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저녁 종소리는 나그네 마음을 어루만지건만

오대산 월정사에서 보낸 가을 저녁 한때

등록 2007.11.01 16:47수정 2007.11.0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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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들어가는 길(자연관찰로). ⓒ 안병기

월정사 들어가는 길(자연관찰로). ⓒ 안병기
 
가을 해는 짧다. 깊은 산중에서는 더 빨리 저문다. 오후 6시도 안 되었는데 관음암에서 월정사로 내려오는 길은 아주 어두컴컴해졌다. 배낭 뒷주머니에 든 플래시를 꺼낼까.
 
인도에선 밤에는 나무에 손대지 않는단다. 아마도 잠자는 나무를 깨우지 않으려는 배려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어두우면 불을 켜는 나는 얼마나 무지막지한 인간인가. 무릇 모든 여행의 궁극은 반성이다. 여행하는 사람은 반성하고자 떠난 사람이다. 플래시를 꺼내려다 말고 그냥 걷기로 한다.
 
어린 시절, 밤중에 어두운 산길을 걸을 때는 공포를 떨쳐버리려고 뭔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걸었다. 내 머릿속에 든 밑천이리야 시 몇 구절밖에 더 있는가. 송수권 시 '찬란한 밤길'을 가만히 중얼거리며 걷는다.
 
내가 가는 밤길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서러운 운석이
몇 차례씩 묻히는 것이 보이고, 아무래도
저 세상 밖의 어떤 불길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예감한 듯
파천황  같은 별들이 옷소매에서 지기도 한다
 
내가 가는 밤길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천상천하 별 밭, 별들이 쓸어 놓는 길이 끝나고서야 문수사의
일주문에 닿고, 문수보살을 만날 수 있나니
아무래도 내 밤길은 도솔천을 잘못 오르고 있나 보다 - 송수권 시 '찬란한 밤길' 일부
 
누가 뭐래도 시는 컴컴한 정신을 밝혀주는 플래시 같은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지금 도솔천을 오르는 게 아니냐"고 자신이 걷는 밤길에 환호작약하지만, 난 좀처럼 길을 잘못 드는 법이 없다. 금세 월정사에 닿고 마는 것이다.
 
팔각구층탑의 연출하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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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불전인 적광전과 팔각구층석탑. 낮에 이곳에 들렀을 때 찍어둔 것이다. ⓒ 안병기

중심 불전인 적광전과 팔각구층석탑. 낮에 이곳에 들렀을 때 찍어둔 것이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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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에 비친 팔각구층탑. ⓒ 안병기

불빛에 비친 팔각구층탑. ⓒ 안병기
 
월정사에는 아까 낮에 잠시 다녀가긴 했다. 뭔가 정리되지 않은 듯, 들뜬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밤의 월정사는 그때와는 적이 고요하다. 이제야 비로소 절집답다. 정시한(1625~1707)의 <산중일기>를 떠올린다. 320년 전, 월정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오대산으로 들어서 큰 시내를 건너고 다시 다리를 건너 20여 리를 가서 산문 밖에 당도하여 금강연 가의 반석에 앉아 쉬노라니, 깊은 못물이 맑고 깨끗하여 완상할 만했다. (중략)
 
한참을 앉아 있다가 산문 안으로 들어서니, 월정사라는 세 글자가 금자로 씌어 있었다. 범종각과 정문을 지나 법당에 이르니, 현판에 칠불보전이란 넉 자가 씌어 있고 일곱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승려가 말하기를 "중국에서 온 칠불상이다"라고 하였다.
 
법당 앞에 기괴한 모습으로 천연스럽게 조성되어 있는 구층탑은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희원이 저녁상을 차려 주었다. 승려 해천은 바로 청룡사 승려 광수의 상좌로 30년 전에 청룡사에서 나를 본 적이 있는 이였고, 도안 역시 계해년에 법천에서 나를 본 적이 있는 이였기에, 옛일을 이야기하며 담소를 나누다가 행로전에 서 묵었다. - 정시한의 <산중일기> 1687년 10월 5일치 일부
 
정시한의 글을 보면 지금의 적광전 자리에 칠불보전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행로전'이라는 요사는 어디쯤 있던 것일까. 그 빌어먹을 6·25만 없었더라면 우린 지금보다 훨씬 보기 좋은 월정사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불빛을 받은 팔각구층탑은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구층탑이 아니라 배처럼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다. 탑이 아니라 극락세계로 가는 한 척의 반야용선이다.
 
팔각구층탑이여, 시방 그대가 가는 곳이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정토가 맞거든 부디 나도 좀 데리고 가 주시라. 그러나 구층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온갖 세상 번민들로 가득찬 당신의 마음은 너무 무거워. 정 이 배에 타고 싶거든 먼저 마음의 찌꺼기들을 모두 비우고 오도록 하시오. 슬프다, 팔각구층탑이여. 분명 내 것임에도 마음 속 허깨비들을 어쩔 수 없구나.
 
그런데 구층탑이시여. 예전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운 채 그대에게 공양하는 자세로 있던 석조보살상은 시방 어디 계시는지요? 너무 연로하셔서 피곤하시다며 저 앞에 있는 성보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쉬고 계신다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석조보살상 없는 그대는 어쩐지 김병준 없는 노무현 대통령처럼 왠지 허전해 보이는구려. 허허허, 그 양반 입담하고는 참….
 
종소리는 어둠 속으로 황급히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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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 ⓒ 안병기

범종루.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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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에서 한 스님이 운판을 치고 있다. ⓒ 안병기

범종루에서 한 스님이 운판을 치고 있다. ⓒ 안병기
 
범종루에서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뎅, 뎅, 뎅…. 범종은 새벽에는 스물 여덟 번, 저녁에는 삼십 삼천을 상징하듯 서른 세 번을 거푸 친다. 아직도 지옥에서 허덕이고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지옥이 사후에만 있는 줄 아는 사바세계 중생을 위하여. 종루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종소리를 듣는다. 종소리 한 번에 일만 시름이 다 스러지는 듯하다.
 
종소리는 종종걸음을 쳐 어둠 속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마지막 순서인 운판 두드리기마저 끝이 났다. 절집이 거대한 침묵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너는 이제 어디로 가려느냐? 아직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밤이 깊어가는데도 여태 자신이 갈 곳을 정하지 않았다니 참으로 딱한 중생이로구나.
 
나마스테. 지금은 다만 당신 안의 신에게 경배할 뿐입니다. 그러나, 아직 내 안의 신은 당신 안의 신에게로 다가가기를 주저합니다. 그 아직이 얼마나 먼 거리인지는 제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어느 해 가을이었던가. 영주 부석사에 갔을 때 참석했던 새벽 예불 시간을 떠올렸다.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옆자리 사람이 중얼거리는 "지심귀명례" 소리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아, 저 사람에겐 돌아갈 곳이 있구나. 그의 옆 얼굴을 살짝 훔쳐봤다. 지극히 평화로웠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의 얼굴은 행복하다. 나무석가모니불…. 그러나 어느 것에도 쉽게 귀의하지 못하는 나.
 
생각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이제 월정사는 완벽하게 어둠에게로 귀의해 버렸다. 외톨이가 되어 이 어둠 속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엄습한다. 갑자기 목울대 저 아래서 밀고 올라오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까닭없는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어디에든 머물면, 그 순간부터 오욕칠정이 일어난다. 일어나서 뒹굴며 눈사람처럼 점점 부피를 키워간다. 너무 오래 머물렀구나. 인제 그만, 월정사를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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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 ⓒ 안병기

천왕문.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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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루. 누하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월정사가 눈에 들어온다. ⓒ 안병기

금강루. 누하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월정사가 눈에 들어온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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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수각이라 부르는 불유각. ⓒ 안병기

보통 수각이라 부르는 불유각.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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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박물관. ⓒ 안병기

성보박물관. ⓒ 안병기
2007.11.01 16:47 ⓒ 2007 OhmyNews
#오대산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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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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