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아이의 미국학교 적응기

[영어그림책으로 놀아볼까 9] My name is Yoon

등록 2008.01.08 16:52수정 2008.01.20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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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ame is Yoon ⓒ Frances Foster Books

My name is Yoon ⓒ Frances Foster Books
"내 이름은 Yoon 이에요. 나는 아주아주 먼 나라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첫 페이를 시작하는 그림책.
 

미국 온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을 찾아냈다. 필자의 이름이 크게 써 있는 겉표지를 보고 깜짝 놀라 당장 빌려온 책이다.

 

미국살이를 시작하면서 하나둘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 미국인들에게 'Yoon Joo'라고 열심히 내 이름을 소개하고 다니는데 도대체들 제대로 발음도 못하고 기억도 못하는 것이 정말 화가 나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새삼 미국 이름을 만들자니 영 나같지가 않아 생뚱맞기도 하고….

 

그런데 도서관에서 떡하니 "내 이름은 Yoon이야!"를 발견했으니 그 반가움이 얼마나 컸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1인 시위라도 하는 기분으로 '그럼그럼… 내 이름은 Yoon이지! 아무렴~하하'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대출한 책들 여러 권들 중에도 제일 위에다 이 책을 딱 올려놓고 보란 듯이 도서관을 나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작은 설렘을 안고 시작한 그림책 읽기는 그닥 신통치 않았다.  당시 2살, 5살이었던 우리집 두 딸에게 읽어주는 영어그림책치고는 글밥이 너무 많았던 것. 게다가 미국에 와서 온갖 화려한 디즈니 공주에 맘껏 노출된 상태였으니, 납작하고 동그란 얼굴에 눈은 잔뜩 치켜올라간 여자 아이가 커다랗게 그려진 그림책이 아이들 흥미를 자극할 리 만무였다.

 

아무리 한국인의 전형적인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 해도 내가 보기에도 딱히 와닿지가 않았다. "아니, 좀 심하게 그린 듯한 걸? 중국인이나 일본인 냄새가 더 나는데… 게다가 웬 고양이, 새… 이미지가 한국인하고는 좀처럼 안 어울리잖아…"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시큰둥하니 읽어 치운 기억이 난다.

 

이후에도 두어 번 더 이 책을 빌려다 읽곤 했지만 여전히 뭐 그냥 그런 그림책 중 하나였을 뿐이다. 영어그림책 독서량이 늘어갈수록 닥터수스, 에릭칼, 앤서니 브라운, 에즈라잭키츠, 이브번팅 등등… 아이들이 선호하는 작가와 작품들이 늘어갔고,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마구 늘어가고 있었으므로 여전히 한국소녀 '윤'은 관심밖이었다.

 

미국살이 3년이 한참 지난 어젯밤 아이들이랑 다시 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어제는 좀 달랐다. 첫 장 첫 문장이 새삼스레 왜 이렇게 '쿵' 하는 느낌으로 읽히던지 이상했다. 게다가 정말 신기했던 건, 두  딸 역시 이번엔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눈을 반짝이며 몰입해 있는 게 아닌가. 다 읽고 나서는 둘이 동시에 내뱉은 말, '엄마! 이 책 정말 좋아요!'

 

참 신기하다. 엄마가 몰입해 읽어준 까닭인지, 아님 내 딸들도 그 새 자라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까닭인지, 아님, 그동안 미국생활에 적응해 오며 마음에 쌓여 있던 것들이 오히려 맨처음 미국살이 시작했던 시절보다 '윤'의 이야기를 공감하는데 도움이 된 까닭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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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학교에 가게 될 주인공 소녀 '윤'에게 영어로 이름 쓰는 법을 가르쳐 주는 아빠 ⓒ Frances Foster Books

미국학교에 가게 될 주인공 소녀 '윤'에게 영어로 이름 쓰는 법을 가르쳐 주는 아빠 ⓒ Frances Foster Books

 

"내 이름은 Yoon 이에요. 나는 아주아주 먼 나라 한국에서 왔어요."

 

그리고는 주인공 '윤'을 식탁에 앉혀 놓고 아빠가 한국이름을 영어로 표기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 나온다. 영어로 이름 쓰는 법을 연습해 가면 낯선 미국 학교 적응이 좀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아빠의 바람이었을 터. 그리고 이어지는 소녀의 이야기.


"그런데 나는 아무리 봐도 'Yoon' 같지가 않았어요. 선이며 동그라미들이 전부 다 따로따로 서 있는 느낌이었어요. 한글로 쓴 내 이름 '윤'은 행복해 보여요. 글자들이 같이 춤을 추는 것 같거든요. 그리고 한국말로 썼을 때 내 이름은 '반짝이는 지혜'라는 뜻이에요. 나는 한국어로 된 내 이름이 더 좋아요…."

 

그리고 다음 날 처음으로 학교에 간 '윤'. 선생님이 칠판에 'CAT'이라고 크게 써 놓고 뭐라뭐라 한참 이야기를 해 주신다.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 CAT과 관련된 것 같은 노래를 즐겁게 부르는 미국 아이들 틈에서 자기도 그 예쁜 노래를 따라 부르려고 노력해 가며 앉아 있는다.

 

선생님이 잠시후 빈 종이를 나눠 주시면서 이름을 써 보라 한다. 'YOON'이라고. 그런데 우리의 귀여운 주인공 소녀 '윤'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YOON' 같지가 않다. 그래서 그 종이에 가득 'CAT'을 써 버린다.

 

'CAT'이든 'YOON'이든 이제 막 미국에 온 한국 소녀 입장에선 어차피 선과 곡선으로 된 기호일 뿐, 특별한 의미가 없는 법. 게다가 어쩌면, 반 친구들도 선생님도 모두들 열심히 의미를 부여하며 이야기하고 게다가 노래까지 부르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는 'CAT'이 차라리 'YOON' 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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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주인공과 엄마 ⓒ Frances Foster Books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주인공과 엄마 ⓒ Frances Foster Books

 

집에 돌아간 소녀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창 밖에서 놀고 있는 새를 그린다. 자기처럼 친구도 없고 외로워 보이는 작은 새를…. 그림을 본 아빠는 작은 새 그림 아래 'BIRD'라고 써 준다.

 

다음날 학교에 간 소녀는 또 이름 대신 'BIRD'를 잔뜩 써 버린다. 새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상상을 하면서. 아이에겐 여전히 'BIRD'나 'CAT'이나 'YOON'이나 큰 의미 없는 기호일 뿐.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놀이터에서 만난 미국 여자 아이가 컵케이크를 건네주게 되고 살짝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여전히 'YOON'이 되기는 싫었다. 교실로 돌아온 주인공은 이번엔 종이에 가득 그 미국 소녀가 가르쳐준 'CUPCAKE'를 잔뜩 써 버린다. '내가 차라리 컵케잌이라면 친구들이 모두 나를 보며 박수치고 반가워하고 좋아할텐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엔 종이를 받아든 선생님 얼굴이 활짝 웃는 것처럼 보였고 소녀는 속으로 '어쩌면 이 선생님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생각한다. '다르다는 건 어쩌면 좋은 거일 수도 있어…'라는 생각과 함께.

 

다음날 학교에 간 주인공 '윤'. 이번엔 종이에 한가득 'YOON'을 쓴다.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꼭 안아주며 좋아하고, 마지막에 소녀는 혼자 말한다. 얼굴 가득 눈부신 웃음을 머금고서.

 

"그래요 나는 YOON이에요. 이제 나는 영어로 이름을 쓰지만 그 속뜻은 아직도 '반짝이는 지혜'라는 뜻이에요."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도 내 딸들에게 물었다. 미국 와서 학교에 갔던 첫 날을 기억하느냐고. 하루 종일 학교에서 뭘 했었는지 기억나느냐고. 당시 2살 10개월이었던 작은 아이가 말하길 자기는 매일매일 울었던 기억만 난단다. 엄마랑 있고 싶었는데 어떤 나쁜 선생님이 자꾸 자기를 잡아당겨서 엄마랑 떼어 놓았다고. 그 선생님 진짜 나쁜 선생님이란다.

 

큰아이는 당시 5살 반쯤 되었었는데 교실에서 인형놀이를 혼자 했던 기억도 나고, 수학 시간에 까만 종이에 도형 오려붙이기 했던 기억도 나고, 'Barbie'를 쓰고 있었던 게 생각난단다.

 

바비? 무슨 소린가 했더니, 아직 말도 못알아 들을 때였는데 영어로 글을 써야 하는 저널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걱정하고 있는데 그날 신고간 운동화에 'Barbie'가 써 있더란다. 그래서 그걸 보고 그냥 썼단다. 필기체로 써 있었기 때문에 구불구불 따라 그리는 게 좀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고.


전혀 몰랐다. 그때 그렇게 매일 집으로 들고 오던 종이 뭉치 속에 그려져 있던 'Barbie'라는 어설픈 필기체 글씨에 그런 사연이 있었는지는. 그러고 보니 미국 온 지 2주만에 학교 입학하는 아이에게 바비 운동화를 사주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꼬맹이 둘이 엄마도 몰랐던 그때 이야기들을 재잘재잘 나누고 있는데 나는 옆에서 가슴이 먹먹해서 혼났다.

 

작은 한국 여자아이가 커다랗고 휑한 땅 미국에 와서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이보다 더 아름답고 울림이 있게 그린 그림책은 아직 못 만났다.

덧붙이는 글 * My name is Yoon / by Helen Recorvits, Gabi Swiatkowska / Frances Foster Books / 2003 / p.32 / preK-G3

*쑥쑥닷컴과 제 개인 홈페이지에 함께 올립니다.

내 이름은 윤이에요

헬렌 레코비츠 지음, 박혜수 옮김, 가비 스위앗코스카 그림,
배동바지, 2003


#조기교육 #미국초등학교 #영어그림책 #그림책 #행복한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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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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