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좋은 일' 하고 기분 좋은 하루

날이 추워질수록 주변 둘러보는 여유가 있다면 참 좋겠어요

등록 2008.01.16 18:05수정 2008.01.1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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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차갑고 기온도 무섭도록 뚝 떨어진 수요일이네요. 어제 밤 늦게 상가에 조문을 다녀오느라 오늘 새벽 3시경에야 잠이 들었어요. 예전에 CBS 방송국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기가 갑자기 부친상을 당했기에 찾았던 것인데 과음을 좀 했네요. 홀짝 홀짝. 


벌써 어언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장례식장에 가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서 마음이 착잡해지거든요. 또  오래간만에 방송국 동료들도 만나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두 잔 하다 보니 아침에 못 일어날 정도로 마셨습니다.

오후 접어들면서 부시시 일어나 대충 씻고 집 앞 시장에 나가 해장국 한 그릇 먹고 나서 찬바람을 맞으니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지요. 저녁 찬거리를 장 봐 챙겨 들고 들어오는 길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골목 어귀에 있는 노점에서 어묵 하나를 뽑아서 사 먹는 것도 잊지 않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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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나갈 때 마다, 운동하러 갈 때 마다 들러 하나씩 꼭 사 먹게 되는 오뎅가게입니다. ⓒ 이효연

아, 그런데 두 개째 오뎅을 뽑아 든 순간, 주인 아줌마가 갑자기 잠깐만 가게를 좀 봐 달라지 뭡니까? 건물 3층에 올라가 가게 주인과 할 말이 있다나 뭐라나 하면서요.

그래 그러시라고 하고 무심히 오뎅을 우적우적 먹고 있는데 그때부터 무슨 손님이 그리 밀어닥치는지 정말 황당한 상황이었다니까요?

"아줌마, 붕어빵 2천원어치요."
"컵치킨은 얼마예요?"
"아줌마, 오뎅 국물이랑 같이 포장해서 3천원 어치요."


줄줄이 주문을 하는데 이거 안 팔아줄 수도 없고 팔아줄 수도 없고 대략 난감한 상황이었지요. 제가 안 팔아주면 순식간에 만 원 이상의 매출이 사라지는데 이 추운 날 한 푼이라도 벌려고 밖에 나와 장사하는 오뎅아줌마를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는 없더라구요. 에라 모르겠다 싶어 붕어빵이며 오뎅 할 거 없이 달라는 대로 싸 주고 퍼 주고 장사를 대신 해 주었습니다. 한 만 오천원쯤 되더군요.

삼십분을 그러고 있었는데도 오뎅 아줌마는 주인과 무슨 얘기가 잘 안 되는지 전혀 나타날 기미가 안 보이네요. 하는 수 없이 노점 옷가게를 하는 아줌마에게 돈을 맡기고 돌아서 집으로 향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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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뎅가게 옆에 있는 노점 옷가게입니다.단돈 5천원의 솜바지가 아주 따뜻합니다. ⓒ 이효연

그러고는 집 앞에 다 와서 새로 생긴 퓨전 포장마차에 들러 따끈한 녹두 빈대떡을 두 장 샀지요. 밤에는 술을 팔고 낮에는 부침개를 파는 집인데 이 집 빈대떡이 아주 맛있어요. 무쇠 철판에 즉석에서 구워주는 것이라서 아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주문한 것 외에 빈대떡을 굽는 김에 몇 장 더 구워 두려는 것인지 반죽을 열댓 국자 떠 넣고 막 부치려는 순간, 빈대떡 아주머니 핸드폰이 울리면서 급하게 부동산에서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지요.

이미 반죽은 철판에서 익어가고 있고 아주머니는 급하게 도장을 찾아 부동산에 가야 한다며 잠깐만 좀 지켜서서 빈대떡을 뒤집어 달라고 하니 그 어찌 또 거절을 할 수 있겠어요?
'오늘 무슨 일진이 이러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는 수 없이 뒤지개를 건네 받고 주황색 천막(아래 사진) 안에 들어가 빈대떡을 부칠 수밖에요. 그런데 이 빈대떡 아줌마 역시 함흥차사더군요.

제가 주문한 빈대떡 두 장 외에 열 몇 장을 더 구워내고 중간 중간 오가는 손님에게 예닐곱장 팔아주고 나니 빈대떡 아줌마가 헐레벌떡 돌아와서 고맙다고 하시며 한 장을 서비스로 주시네요. 그렇게 '남의 장사' 해 주고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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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술을 팔고 낮에는 부침개를 파는 퓨전 포장마차입니다.(검정간판 노란글씨) ⓒ 이효연

오후가 그렇게 갔습니다.  공연히 실속도 못 차리고 추운 곳에서 팔자에 없는 오뎅 장사, 빈대떡 장사 하면서 시간만 버렸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말 그대로 '남 좋은 일'을 하고 와서 그런지 몸은 얼었지만 마음은 훈훈하네요. 그리고 덕분에 빈대떡 한 장도 공짜로 얻어왔고요.

두 가게에서 삼십여 분씩 가게를 지키며 거의 한 시간 정도 밖에서 장사를 하다보니 발도 시렵고 귀도 떨어질 것 같고 비록 불이 옆에 있다고 해도 참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러고보니 따뜻한 사무실에서 일 하는 사무직 근로자들과 달리 건설현장이라든지 노점에서 장사를 하는 분들은 오늘같이  매서운 칼바람 겨울 날씨가 참 원망스럽겠구나 싶었습니다.

저마다 먹고 사느라 바쁘고 힘든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주변을 돌아볼 여유 없이 내 생각만 하고 앞만 바라보고 살아들 가지요.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이렇게 우연한 체험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나니 '나보다 더 힘들게 고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도 참 많다' 는 생각에 반성하는 마음과 더불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네요.

내일은 날씨가 좀 풀려 포근한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효연의 요리를 들려주는 여자' http://blog.empas.com/happymc/


덧붙이는 글 '이효연의 요리를 들려주는 여자' http://blog.empas.com/happymc/
#노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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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방송에 홀릭했던 공중파 아나운서. 지금은 클래식 콘서트가 있는 와인 바 주인. 작은 실내악 콘서트, 와인 클래스, 소셜 다이닝 등 일 만드는 재미로 살고 있어요. 직접 만든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고 피아노와 베이스 듀오 연주를 하며 고객과 공감과 소통의 시간을 가질 때의 행복이 정말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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