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대선 패배'로, '국민'을 '당원'으로만 바꾸면?
만리포의 절반 크기도 안되는 모래사장과 날카롭게 깍여진 바윗돌이 바다를 향해 달리고 있는 구름포 해수욕장. 이제 막 기름 때 제거 작업을 시작한 곳이어서인지, 발 내딛기가 무서울 정도로 기름투성이다.
8대의 버스에서 회색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200여명의 당직자들이 일제히 쏟아져내렸다. 재해기구 관리자는 연신 "안쪽으로, 안쪽으로"를 외친다. 지시에 따라 해안 깊숙한 곳까지 이르자, 기름에 푹 절여진 자갈밭이 기다리고 있다.
김효석 원내대표를 비롯해 조배숙, 문병호 의원 등 3, 4명이 "여기에 캠프를 치자"며 대충 자리를 잡자,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어 포즈를 요구했다. 다시 어디에선가 "더 들어가요. 여긴 1차 끝냈어"라는 소리가 들렸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재차 자리를 잡고, 기름투성이 자갈들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돌 부딪히는 소리와 기자들의 셔터 누르는 소리가 한데 뒤엉켰다. 어느 새 나타난 유인태 의원. 카메라는 아랑곳없이 한쪽 편에 등지고 앉자마자 돌부터 집어들었다. 유 의원 옆으로 다가가 돌을 닦으면서 "선거 끝나고 어떻게 지내셨어요?"라고 물었다. 언뜻 돌아볼 뿐 말이 없다. 멀찌감치서 이미경, 김성희 최고위원의 모습도 보인다. 흰색 기름 때 제거용 흡착포가 금새 검게 변해 있었다.
다른 지역을 둘러본 뒤 뒤늦게 도착한 오충일 대표가 상기된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전 국민이 이것들을 모두 집에 하나씩 가져가서 하이타이로 닦아오면 더 빠르지 않겠어? 더 깨끗하고..." 답답한 마음에 나온 대안 아닌 대안인 셈이다.
오 대표가 나타나자, 사진 기자들의 손이 더 바빠졌다. "조금 더 뒤로, 뒤로... 예, 좋습니다." 김효석 원내대표 뒷편에 있던 한 의원이 "난, 가장 검은 돌을 잡아야지" 하며 기자들의 요청에 응한다. "이것을 잘 닦아내야 내년 7월에 국민들이 여기와서 해수욕을 할텐데..." 오 대표의 걱정이다.
사진 촬영도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기름 제거 작업 돌입!
스걱스걱, 싹싹... 한동안 자갈 부딪히는 소리만 들리더니, 누군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천(흡착포)으로 밀기만 하면 안되고, 찍어내야 해." "아~, (화장 할 때) 파우더 바르듯이?"
기자가 기름 때가 덕지덕지 붙은 흡착포를 부대자루에 담으려고 하자, 전병헌 의원이 "잘 접어서 넣어야지, 그래야 많이 담을 것 아닌가"라고 지적한다. 다른 당직자들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오충일 대표는 아직 기자들에게 붙들려 있다.
"이렇게 어려울 때 국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재난을 극복한다는 것은 국민적인 큰 훈련이고... 단순히 재난 극복뿐 아니라 국민의 통합과 단결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 지난번 재난 때 이미 재발 사고의 우려가 있었는데..."
'재난'을 '대선 패배'로, '국민'을 '당원'으로만 바꾸면 영락없이 통합신당 얘기다. 선거 얘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오긴 했지만, 선거에서 패배하고 왔다. 소감이 어떤가?
"선거 때문에 바빠서 너무 늦게 와 죄송하다. 여기서 기름 닦고 있으니까, 마음도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우리 과거도 씻어내고... 기름 뭍은 때를 빼내듯이 몸과 마음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경험이 될 것이다. 다만 조용히 왔다가고 싶었는데..."
선거 얘기가 불편했는지, 다시 기름 때 얘기로 돌아왔다.
"백사장 안쪽에는 모래 반 기름 반이다. 겉으로 보면 다 정리 돼 보이지만, 모래 사이로 켜켜이 된 것을 다 제거하려면 정말 어려운 상황이다."
기름이 보이지 않는 곳에 스며들어가 있는 것처럼, 통합신당도 겉으로는 잠잠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책임론, 차기 지도부 얘기 등으로 당내 세력간 충돌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오 대표에게 다시 당내 문제를 물었다.
"책임론이나 앞으로 총선을 앞두고 지도부 얘기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책임론은 누구를 어쩌자는 것이 아니라 안정해야 하니까, 누구든 책임 질사람은 져야 한다. 제가 책임지고 도망갔는데 붙잡히다시피 해서 왔다... 초선 의원들도 반발했는데, 그런 문제를 가지고 우리가 역정 낼 일은 아니다. 초선 의원들의 간절한 개혁과 발전을 위한 충정에서 나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러면서도 오 대표는 초선 의원들에 대한 아쉬움도 전했다. "다만 그런 일이 있으면 내부에서 먼저 최고위 등에 얘기를 했어야... 그 점에 대해선 조금 유감스럽다."
"후보 중에 정동영 아저씨가 제일 잘생겼죠?"
김효석 원내대표 일행으로부터 50여미터 떨어진 곳에는 김근태.한명숙 의원과 이낙연 대변인 등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윗편으로 연천중학교 3학년 학생 수십명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한 남학생이 김근태 의원을 발견하고는 "와, 나 아는 사람이야. 텔레비젼에서 봤어"라고 소리를 쳤다. 기름 때 제거 작업에 지쳐있던 아이들이 왁자지껄 한 마디씩 하며 몰려들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자갈의 기름을 벗겨내던 김 의원도 활짝 웃으며 학생들을 반겼다. 한 학생이 달려와 악수를 하자, 호기심 어린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급기야 김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들을 가슴에 안아줬고, 옆에 있던 한명숙 의원은 여학생들과 기념 촬영까지 했다.
남학생 두 명은 아예 김근태 의원 옆으로 옮겨서 자리까지 펴고 앉았다. 돌을 닦으며 김 의원에게 한다는 말이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죠? 80%는 되도..."였다. 지나가던 한 여학생이 "꼭 공부 못하는 것들이 그런 얘기해"라고 타박하며 웃음바다가 됐다.
김 의원도 "너희들과 같이 있으니까, 기분은 좋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젊어지시는 것 같죠?"라고 묻는다. 김 의원이 "그래"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럴 때 묻어가는 거에요. 언제 한번 이렇게 애들하고 어울리시겠어요" 한다. 당돌하지만, 밉지 않다. 김 의원이 이낙연 대변인을 돌아보면서 "(학생들의) 말발이 이 의원과 막상막하네"하고 웃는다.
이번엔 한 여학생이 다가와 "정동영 아저씨는 안 왔어요. 우리 아빠가 정동영 아저씨하고 닮았거든요" 한다. 김 의원이 "나중에 (정동영 전 의장에게) 말해줄께"라고 하자, 옆에 있던 남학생이 불쑥 끼어든다.
"(대선) 후보 중에 정동영 아저씨가 제일 잘 생겼죠? 얼굴로 뽑으라면 정동영 아저씨가 뽑혔죠?"
물 때가 다 되자, 선생님을 따라 학생들이 먼저 빠져나갔다. "정동영 후보가 인지도가 낮아서 패한 것은 아닌 게 확실하게 증명됐다"는 기자의 농반진반에 이낙연 대변인은 "몰라서 안 찍으면 차라리 나은데... 알긴 알지만 찍기 싫다는 것 아닌가"라며 안타까워 했다.
선거 얘기가 나와서일까? 한명숙 의원이 기자에게 불쑥 창조한국당 얘기를 물어왔다.
"그 쪽은 어떻게 한대요?"
"총선 준비하겠죠."
"총선 준비를 할 힘은 남았대요?"
"당원들이 가입을 많이 한다던데..."
"거기는 될 집안인 모양이네. 근데 내부에서는 패닉 상태라고 하던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남색 장화를 신었는데, 한명숙 의원은 빨간 장화를 신었다. 금방 검게 변하는 흡착포가 못내 못마땅한지, 자꾸 타올을 찾는다. 한 의원은 이날 기름 때 제거에 쓰려고 집에서 타올을 잔뜩 가져왔는데, 그만 타올 담은 부대자루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김근태 의원이 "아이고, 허리야" 하더니 벌떡 일어나 "야~" 하고 소리를 냅다 질렀다. 1시간 이상 쉬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 기름을 닦았으니 온 몸이 뻐근하기도 하겠지만, 닦아도 닦아도 일한 태가 나지 않는 데 대한 답답함의 외침으로 들렸다. 김 의원은 건강은 좋은데, 시력이 좀 약해졌다고 한다.
김근태 의원 앞으로 기름 때를 벗은 자갈들이 제 빛깔을 내며 수북이 쌓였다. 김 의원이 그 자갈들을 지그시 쳐다보며 "희망의 싹이 여기서 싹트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이낙연 대변인은 휘파람까지 불며 바쁘게 손을 놀렸다. 김근태 의원 앞에 있던 자갈밭이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다. 바닥이 드러날수록 기름덩어리가 뭉쳐 나온다. 짜장면 위에 덮힌 짜장이 연상된다. 이낙연 대변인은 "근태 유전"이라고 이름 붙였다.
물이 해안가 바로 앞까지 들어왔다. 정동채 사무총장이 작업 중단을 지시했다. 작업복을 벗던 김형주 의원은 "사람의 힘으로 다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도 돌아보고..."라고 소감을 말했다. 정봉주 의원은 "마음의 때뿐만 아니라 뇌의 때까지 모두 벗겨냈다"며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그들의 발길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아 보였다. 통합신당에 드리워진 때를 말끔히 벗겨내는 것은 의원들이 아니라 결국 국민의 몫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2007.12.26 22:00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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