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능선에 서다

설악산 공룡능선을 종주하다

등록 2007.10.18 14:44수정 2007.10.1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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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의 단풍을 보지 않으면 가을이 아니다. 감히 그렇게 말해 봅니다. 설악산 대청봉의 단풍소식이 들려오면 마음이 벌써 들뜨기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삼년 전, 주전골에서 첫 대면한 설악의 단풍빛에 끌려 다음해는 내처 대청봉을 올랐습니다. 하산 코스였던 천불동 계곡의 단풍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올해는 설악의 가장 험난한 코스라는 '공룡능선' 입니다. 지구온난화의 부작용일까요, 갈수록 단풍이 곱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설악단풍의 진면목을 보고 온 이들이야말로 행운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남설악에 해당하는 주전골은 지난해 홍수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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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쉬었다 가자 비선대 넘어 마등령 가는길이 매우 가파릅니다. 그 길을 가다 만난 바위가 쉼터가 되어 줍니다. ⓒ 김선호


공룡능선을 지나 천불동 계곡으로 내려오면서 만난 그곳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천불동의 그 아스라한 낭떠러지를 떠받치고 있던 철난간에 거목이 쓰러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서져 내려오는 길에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비선대를 2km여 남겨두고 비까지 내려 이래저래 힘든 설악산행이었습니다. 아, 천불동 계곡에서 비를 맞고 있었던 그때, 설악산 대청봉엔 올해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새벽 다섯시, 서두른 보람이 있어 아이 둘과 우리 부부 네사람은 각자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신흥사 매표소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 바로 뒤로 세 사람의 등산객이 희미한 랜턴빛을 비추며 따라왔습니다. 모르는 이들이지만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사람이 있어 왠지 든든했지요. 그게 인연이었던지 마등령에서, 공룡능선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습니다.  산행 마무리 할 즈음, 처음 만난 그 장소에서 다시 세 분과  만났으니 하룻만에 대단한 인연을 지은 셈입니다.

산행이 어디 산을 걷다 만난 숲의 정경 뿐이겠는지요. 사람이 그 속에 섞여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산행도 공허할 뿐이겠단 생각입니다. 설악산 공룡능선을 걸으면서 '사람의 정'을 느낀 순간이 숱하게 많았습니다.

설악에서도 가장 고난도 코스라는 공룡능선을 걷는 아이들이라곤 우리 아이 둘 뿐이었습니다. 그 산에서 만난 오롯한 우리 두 아이는 오며가며 마주치는 어른들로부터 온갖 칭찬의 세례를 고스란히 다 받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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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명에 깨어나는 설악 마등령에서 바라본 설악산의 진경 ⓒ 김선호


'장하다' '훌륭해' '대단하다'부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어른들도 있었고, 봉우리를 넘어 온 이 아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어른들, 먹던 떡이나 과자를 들려주는 분들까지.


하지만,  마치 공룡의 등뼈와 같은 거대한 바위지대인 공룡 능선은 아이들이 타고 넘기에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지요. 그건 어른인 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쉼 없이 이어지는 암릉길은 오래 걷지 않아 발바닥의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였습니다.  그 암릉길마저 움푹 꺼졌다 다시 솟아나길 반복했습니다. 꺼지고 솟아 나오는 암릉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동안 몇 개의 봉우리를 지나왔는지 셀 수가 없었지요.

그런 산행의 악조건 속에서도 공룡능선이 보여준 장엄미는 과연 천하 절경이었습니다. 마침, 정상에서부터 산 중턱까지 내려와 절정을 이룬 단풍은 장엄미에 색채미를 더했습니다. 내 눈이 그토록 호사를 누린 일이 드물었지요.  앞뒤 양옆, 어디를 보아도 울긋불긋 단풍든 숲은 암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니까요.  여느 산에서처럼 조망대가 따로 필요 없는 구간이었습니다.

백두대간을 지나는 구간인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설악은 내설악과 외설악으로 갈립니다. 설악동에서 시작된 산행이 비선대를 거쳐 마등령 고개 너머 공룡능선으로 들어섰으니 오늘 설악산행은 외설악의 진면목을 고루 경험하는 산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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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문을 지나다 아찔한 암벽 사이를 숨바꼭질 하듯 지나는 아이들에게 산은 놀이터 ⓒ 김선호


외설악을 거쳐 공룡능선 한가운데 들어서면 내설악의 대강도 살펴 볼 수가 있습니다. 공룡능선이 설악의 전모를 살펴보기 가장 적당한 구간인 까닭입니다.  설악의 중심인 공룡능선에 서 보는 일은 설악의 면면을 머리에 새기는 일입니다.

웬만한 산악인에게도 쉽지 않은 코스라는 공룡능선도 이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이라면 누구나 도전해 볼 수 있게 길이 잘 닦여 있습니다. 가끔 움푹 파인 암릉 구간에서 사람들로 인한 정체가 생길 정도로 공룡능선을 이용하는 이들도 참 많아졌습니다.

헤드랜턴에 의지해 어두운 산길을 걷던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집니다. 다행히 비선대까지의 길은 넓고 평평해 간간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던 일 말고는 쉬운 길이었습니다. 첫 고비는 비선대를 지나 마등령(1327m)을 향해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에서였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거의 직벽의 구간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데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였습니다. 여전히 새벽의 미명만이 산길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마등령을 넘어서고는 악명 높은 공룡능선을 넘을 때도 그렇게까지 가파르게 올라가는 길은 없었지요. 그 길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었던 건 큰 위안이었습니다. 아니,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불쑥, 저 건너 산봉우리 사이로 아침해가 떠오를 때의 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숲 구석구석을 비추며 햇살이 스며들어오는 걸 느끼며 산길을 걷는다는 건 분명 흔치 않은 행운이었습니다. 아득한 산봉우리 너머로 해를 밀어 올려준 동해바다가 산자락 끝에 몽롱하게 펼쳐져 있는 걸 봅니다. 등뒤로 따라오던 해가 고갯마루에 먼저 도착해 손을 내밀어 씩씩거리며 올라가는 아이들을 맞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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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에 찾아온 가을 암벽과 조화를 이룬 설악산 단풍의 특별한 아름다움 ⓒ 김선호


생각해 보면 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는 공룡능선보다는 마등령 고갯마루를 오를 때가 가장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어렵사리 마등령에 올라 나한봉, 1275봉 그리고 신선대가 공룡의 등줄기를 가르고 우뚝 솟아있는 모습을 눈앞에서 마주하니 새롭게 힘이 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막상 공룡능선에 들어서니 나한봉이며 1275봉이니 신선대니 하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이 무색할 정도로 사방이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과연 거대한 공룡의 등뼈를 이리저리 꿰맞춘 조물주의 신기한 솜씨가 느껴집니다. 살아있는 공룡의 뾰족한 돌기 하나를 심어 놓은 듯한 암벽을 앞에 두고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습니다. 공룡능선을 따라 설악산의 장엄미는 물결치듯 이어졌지요.

지난해 대청봉을 내려오다 만난 공룡능선의 등줄기를 보며 '공룡 잡으러 가자' 고 아이들과 했던 약속을 상기해 봅니다. 막상 공룡능선에 들어서니 '공룡 잡으러 왔다 공룡한테 먹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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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한 암벽구간 저 길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 ⓒ 김선호


다행히 우리 아이 둘은 끝까지 잘 따라와 주어 아니, 앞장서 주어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국토를 종단하며 조카들과 함께 오대산을 걸었던 한비야씨 식으로 말하자면 아이들은 부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씩씩하다는걸 알게 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힘들었지만 뿌듯하다고 아이들이 소감을 말합니다. 공룡능선을 넘은 일을 떠올리면 이제는 어떤 어려움도 맞설수 있을 것 같다고도 합니다. 저 역시 동감입니다. 공룡능선은 우리 아이들에게 '호연지기'의 높은 기상도 심어 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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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인한 정체 설악의 악명높은 공룡능선에도 이렇듯 사람들이 많이 찾아들고..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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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 탁 트인 하늘이 손에 닿을듯...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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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의 잃어버린 돌기 하나 어떤 공룡일까, 설악에 돌기 하나 빠뜨린 그 공룡...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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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이 울긋 불긋 정상에서 중간 능선까지 설악은 한창 단풍으로 불타오르고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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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5봉의 위용 저 뾰족한 봉우리 위에 올라간 사람, 하나, 둘, 셋...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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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동계곡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자랑하는 천불동계곡에 거목이 내려앉은 사고가 났고, 길은 지체, 정체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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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왔다. 사람들로 인한 정체를 빠져나와 비선대를 향해 씩씩하게 걷는 아이. ⓒ 김선호


#공룡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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