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혹독한 매가 진정한 칭찬이다

[칭찬 첨삭 원리⑥] "글과 치열하게 씨름할 수 있도록 해야"

등록 2007.12.11 10:26수정 2007.12.1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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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어려움 앞에 서면 꺾여 버린다. 힘든 인간관계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조금만 어렵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피해버린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는 깊이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시련을 통해 성장한다.

많은 아이가 시련을 스스로 이겨내는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어릴 때는 엄마 아빠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공부가 어려움에 닥치면 족집게 과외 선생이나 스타 강사가 아주 손쉽게 먹을 수 있도록 떠먹여 준다. 대학에서도 리포트를 내기 힘들면 손쉽게 짜깁기하거나 돈 주고 사서 제출한다. 시련을 견디기 어려우니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에 취직해서 안락하게 살기를 원한다. 시련이 싫어서다.

그러다 한 번 시련에 빠지면 낙담해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어쩌면 시련을 이겨내는 힘을 길러주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교육 앞에 놓인 가장 중대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어려운 과제를 두고 스스로 힘으로 해결해본 경험이 필요하다. 때로는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는데도 실패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 시련을 이겨내고 멋지게 성공하는 경험도 필요하다.

시련을 경험하지 않은 아이들은 시련을 겪을 상황이 예상되거나, 좌절할 우려가 있으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미리 겁먹고 피해버린다. 글도 마찬가지다. 쉽게 쉽게 써본 경험만 쌓은 아이들은 조금만 어려운 주제가 주어지면 피해버린다. 선생님 입만 쳐다본다. 주위 아이들이 어떻게 쓰는지 눈치만 본다.  

스스로 쓰더라도 위험한 주장, 창조적인 주장은 절대 하지 않는다. 안전하게, 시련을 겪지 않는 수준에서, 정답이라고 여겨질 만한 것만 내 놓는다. 그래서 재미없는 글, 상투적인 글이 나온다.

무조건적 수용과 규율 사이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모든 걸 수용해주는 편이었다. 특히 네 살 무렵부터 주말부부 생활을 하다 보니 주말에 내려와서 아이를 보는 것이 너무나 애틋했다. 날마다 끼고 있던 아이와 5~6일 동안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니 그 반가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걸 받아 줬다. 엄마가 야단을 쳐도 아이를 감쌌고, 아이가 버릇없이 굴어도 받아주었다. 먹고 싶다는 건 다 사주고, 하고 싶다는 건 거의 다 하게 했다. 아이가 어려운 일이 닥칠 것 같으면 미리 막아 주었다.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갖도록 늘 부추겼다. 항상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었다. 물론 그건 옳았다. 그 결과 아이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아이로 성장했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성장했다. 그런데 너무 지나쳤다. 아이가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아이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 유형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아이가 버릇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미리 피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인정해야 했다. 나아가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지나치게 아이에게 잘 대해준 것이 아이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봉쇄했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은 것이 부작용을 낳았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너를 사랑하지만, 이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해야 했다.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녹색평론사)에 나오는 돌마처럼 행동해야 했다.

"한 번은 돌마가 뜨거운 찻주전자를 붙잡으려 하는 세 살 된 아들을 찰싹 때렸다. 동시에 거의 즉각적으로 그녀는 아기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나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은 신호를 받으면 아이가 혼란스럽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경우를 여러 번 본 다음에 나는 그 뜻이 '나는 너를 사랑해. 그렇지만 그건 하지마'라는 것을 알았다. 돌마는 아이에 대해서가 그 행동에 대해서 불찬성을 표시한 것이다." <오래된 미래> 중에서

나는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 무조건적인 수용에서 벗어나 규칙과 규율을 지키는 가운데 사랑을 주는 방법을 연습하고 있다. 무조건 다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힘으로 자신 앞에 놓인 시련을 맞서 나가도록 지켜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아직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고, 날마다 노력하고 있다.

때론 글에도 매질이 필요하다

좋은 약도 계속 먹으면 약효가 떨어진다. 칭찬을 계속 받으면, 그리고 자기 글을 긍정적인 시선으로만 계속 바라보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경향이 생긴다. 선생님이 정성껏 칭찬해주어도 의례 것 하는 칭찬이려니 하고 별 의미 없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런 경향이 생기면 칭찬 첨삭은 완전히 약발이 떨어진다. 이런 상황이 되면 칭찬 첨삭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되어버린다. 글을 나아지게 하려는 노력을 가로막는 독소가 되어버린다.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이 버릇을 망치듯이, 무조건적인 칭찬 첨삭은 아이 글을 망치는 무서운 흉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완벽하게 글을 난도질할 필요가 있다. 이따위밖에 쓰지 못하느냐고 혹독한 비판을 가할 필요가 있다. 두 눈에서 눈물이 쏙 나오도록 자존심을 박박 긁어 놓을 필요가 있다. 글쓰기가 결코 쉽지 않음을, 진짜 감동을 주는 글은 결코 쉽게 나올 수 없음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아이가 쓴 글을 완전히 분해하고, 난도질한 후에는 처음부터 완전히 새롭게 쓰게 해야 한다. 수십 번 다시 쓰게 해야 한다. 사소한 것 하나 전부 트집을 잡아서 완벽하게 고쳐올 때까지 계속해서 다시 쓰게 해야 한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좋다. 계속 쓰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글과 치열하게 씨름하게 해야 한다. 글에, 온몸에 깃든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는 경험을 하게 해야 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고쳐야 하느냐며 펜을 집어던지는 경험도 필요하다. 그러다가 다시 글을 붙잡고 늘어져서 자신이 보기에도 정말 멋지고, 마음에 든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몇 시간이고 하나에 몰입해 보아야 한다.

혹독한 경험을 해야 한다.  그래야 글이 는다. 시련을 이겨낸 경험이야말로 글을 한 단계 진보시키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다. 때로는 가장 혹독한 매가 가장 훌륭한 칭찬이 되는 것이다.

다음은 김포외고 시험지 유출 문제를 주제로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쓴 글이다. 몇 가지 신문 자료를 주고 중3학생 처지에서 글을 써보라고 했다.

"최근 김포외고 사태로 인해 파장이 일고 있다. 교육청 측에서는 M학원에 재학 중이었던 합격자 59명을 불합격 처리 하겠다고 의사를 밝혔으나 학부모들은 이에 '시험문제의 유출에 대하여 알지 못했고 학원을 다닌 것이 죄냐'고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학부모들의 주장이 맞는 것은 사실이다. 학생들도 그것이 진짜 시험 문제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고, 당일 나온 시험 문제에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 문제와 출제 문제가 비슷했던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한 M 학원 출신의 합격자들의 잘못도 묵과할 수는 없다. 인터넷에 제보한 것도 예상 문제를 받아보고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이었다. 이는 대부분의 M학원 출신 학생들이 이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임을 입증한다. M 학원 출신의 합격자들이 단체로 예상문제와 출제문제가 같았던 사실을 고발했다면 적어도 M 학원 출신의 학생뿐 아니라 모든 학생이 재시험을 치를 수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이 이와 같은 상황에 접하였다면 고발하지 않을 것이고, 아직 완전히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우리 학생들에게 양심에 호소하기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법치주의 국가로써 법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해야 한다. 따라서 합격 취소된 59명의 학생들은 재시험의 기회를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 글이 잘 쓴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평소 같으면 충분히 칭찬 첨삭을 해줄 수도 있는 글이었다. 그리고 적당히 나아갈 방향과 부족한 점을 지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글에서 풍기는 느낌이 너무나 차가웠기 때문이다. 같은 중3 학생 처지에서 어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애정이 사라진 글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다.

더구나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글을 썼다. 다섯 명이 같은 주제로 글을 썼는데, 모두 차가움만 느껴졌다. 동병상련을 느껴야 할 학생들이 쓴 글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가르친 것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지 갑자기 회의가 들기도 했다.

"나는 너희들이 같은 동료들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다는 게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너무나 차갑다. 여기 이 주제를 다룬 다른 신문 기사들을 봐라. 모두 어른이 쓴 거다. 그런데도 따뜻함이 있다. 너희는 도대체 너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어찌 대하고 있는 거냐? 그들 마음을 한 번이라고 생각해 봤니?

너희도 중3으로서 같은 처지에 있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난 너희들 주장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너희들이 보여준 너무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에 분노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 안타깝다. 이건 글이 아니다. 너희들이 같은 동료들에게 휘두른 무자비한 칼날일 뿐이다."

회초리를 드는 마음은 항상 무겁다. 안타깝다. 과연 이렇게 해도 되는지 회의가 들 때도 많다. 그럼에도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들어야 한다.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생각해도 이 방법이 가장 아이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는 확신이 들면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글을 두고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겠다고 결심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아이와 내가 그만큼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는지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아이가 내가 던져준 시련을 충분히 견디면서 글을 붙잡고 씨름할 만한 상황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만약 함께 수업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모두에게 동시에 시련을 주는 것이 좋다. 나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부족하다는 점을 안전핀으로 삼을 수도 있다. 만약 일대일이라면 둘 사이에 맺어진 인간적 신뢰 관계가 충분한 상황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한다.

따끔한 질책으로만 끝낼지, 아니면 글을 붙잡고 치열하게 씨름하게 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정말 애정 어린 시선으로 아이 글을 보면 아이 글에 회초리를 들어야 하는지, 칭찬을 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다.

솔직히 쉽지 않다. 글을 잘못 난도질했다가는 아이가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좌절하거나, 선생님과 관계를 멀리하고, 나아가 글쓰기를 두려워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신중한 고민 끝에 글에 매를 들어야 한다. 혹독하게 매를 대야 한다. 진실로 애정을 지닌 사람만이 매를 들 수 있으며, 진실한 애정으로 대해주는 매는 수백 번의 칭찬보다 훨씬 큰 감동과 성과를 안겨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혹독한 매가 진정한 칭찬이다.
#글쓰기 #칭찬 #첨삭 #논술 #박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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