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자극하고 기다려 주자

[나의 논술 이야기1] 현명한 아이들

등록 2008.01.29 15:02수정 2008.01.29 17:03
0
원고료로 응원

친구네 가족과 복날을 맞아 삼계탕을 먹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들깨 넣은 삼계탕이라 정말 기대에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친구네 둘째 아이가 갑자기 아빠에게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아빠에게 사과를 하라면서 막무가내로 투정을 부렸다.

 

"빨리, 미안해 해!"
"그래 알았어. 미안해."
"아니 그렇게 말고 천천히! 엉엉."
"미~~ 안~~ 해~~!"
"너무 느려!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이야. 엉엉."
"미~ 안~ 해!"
"그것도 아니야. 엉엉."

 

정말 대책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아빠는 버럭 화를 냈고, 아이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나중에 엄마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달래서야 울음이 그쳤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그 아이의 말과 행동은 정말 비합리적이다. 아무리 아이 말에 맞춰줘도 아이는 받아들이지 않고 토라지기만 한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토라진 아이에게 합리적인 접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친구네 아이도 엄마가 꼭 껴안고 울음을 충분히 받아준 후에야 진정이 되었다. 

 

좋고 싦음에서 옳고 그름으로

 

어린 아이들은 세상을 옳고 그름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기준은 철저히 좋고 싫음이다. 아이들은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다. 물론 옳고 그름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지만 기본은 좋고 싫음이다. 부모가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명해도 아이들은 합리적인 기준이 아니라 감정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공부도, 생활 지도도 모두 아이들이 좋은 느낌을 지니게 하는데 맞춰야 한다. 일예로 덧셈과 뺄셈을 가르친다면서 질리도록 많은 문제를 풀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기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러한 학습법은 아주 나쁜 방법인 셈이다. 이 시기에는 수와 셈이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3~4학년 시기가 되면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긴다. 3~4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옳고 그름을 행동의 준거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싫더라도 옳다고 생각하면 선택하기도 한다. 합리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을 서서히 형성한다.

 

논술은 논리적 타당성을 따진다. 따라서 3~4학년의 사고 방식의 변화와 가장 잘 부합하는 수업이 논술이다. 논술 수업을 통해서 이 시기의 많은 아이들이 빠르게 변하는데, 이는 아이의 변화 발전 단계에 논술이 효과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현명하다

 

<야곱, 너는 특별해>(문학과지성사)를 읽고 4학년 학생들과 수업할 때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야곱은 알바트로스다. 알바트로스는 타조 다음으로 몸짓이 큰데 날 수 있는 새 중에서는 가장 크다. 두 날개를 펴면 날개 길이가 3m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게 크다 보니 나는 것이 아주 어렵고 중요한 과제다. 자연 속의 알바트로스는 날지 못하면 생존하지 못한다.

 

주인공인 야곱은 날지 못하는 알바트로스다. 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알바트로스 사회에서는 ‘날지 못하는 알바트로스는 알바트로스가 아니다’ 따라서 날지 못하는 야곱은 알바트로스 사회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다.


아이들과 함께 알바트로스에 대한 정의를 본떠 다른 대상을 정의내리기로 했다. 대상은 강아지였는데 대부분 ‘짖지 못하는 강아지는 강아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여러 이유로 짖지 못하는 강아지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하자,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지 못하는 강아지는 강이지가 아니다’, ‘주인에게 충성하지 못하는 강아지는 강아지가 아니다’라고 새롭게 정의를 내렸다.

 

그러나 그러한 규정도 역시 예외적 상황이 존재하므로 논리적으로 완벽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모든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며 고민한 끝에 내놓은 정의는 ‘털이 없는 강아지는 강아지가 아니다’였다. 이 규정은 예외가 없어서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털이 있는 것이 강아지만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규정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정도 상황이 되면 아이들은 머리에 쥐가 나고 괴로워한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의 지적을 피해서 완벽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 상황에서 부모들은 흔히 아이가 완벽한 규정을 내리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논리 체계를 점검하고, 예외 없는 완벽한 정의를 찾아내려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의 머리가 깨어나고 사고력이 향상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수업을 하다보면 가끔 아이들의 놀라운 사고력에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알바트로스에 대한 정의를 사람에게 확장해서 해보도록 할 때였다.

 

"웃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위 정의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쓴 것이다. 정말 놀라운 정의다. 아래 글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기쁨은 삶에 대한 자발적 긍정이다.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똑똑하고, 아름답고, 건강하고, 부유하고, 권력이 있고, 성스럽다 할지라도 가엾은 사람이다.”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윤리학>(웅진)

 

유명한 철학교수이자 저술가인 ‘페르난도 사바테르’와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삶의 본질에 대해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표현형식만 달랐을 뿐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철학교수 수준의 인식능력을 보인 셈이다. 초등학생의 표현이 이해하기도 쉽고 잘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더 뛰어나다고 할 정도다.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자 코가 길어지고 때맞춰 요정이 나타난다. 요정은 세상에는 두 가지 거짓말이 있는데 하나는 코가 길어지는 거짓말이고, 하나는 다리가 짧아지는 거짓말이라고 한다. 피노키오 코가 길어진 이유는 코가 길어지는 거짓말을 한 탓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세상의 거짓말을 둘로 나누고 무엇이 코가 길어지는 거짓말이고, 무엇이 다리가 짧아지는 거짓말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하였다. 다음은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제시한 답변이다.

 

“거짓말은 나를 속이는 거짓말과 남을 속이는 거짓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를 속이는 거짓말은 다리가 짧아지는 거짓말이고, 남을 속이는 거짓말은 코가 길어지는 거짓말입니다. 나를 속이는 거짓말이 다리가 짧아지는 거짓말인 이유는 나를 속이는 거짓말을 하면 자신이 자꾸 작아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코가 길어지는 거짓말은 남을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번 부모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해보라고 했지만, 이보다 더 뛰어난 답변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처럼 아이들은 생각을 자극하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어른들이 할 일은 아이들이 사고하고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일 뿐이다. 대부분의 초등학생은 생각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사고를 자극하면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어른이 할 일은 자극을 주고 차분히 기다려주는 것뿐이다.

2008.01.29 15:02 ⓒ 2008 OhmyNews
#논술 #박기복 #칭찬 #첨삭 #글쓰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군산 갯벌에서 '국외 반출 금지' 식물 발견... 탄성이 나왔다
  2. 2 20년만에 포옹한 부하 해병 "박정훈 대령, 부당한 지시 없던 상관"
  3. 3 남자의 3분의1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고?
  4. 4 광주 찾는 합천 사람들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 행사해달라"
  5. 5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두려움에 떨고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