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길 때

[책이름 되짚기 4] ‘고숙의 인’이란 무슨 소리?

등록 2008.01.31 16:03수정 2008.01.3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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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가제로 부르고 있는 <고숙의 인>은 <孤宿の人>이라는 원제를 한자음 그대로 옮긴 것이라, 도당췌 무슨 소린지 감이 잘 안 잡히셨을텐데요, 단순하게 풀어 보자면 “고독한 숙명을 지닌 사람”이라는 뜻으로 ..  〈어느 출판사 인터넷방에 올라온 글)

 

 어느 출판사 인터넷방에 올라온 글에서 한 대목을 옮깁니다. 일본책 하나를 우리 말로 옮기면서 책이름을 ‘고숙의 인’으로 붙였다고 합니다. 종이로 찍힌 책에 붙인 이름으로까지는 아니고 ‘임시이름(가제)’이라고 합니다.

 

 ┌ 孤宿の人

 └ 고숙의 인

 

 ‘孤宿の人’은 ‘고숙의 인’으로 옮겨적는다고 해서 우리 말이 될 수 없습니다. 한글로 ‘고숙의 인’도 일본말입니다. ‘I love you’를 ‘아이 러브 유(알 러 뷰)’로 옮겨적는다고 해서 우리 말이 될 수 없어요. 미국말일 뿐입니다.

 

 출판사에서 임시이름으로 쓴다고 할 때에는 ‘고숙의 인’뿐 아니라 ‘고숙노인’으로 쓴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거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출판사에서만 쓰는 이름이니까요. 다만, 임시이름이든 종이책에 짠하고 붙이는 이름이든, 여느 때에 쓰는 말버릇과 글버릇이 우리 둘레에 두루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종이로 찍히는 책에서는 알뜰하고 살갑고 푸근한 이름이 붙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종이책 이름 둘레에 쓰이는 온갖 다른 말은 어떠할까요. 일본말을 ‘나라밖 말’이라고 또렷하게 느끼면서 ‘우리 말로 옮겨서 써야지’ 하고 생각을 못하는 버릇이나 매무새는 어떻게 되나요.

 

 출판사 분은 ‘孤宿の人’을 “고독한 숙명을 지닌 사람”쯤 된다고 풀이합니다. 그렇지만 ‘숙명을 지닌’ 사람이란 없어요. ‘숙명이 (어떠한)’ 사람이 있습니다. 말이 그래요. ‘이상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성격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孤宿の人’ 풀이를 올바르게 달자면, “숙명이 고독한 사람”이거나 “타고나길 외로운 사람”입니다. “외롭게 타고난 사람”이라고 적어도 되겠지요. “외로움을 타고난 사람”으로 적어도 좋고요.

 

 ┌ 외로움을 타고난 사람

 ├ 외롭게 사는 사람

 ├ 외로운 사람

 ├ 타고난 외톨박이

 └ …

 

 “외로운 사람”을 일본사람이 일본말로 옮겨적는다면 어떻게 쓸까요. “외롭게 사는 사람”을 일본사람이 일본말로 옮겨적는다면? “외로움을 타고난 사람”을 일본사람이 일본말로 옮겨적는다면? “타고난 외톨박이”를 일본사람이 일본말로 옮겨적는다면? 가끔, 거꾸로 헤아리노라면 한결 나은 말길, 말문, 말구멍을 틀 수 있습니다.

2008.01.31 16:03 ⓒ 2008 OhmyNews
#책이름 #우리말 #우리 말 #일본말 #일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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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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