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글에 귀를 기울이자

[칭찬첨삭원리⑩] 생각을 읽어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칭찬이다

등록 2008.01.25 18:08수정 2008.01.25 18:52
0
원고료로 응원

토론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자꾸 딴짓을 했다. 토론에 집중하라고 몇 번이나 신호를 주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들지 않았는데도 상대편 토론자에게 반론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못 들었어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들은 게 아니라, 안 들은 거겠지."

 

그 아이는 그 후에 진행된 토론에서는 상대편 말을 귀담아 듣더니 손을 들고 자기 의견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다음 시간에는 또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논술에서 가장 가르치기 힘든 건 토론도, 글쓰기도 아니고 듣기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상대편 의견에 귀 기울이는 습관이 제대로 들어 있지 않아서 예의 바르게 듣는 태도를 가르치는 게 너무나 힘들다. 항상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상대편이 말하는 것에 집중하라고 해도 쉽지가 않다.

 

그런데 잘 듣는다는 것은 그냥 상대편 말을 두 귀로 얌전히 듣는 것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나는 온전히 함께하는 시간이 있다고 믿네. 그것은 함께 있는 사람과 정말로 ‘함께’ 있는 것을 뜻해.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땐, 난 계속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만 신경을 쓰려고 애쓰네. 지난 주에 나눴던 이야기는 생각하지 않아. 이번 금요일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아. 코펠과 인터뷰를 할 일도 생각하지 않고. 혹은 먹어야 하는 약 생각도 안 해. 나는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오직 자네 생각만 하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미치 앨봄 / 세종서적)중에서

 

듣기란 바로 지금 이 순간 상대에게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온 몸과 정신을 말하는 사람에게 쏟는 것이다. 상대편이 지닌 생각과 느낌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의 듣기 능력에 도달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논술 수업에 보내며 '조금이라도 말을 많이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말은 쉽게 열린다. 아주 빠르게 논리력이 길러진다. 하지만 듣기 능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지루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아주 조금 나아질 뿐이다. 듣기란 그만큼 어렵다.

 

아이들만 듣기가 어려운 건 아니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발견한 '듣기의 힘'

 

아내와 말을 하다 보면 조금 짜증날 경우가 많다. 이런저런 푸념과 불만을 늘어놓는 걸 듣다 보면 종종 답답해진다. 올바른 결론이 무엇인지는 훤히 보이는 데도 계속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으니 지루하고 짜증난다. 그래서 이러 저렇게 하라고 말해주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면  푸념과 불만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해진다.

 

불만이 나를 향해 있으면 감당하기가 더욱 어렵다. 이해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물으면 아내는 더욱 화를 내고, 문제는 더욱 꼬인다. 아내는 자신이 느낀 불만을 차분히 들어주기를 원한다. 자기 말을 듣는 남편이 자신이 느낀 안타까움과 화에 공감해주기를 원한다. 그런데 남편은 그게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중심이다. 그러니 부딪칠 수밖에 없다.

 

내 경우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듣는 것이다. 아내가 쏟아내는 불만을 그저 듣기만 하면 되었다. '넌 떠들어라 난 듣는다' 식이 아니라, 아내가 느끼는 감정을 같이 공감해주면서 들어주었다. 그렇게 했더니 문제는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남편이 아내를 도와주려다가 실수로 유리잔을 깨뜨렸다고 해 보자.

 

첫 번째 반응, 야단을 친다.

"당신은 왜 그렇게 부주의해? 도와주려면 제대로 도와줘야지. 유리잔을 그렇게 조심성 없게 다루면 어떻게 해?"

듣는 사람 기분은? 다시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반응,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유리잔을 들 때는 조심해서 들어야 해. 유리잔은 깨지기 쉽잖아?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룰 때는 항상 주의를 해야 해? 알겠어?"

듣는 사람 기분은? 자신도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내에게 화가 날 것이고, 아내의 잔소리가 귀찮을 것이다. 당연히 기분이 나쁘다.

 

세 번째 반응, 남편의 마음 속에 있는 소리를 들어준다.

"어휴 어떻게! 다치지 않았어? 떨어뜨려서 놀라고 속상하겠다."

남편 기분이 어떨까? 유리잔이 아니라 자신을 걱정해 주는 아내가 정말 사랑스러울 것이다. 자기 마음을 이해해주고 자기 내면에서 울리는 놀라움과 속상함에 귀를 기울여 주어서 너무나 고마울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도울 때는 정말 주의해서 잘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이들을 생각해 보자. 아이가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하는가? 위의 세 가지 중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거의 대부분 첫 번째, 두 번째 반응이다. 아이의 느낌은? 당연히 기분이 나쁘다. 야단이나 잔소리를 듣기 싫은 건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세 번째 반응이다. 마음을 그대로 읽어주는 것이다. 아이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다.

 

몇 년 전 추석 때 겪은 일이다. 추석임에도 고생하며 마늘을 심고 있었다. 효원이는 사촌과 함께 밭을 뛰어다니며 열심히 놀았다. 그런데 3~4시간을 놀다보니 지쳤나 보다. 자꾸 집에 가자고 했다. 그러다 마늘을 심고 있는 엄마에게 가서 보챘다.

 

"엄마, 빨리 집에 가자."

"그래~ 효원이가 힘들구나!"

"응. 너무 힘들어!"

"맞아. 힘들겠다. 효원이가 지금까지 일 방해 안 하고 논 것만 해도 엄마는 대단하다고 생각해."

"……!"

"그런데 엄마는 일을 마저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알았어, 엄마! 내가 더 기다릴게."

 

아이는 언제 보챘느냐는 듯 다시 신나게 놀았다. 아이는 엄마가 그저 자기의 불만을 들어주고, 자기가 지금까지 했던 행동을 충분히 가치 있게 여겨주자 그걸로 만족한 것이다.

 

만약 엄마가 야단을 치거나, 잔소리를 내리거나, 훈계를 했다면 어떻게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엄마, 빨리 집에 가자."

"일 더해야 해."

"빨리 가자! 응~~"

"일 더해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빨리 가자니까. 나 힘들어."

"어휴, 왜 이렇게 짜증이 심하니?"

  

아이 글에 귀를 기울이자

 

아이가 글을 썼다.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 열심히 첨삭해주는 것? 아니다. 열심히 평가해주는 것? 아니다. 그렇다면 잘썼다고 칭찬해주는 걸까? 그것도 아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하고 가장 중요한 일은 그냥 읽는 것이다. 온몸과 정신을 집중해서 아이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않고 읽는 것이다. 무언가 가르치겠다는 생각, 논제를 이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문장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 관찰하는 시각, 논리력이나 구성력이 어떤지 하는 생각, 이 모든 생각을 버리고 그저 읽어야 한다. 그저 읽으며 아이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아이는 이 글을 통해 어떤 생각을 내보이고 싶었을까? 아이 속에 감추어진 느낌은 무엇일까? 아이가 혹시 내 소리에 귀 기울여 주세요 하고 요청하는 것은 없는가?


꼬마 모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였다. 그게 무슨 특별한 재주람. 남의 말을 듣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도 많으리라. 하지만 그 생각은 틀린 것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더욱이 모모만큼 남의 말을 잘 들어 줄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다. - <모모>(미하엘엔데 / 비룡소) 중에서

 

모리 선생님이 한 것처럼 신경을 한 곳에 집중해야 한다. 모모가 한 것처럼 세상 그 누구보다 잘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된다. 자기 생각을 알아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칭찬은 이미 충분하다. 그 생각을 판단할 필요도 없다. 안타까운 마음, 정성스런 마음, 주장의 근거를 그저 그렇구나 하고 읽어주면 된다.

 

빨간 펜은 전혀 필요 없다. 그저 아이 생각에 온 정신과 혼을 기울이면 된다. 한 편의 글에는  아이 속에 감춰진 생각의 조각이 담겨 있다. 그 생각의 조각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이 충분히 칭찬을 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주셨다.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며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셨다. 그 때마다 난 내 얘기들이 정말 중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 <생각을 부르는 이야기1> (문학동네)중에서


자기 자녀가 쓴 글에서 아름다고 소중한 생각이 엿보이는가? 자기가 지도하는 학생의 글에서 멋지고 귀중한 생각이 엿보이는가? 그렇다면 그걸 들어주라. 잘 들었다고 표현해 주라. 그러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2008.01.25 18:08 ⓒ 2008 OhmyNews
#글쓰기 #칭찬 #첨삭 #논술 #박기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군산 갯벌에서 '국외 반출 금지' 식물 발견... 탄성이 나왔다
  2. 2 20년만에 포옹한 부하 해병 "박정훈 대령, 부당한 지시 없던 상관"
  3. 3 남자의 3분의1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고?
  4. 4 광주 찾는 합천 사람들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 행사해달라"
  5. 5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두려움에 떨고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