의 것은 진주 상촌리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처럼 신석기시대의 돌칼은 한쪽에 날이 있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 송영대

▲ 신석기시대의 돌칼. 위의 것은 통영 욕지도에서 발견된 것이며, 아래의 것은 진주 상촌리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처럼 신석기시대의 돌칼은 한쪽에 날이 있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 송영대

 

아무튼 선사시대 중 가장 이른 시기는 구석기시대라고 하겠다. 구석기시대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원시인들이 돌도끼를 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생활을 하는, 그러한 생활모습을 연상한다. 그럼 이때에도 칼이라는 존재가 있었을까?

 

이는 칼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대답이 다르다. 칼이 마냥 무엇인가를 잘라내는 도구를 지칭한다면, 구석기시대에는 분명 칼이라는 존재가 있다. 돌날이라고 하여 석기의 한쪽을 떼어내어 날카롭게 한 다음 자를 수 있게 한 석기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칼은 손잡이가 달려 있는 한쪽, 혹은 두쪽에 날이 있는 칼이다. 이게 진정한 칼이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본다면 칼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한다고 하겠다.

 

신석기시대에도 돌칼은 있다. 이 중에서 제대로 된 돌칼은 고성 문암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번 특별전엔 선보이진 않았지만 그 형태는 누가 봐도 칼이라고 할만하다. 이번 전시에는 통영 욕지도에서 발견된 돌칼과 진주 상촌리에서 발견된 돌칼이 왔는데, 그 격은 고성 문암리 것보다는 좀 떨어진다. 통영 욕지도의 돌칼은 한쪽에 날이 있는데, 이는 앞뒤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베는 용도의 도구로 쓰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청동기시대에도 돌로 만들어진 칼이?

 

제대로 된 칼은 청동기시대부터 시작한다고 하겠다. 이 청동기시대의 칼은 주로 양날이 있는 칼, 즉 검이라는 게 특징이다. 이는 주로 찌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피홈, 즉 혈구가 있는 게 있는데, 이 혈구는 찔렀을 때 그곳을 통하여 피가 빠져나가게 한 장치를 말한다. 피홈이 있는 간돌검은 그 중 다수가 실전에서 쓰였던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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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의 간돌검 중 자루가 있는 것. 이러한 형태를 고고학에서는 유병식석검이라 부른다. 이런 유물들은 보이는 그대로 손으로 쥐고 찌르는 검의 용도로서 쓰였다. ⓒ 송영대

▲ 청동기시대의 간돌검 중 자루가 있는 것. 이러한 형태를 고고학에서는 유병식석검이라 부른다. 이런 유물들은 보이는 그대로 손으로 쥐고 찌르는 검의 용도로서 쓰였다. ⓒ 송영대

 

간돌검은 크게 손잡이가 있는 것과 손잡이가 없는 것으로 구분한다. 손잡이가 있는 것도 3가지로 구분되는데 손잡이에 단이 있는 것, 단이 없는 것, 그리고 단 2개로 손잡이가 이루어 진 것이다. 그리고 손잡이가 없는 것은 또 슴베가 있는 것과 슴베도 없이 칼날만 있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간돌검 중에서 손잡이가 있는 것은 당연히 검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들은 손으로 쥐고 찌르면서 싸우기 때문에 손잡이와 날 사이에 약간의 턱이 져 있다. 이를 칼코등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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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간돌검 중 자루가 없는 것. 이러한 형태를 슴베가 있는 형식, 즉 유경식석검이라고 부른다. 가운데에 있는 것은 애초에 검이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 옆에 있는 것은 아무래도 창으로도 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 송영대

▲ 청동기시대 간돌검 중 자루가 없는 것. 이러한 형태를 슴베가 있는 형식, 즉 유경식석검이라고 부른다. 가운데에 있는 것은 애초에 검이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 옆에 있는 것은 아무래도 창으로도 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 송영대

 

반면 손잡이가 없는 간돌검은 칼 이외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슴베라는 것은 칼날 아래에 손잡이로 보기는 어렵지만 약간 나와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들은 나무와 장착시켜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슴베는 구석기시대부터 슴베찌르개로 그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짧은 나무를 장착시켜 검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긴 나무를 장착시켜 창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검으로 사용한 경우, 다른 돌을 검 뒤에 덧붙임으로써 청동검과 비슷한 구조를 갖는 것들도 있다.

 

이러한 간돌검들은 전투에 쓰이기도 하겠지만, 주거지에서도 발굴된 예를 보아 일반 가정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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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중이었던 간돌검. 곡성군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제작과정 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처음에는 겉을 쳐내어 모양새를 다듬고 후에 갈돌로 갈면서 우리가 아는 형태의 간돌검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송영대

▲ 제작 중이었던 간돌검. 곡성군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제작과정 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처음에는 겉을 쳐내어 모양새를 다듬고 후에 갈돌로 갈면서 우리가 아는 형태의 간돌검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송영대

 

곡성군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재미있는 게 또 하나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간돌검인데, 제작되는 과정에 완성되지 못한 유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뭉툭한 모습이 독특해 보이는데, 이를 통하여 간돌검의 제작을 엿볼 수 있다. 간돌검은 처음부터 갈아서 만든 게 아니라, 주위 면들을 돌로 떼어내면서 그 형태를 잡아가고, 그 후에 신석기시대 이래로 널리 쓰인 방법인 날을 갈면서 그 모습을 잡아간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하나의 별거 아닌 것 같은 유물을 통해서도 그 당시의 제작기술이랄지, 제작방법이랄지 등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청동기시대에는 흔히 청동기를 많이 사용하였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청동기시대에 쓰인 청동기는 사실 다수가 아닌 소수이며, 이들 개체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오히려 신석기시대보다 더 발달된 형태의 석기들이 다수 보이며, 이는 청동기시대 이후인 초기철기시대 때 오히려 더 다양한 청동기가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이유로 사실상 청동기시대의 구분에서 기존 시대와의 구분을 무문토기, 즉 문양이 없는 토기로 보는 것이다. 물론 마을의 형성 등 여러 요소들도 함께 보고 파악하지만, 절대적으로 용어에서 보이듯이 그 도구가 시대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칼, 이러한 칼도 사실 알고 보면 그 나름대로 복잡하고 긴 역사가 있다. 이러한 칼들의 역사를 보기 위해 한번 여행을 떠나는 게 어떨까?

2007.10.08 08:39 ⓒ 2007 OhmyNews
#국립대구박물관 #한국의 칼 #돌칼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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