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하는 건 빗자루만 알지"

[현장] 공공노조 연세대 분회 출범식

등록 2008.01.29 13:09수정 2008.01.2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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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나누어 드리는 '살맛' 학생들 연세대 분회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함께 해온 학생모임 '살맛' 학생들이 새벽 시장에서 사온 장미꽃을 조합원 분들에게 나눠드리고 있다. ⓒ 김승섭

▲ 꽃을 나누어 드리는 '살맛' 학생들 연세대 분회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함께 해온 학생모임 '살맛' 학생들이 새벽 시장에서 사온 장미꽃을 조합원 분들에게 나눠드리고 있다. ⓒ 김승섭

 

학생회관을 올라가고 있었다. 3층 언저리에서, 붉은 누비옷을 입으신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가 보였다. 느릿느릿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시는데, 왠지 앞지르기가 미안해 천천히 뒤에서 걸었다.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실 때마다 무릎에 손을 짚어가며 움직이셨다. 뒤에서 보고 있는데도 아주머니의 표정이 느껴졌다. 관절과 관절이 부딪치는 보이지 않는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데, 붉은 누비옷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지난 26일은 연세대 공공노조가 출범하는 날이라고 했다. 후배 녀석이 시간이 있으면 와보라고 말을 해, 졸업한 지 3년 만에 찾는 학생회관이었다. 날이 추웠다. 학교를 걸어가며 내내 생각했다.

 

사람들은  지난 10년간 복지와 분배에 치중했기 때문에 이제는 경쟁력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던데, 근무시간이 끝나고 일을 더 하면 그에 해당하는 수당을 달라고 주장하는 60살의 아주머니에게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말하는 세상은 무엇일까.

 

무릎이 그토록 아파도 산재보험으로 치료받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분들이 바로 이 곳에서, 옷을 겹겹이 껴입은 채 하루종일 일하는 우리에게 나라에서 법으로 정한 최저임금은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외쳐야 하는 세상은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 일하는 건 빗자루만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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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는 연세대 분회 사람들 고경실 부분회장님(왼쪽)과 김경순 분회장님이 출범식에 온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김승섭

▲ 인사하는 연세대 분회 사람들 고경실 부분회장님(왼쪽)과 김경순 분회장님이 출범식에 온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김승섭

"하지만 우리에게는 연대와 단결이라는 무기가 있다"고 큰 소리로 글을 읽어가던 김경순 연세대 분회 분회장님이 잠시 멈칫 하셨다. 그리곤 안경을 만지신다. 어… 잘 안 보이네. 그 동안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애쓰셨던 기억이 떠오르셨던 것일까.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가슴 속에 묻어두셨을지. 속으로 "분회장님 파이팅"을 외쳤다.

 

'우리 일하는 건 빗자루만 알지.' 학생시절, 매일 수업을 들을 때면 깨끗이 치워져 있던 강의실을 보면서도 누가 강의실을 청소했을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늦가을 낙엽이 수북이 쌓인 교정을 거닐 때도, 그 낙엽들을 누군가는 치워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 아. 지금 일하는 사무실에서 쓰레기통이 아침마다 깨끗이 비워져 있는 것도 그런 것이었을텐데.
 
한달 540시간을 근무하고 63만원을 받는 경비 노동자들을 대표해서 나오셨던 고경실 부분회장님은 주최 측에서 준비한 글이 아니라, 손수 준비한 다른 글을 읽으셨다. 출범식에 와준 사람들을 한명 한명 언급하며 일일이 고맙다는 말씀을 했다.

 

공공노조 소속의 사회자는 부분회장님이 마이크를 잡기 직전까지 계속 원고를 수정하셨다며 박수를 보내달라고 했다. 공공노조 연세대 분회 노동조합은 청소·경비직 노동자들로 이루어졌지만 경비직 아저씨들은 토요일에도 일을 하셔야 되기 때문에 자리에 많이 못 오셨다고 한다.
 
평소 학생들이 연극을 공연하는 장소로 사용하는 무악극장에 청소직 아주머니들께서 두 줄로 앉으셨다. 아주머니들은 앞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마치 수업듣는 학생 마냥   열심히 귀 기울이셨다. 평소 누군가가 차지했던 자리를 청소하고 정리하던 일을 하시던 분들이 남이 아닌 본인을 위한 행사로 그 자리에 계시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시작부터 함께 도왔던, 후배가 속한 '살맛'이라는 단체의 학생들은 행사의 마지막에 출범식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새벽시장에서 사온 장미꽃을 나누어 드렸다.

 

붉은 장미꽃을 받은 붉은 누비옷의 아주머니가 생각나고 그 분이 다시 내려가야 할 학생회관의 가파른 계단이 떠올랐다. 모이실 때는 따로 따로 오셨지만, 내려가시는 길은 조합원 동지들과 함께 하는 길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노동조합이 생겼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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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노조 연세대 분회 출범식에 모인 사람들 노동조합 출범식에 모인 사람들이 '비정규직 철폐가'를 함께 부르고 있다. ⓒ 김승섭

▲ 공공노조 연세대 분회 출범식에 모인 사람들 노동조합 출범식에 모인 사람들이 '비정규직 철폐가'를 함께 부르고 있다. ⓒ 김승섭
2008.01.29 13:09 ⓒ 2008 OhmyNews
#노동조합 #공공노조 #연세대분회 #청소 #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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