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풍경> 상처 없는 사람 있으랴만

뒷동산에서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와 나무들

등록 2007.11.14 15:37수정 2007.11.1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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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의 깊은 상처 ⓒ 이승철

상수리나무의 깊은 상처 ⓒ 이승철


목숨 걸고 낳아 애지중지 길렀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한 너였는데, “엄마는 그것도 모르세요?” “나에게 뭘 해주셨는데요?” 부릅뜬 눈으로 내뱉는 네 말 한 마디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어미의 가슴을 후벼 파는구나.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쩌면 모든 노인들의 이야기다. 힘든 세상에서 아옹다옹 살아가노라면 주고받는 상처는 필연이다. 보이지도 않는 말이 창끝보다 날카롭다. 매섭고 싸늘하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무심코 네가 찌르고, 약이 올라 내가 찌르고,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게 삶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다. 그 상처들은 세월이 치유해준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게 있다. 자식이, 부모가, 형제가 찌른 상처는 쉬 아물지 않는다. 그 상처가 곪아 구더기가 생기고, 악취를 풍기며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기도 한다. 사랑할수록 조심할 일이다. 가까울수록 경계할 일이다.


- 이승철의 시 '상처 없는 사람 있으랴만'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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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을이 머물고 있는 공원과 정자 ⓒ 이승철

아직 가을이 머물고 있는 공원과 정자 ⓒ 이승철

[시작노트]

가을은 항상 아쉬움을 남기고 간다. 머리로부터 시작된 계절이 발끝에 이르지 못하고 허리쯤에서 뚝 꺾이고 말기 때문이다. 모진 무더위를 견디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가을을 느끼며 고운 단풍의 자태에 젖어들 때쯤, 어느 날 갑자기 몰아치는 찬바람에 가을은 속절없이 쫓겨 가는 것이다.

 

그렇게 가는 가을이 아쉬워 한가한 시간이면 뒷동산에 올라 아직 고운 나뭇잎이며 떨어진 낙엽에 연민의 시선을 던질 때가 많아진 요즘이다. 그 뒷동산에 한 달 전쯤 새로 정자가 하나 세워졌다. 아담하고 예쁜 모습에 삼각산이며 도봉산을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도 한 대 설치되었고, 빙 둘러앉을 수 있는 의자도 설치되어 있었다.

 

정자 주변에는 참나무와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등 잡목과 함께 멋들어진 소나무 몇 그루도 함께 서 있어서 운치를 더한다. 이날도 그 소나무 아래 판판한 바위 위에 서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노라니 60~70대 할머니들 몇이 정자 안의 의자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아침운동을 하는 아주머니들과는 다른 얼굴들이었다.

 

“둘째 놈이 뭘 해주었느냐고 대드는데 할 말이 없대요, 가난해서 풍족한 뒷바라지를 해줄 수가 없었지만, 자식 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요.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지만 가슴이 찢어지더라고요.”


뜻밖의 말이었다. 요즘 노인들 모여 앉으면 대개 자식자랑에 침이 마르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식에 대한 섭섭했던 이야기라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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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때문에 썩어가는 나무 ⓒ 이승철

상처 때문에 썩어가는 나무 ⓒ 이승철

“그 집 아들은 효자인 줄 알았는데. 하긴 자식들한테 한 번씩 안 당한 부모 있을라구요?”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무언의 동조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할머니들이 점심 후 산책을 나왔다가 모여 앉은 모양이었다.

 

“오래오래 살겠다고 보약에 운동에 바쁜 사람들 보면 저 사람들은 자식들이 얼마나 효자일까 부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더라니까요.”


이 할머니는 이웃사람들의 이야기로 자신의 썩 바람직하지 못한 자식이야기를 대신하는 셈이었다.

 

“나도 요즘은 이렇게 오래 살아서 무엇 하나 싶고, 자식들 얼굴 똑 바로 쳐다보기도 부담스럽고, 그래요.”


이야기가 한 번 그쪽 방향으로 흐르자 우울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대개 아들딸, 며느리에 대한 섭섭함과 상처받은 사연들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앉으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자랑이 나오면 자랑으로 이어지고, 흉이 나오면 흉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날 할머니들의 대화는 자식들에 대한 섭섭한 일들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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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의 다양한 상처 ⓒ 이승철

나무들의 다양한 상처 ⓒ 이승철

맨손체조를 끝내고 산책길로 나섰다. 산책로는 어느새 낙엽이 수북하다. 나무들도 잎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모습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나무들 중에서 상수리나무와 참나무 같은 나무들은 대개 줄기 옆에 커다란 상처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다. 모양도 다양하다. 크고 험한 상처자국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나무는 주변이 두툼하게 튀어나올 만큼 덮여 있는 것도 있었다. 또 어떤 나무는 그 상처자국이 썩어들어가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런 나무들의 상처자국은 대개 자라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가지를 잘라낸 흔적들이다. 가지를 잘라낸 자리가 아무는 과정에서 어떤 것은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어떤 나무는 작은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썩어가는 나무는 그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고 질병이나 불순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나무들의 상처는 모두 사람들에 의해 생긴 것들이다. 외부의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처는 다르다. 물론 몸에 생긴 상처야 사고나 부상으로 생긴 물리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몸의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의 상처인 것이다. 정자 안에서 할머니들이 나눈 대화는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 노인들의 보이지 않는 깊은 상처일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11.14 15:37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승철 #상처 #상수리나무 #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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