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인간적으로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다

[서평] 니코스 카잔차키스, <최후의 유혹>

등록 2007.11.13 11:29수정 2007.11.1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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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최후의 유혹>은 교황청에서 금서목록에 들어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수의 인간적인 갈등과 고민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으며 기존의 교회가 가르치는 예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그리고 있기에 교회에서는 이 책을 거북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2007년 <디파티드>로 아카데미영화와의 기나긴 악연을 종식시킨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1988년 영화로 제작했던 이 작품은 기독교의 거센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수입이 되었지만 교회에서 상영을 중지하라는 압력(?)까지도 행사할 정도로 기독교적인 소재를 담고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951년에 알버트 슈바이쳐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했었다고 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의사이자 신학자였는데, 그는 학문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에 대해 연구한 신학자의 눈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은 노벨문학상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해 노벨상은 예수 대신에 풀려난 인물을 그린 페르 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이런 평가가 전해집니다.

"만약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어와 그리스지역의 출신 작가가 아니라 서구유럽지역의 작가였다면 그는 분명히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것이고… 톨스토이와 견줄만한 위치에 올랐을 것이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매 순간 절대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뜻이 아니라도 모순된 현실 속에서 과연 하나님은 어떠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를 궁금해합니다. 종교적인 행위(예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그가 오늘 우리에게 하려는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인간의 무한한 자유의지로 인한 내면의 목소리와 구별되지 못하고 섞여져 버렸습니다. 과연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각인지, 아니면 나의 의지에서 나온 것인데 하나님의 의지로 착각하고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의 음성을 듣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매순간 응답하고 있지만, 그것을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인 음성과 구분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매 순간 말씀하고 있지만 인간이 듣기 어려운 음성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주변의 평범한 사물 속에서, 평범해 보이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왜 우리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매 순간 너희들의 물음에 응답했다. 그러나 너희들이 귀를 막고서 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최후의 유혹>에 등장하는 예수는 그 자신이 하나님께서 계획한 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서 있음을 감각적으로 인지하지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계획인지 갈등합니다. 목수의 직업으로 그 당시 사형 틀인 십자가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 보려고 애쓰는 예수의 모습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신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 그는 인간 중에 가장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약한 자였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신음하고 있는 고통의 현장을 가장 크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이 현장에서 인간으로 살기를 희망하는, 영혼의 순수성을 찾으려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환상 속에서 몸부림칩니다. 그 와중에 내 시선을 고정시킨 것은 기독교에서 가장 위대한 사도로 인정받고 있는 사도 바울에 대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평가입니다. 환상 속에서 예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는 바울과 예수의 대면은 달리 생각하면 기존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이 작품을 금서로 지목하는 데 있어서 예수의 육체적인 사랑에 대한 논란도 있었겠지만,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라는 기본적 전제를 담고 있는 것도 한몫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예수에게 있어 '최후의'(!) 유혹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종교 조직을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그에게 환상 속에서 바울의 이야기가 유혹의 하나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책 전체를 읽고 마지막 부분에 '다 이루었다'라는 대목을 읽는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은 '예수에게 있어서 마지막까지 그를 괴롭힌 유혹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평범하고 싶었지만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없었던 그는 인간으로서는 가장 불행한 인간이었고, 그 불행을 통해서 인류가 희망을 갖고 살 수 있었기에 가장 행복한 신의 아들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개인블로그, 미디어다음, U포터뉴스, 뉴스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개인블로그, 미디어다음, U포터뉴스, 뉴스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유혹 - 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2010


#니코스 카잔차키스 #최후의 유혹 #노벨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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