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껏 사는 선비에게도 처세술은 필요했다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을 읽고

등록 2008.02.26 10:51수정 2008.02.2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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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 겉그림 ⓒ 눌와

선비라고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그림이 있다. 가난하지만 정직을 팔아 구걸하지 않는 사람, 옳은 일이 아니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거부하는 사람, 잠깐 누릴 영광보다는 오래 남을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 선비라면 적어도 이 정도 인상은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보통 ‘선비’에게서 받는 느낌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이른바 선비에게는 ‘곧 죽어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말처럼 무언가 한 가지를 올곧게 지키고 전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따라붙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조선역사가 남긴 역사 중에서 ‘선비’는 이렇게 그런 대로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조선 내부를 튼튼히 지켜낸 숨은 공로자로 평가받는 ‘선비’도 각종 정치적 암투를 겪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생활 속 진리를 겪으며 살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들도 배운 것과 사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겪었으며 그런 현실에 대해 고민하고 나름대로 대처했다.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독야청청(獨也靑靑) 할 것 같은 선비가 추구한 정신적 유산과 현실적 문제 사이를 파고들었다고 보면 딱 좋겠다. 비린 냄새도 곁들인 귀한 책상머리, 지금 그곳을 막 비집고 들어가 볼 참이다.

소신과 처신은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볼 수 없다

이 책 정철 편에 보면 연암 박지원이 선비가 어떤 계층인지를 설명한 것이 있다. 박지원은 “양반이란 사족들을 존칭 하여 부르는 말이다”며 그 당시 선비 계층을 높여 부르던 말이 바로 ‘양반’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선비’란 말과 달리 ‘양반’은 지금 우리 시대에 별로 달갑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양반’이 곧 ‘선비’라고 하니 새삼스레 어안이 벙벙하다. 또한, 박지원은 선비란 자들이 어떻게 사는 이들인지를 설명하는데, 그 설명을 듣자니 그동안 선비에게서 느껴 온 감정이 괜히 울렁인다.


“선비란 무엇인가? 박지원은 <양반전兩班傳>에서 '선비란 바로 농사일도 아니 하고 장사도 아니 하면서 그런대로 문장과 역사를 섭렵하여(不耕不商 粗涉文史) 크게는 문과, 작게는 생원, 진사 등 양반으로서의 나갈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을 말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당대 사회에서 가장 높은 신분에 있던 그룹이며, 또 그럼으로써 이들대로 독특한 자존심이 있기도 하였다.” (이 책, 93쪽)

그 ‘독특한 자존심’이라는 게 만일 서민과는 결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계급적 우월의식이라면 참 몹쓸 생각일 뿐이다. 다만 그 ‘독특한 자존심’을 바탕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쓴소리’ 한두 번쯤은 할 줄 알았다면 되레 눈여겨 볼 일이다. 게다가 꼭 눈에 띄는 유별난 실천지식인은 아니더라도 올곧은 태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지식인으로서는 썩 보아줄 만하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또 당장 먹고살 방법을 찾자면 선비도 이른바 처세술 한두 개쯤은 필요할 게다. 그러고 보니, <선비, 소신과 처세의 삶>이라는 제목에서부터 그 같은 냄새가 배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게 그들이 본래 지녀야 할 밑천은 아니었다. 도리어 일일이 시대 흐름을 거꾸로 가는 습관을 지녀서라도,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살지 않으려 했던 이들이 우리가 아는 ‘선비’였다. 첨단 중에서도 첨단을 걷는 시대에 살면서도, 지금 이 시대에서도 가끔이나마 ‘선비’라는 말을 입에 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따르면, 유학적 가치관에 입각한 선비의 바람직한 기능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이 되는 것이라 한다. 즉 수기(修己)·치인(治人)·입언(立言)의 세 가지 항목이다. 선비란 것이 원래 생산에 종사하는 것이 아닌, 즉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룹’인 만큼 우선 그 자질을 길러야 하는 것이요(수기), 다음은 그것을 토대로 포부와 이상을 마음껏 발휘해야 하고(치인), 또 그 이상을 펴볼 만한 조건이 돼 있지 않을 경우에는 조용히 물러나 자손만대에 교훈을 남겨 놔야 한다는(입언) 것이다.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했던가 하는 문제는 있지만, 대체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생은 이 세 가지 사업으로 집약이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 책, 63쪽)

이 책이 담은 조선 선비 16인

김시습   기행 속의 의지인
이장곤   인내의 도피자
이준경   사화 피한 보신의 명수
조   식   절개로 지킨 선비의 도
정   철   고집 속의 풍류인
노   인   임기응변의 탈출기
이   확   육전칠기의 오뚝이
허   목   소신으로 살린 큰 그릇
윤   증   정승 판서 마다한 백의정승
김만중   달관으로 이긴 당화
김창협   벙어리 처신의 세도가
이인좌   시대의 모순에 저항한 남인
이광사   글씨로 달랜 세월
정약용   소극성으로 감춘 대의
김정희   선과 예술의 생애
흥선군   천하 대권 기다린 야심

<선비, 소신과 처세의 삶>은 조선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태어나고 죽은 연대 순으로 16인을 다루고 있다. 얼핏 말했듯이, 이 책에 나타나는 선비는 그리 한가롭지도 마냥 존경스럽지도 않다. 차라리 책 이름을 ‘조선 선비의 처세술’ 정도로 하는 게 더 알맞지 않나 싶을 만큼 비린 이야기도 많다.

극심한 세도정치에 시달린 조선 말기에 목숨을 부지하고자 반(半) 미치광이 행세도 마다 않던 이 중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런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하여튼 이 책은 차라리 한국식 처세술을 다루었다 할 만큼 책 냄새 잔뜩 풍기는 전통적인 선비 상(象)을 살짝 살짝 비켜 간다.

선비로서 지켜야 할 수없이 많은 자잘한 ‘에티켓’이라는 ‘사소절(士小節)’도, 그것을 한 마디로 설명한 말이라는 ‘공경 경(敬)’도 당장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찾을 때에는 일단 관심밖이다. 선비에게도 그것은 예외일 수 없다.

이러한 평범하고도 오랜 생활 속 진리를 이 책에서 수없이 듣고 보자니 ‘선비’를 보는 마음이 여간 울렁이는 게 아니다. 다만, 선비들이 늘 입에 달고 살았을 그 정신만큼은 언제든 우리 입에도 담을 만하다. 이른바 선비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유교 정신의 핵심, 달리 말해 인생목표 말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말을 빌면,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다단하다 해도, 결국 돌아가는 곳은 ‘수기치인(修己治人)’ 넉 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수기’와 ‘치인’, 곧 나를 닦고, 남을 다스린다는 것이 이 사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기는 곧 치인을 전제로 한 탁마(琢磨) 내지 수련이요, 치인은 또 수기를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기능적 측면이다.” (이 책, 79쪽)

이 책에서 우리는 김시습, 정철, 정약용, 흥선대원군과 같은 익숙한 이름 말고도 조금 낯선 많은 이들이 양반입네 선비입네 하면서 한편으론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어떤 때는 차라리 ‘무대’ 자체를 버리고 (잠시나마) 초야에 묻히기도 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볼 수 있다.

간판으로 내건 16인을 중심으로 그 앞을 스쳐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말하자면,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서민 이야기도 틈틈이 볼 수 있다. 어찌보면, 정사(正史)보다는 야사(野史)를 본다고나 할까, 고상한 선비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썩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다.

실없는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지은이를 탓해야 할지 책을 읽은 나를 탓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선비'라는 두 글자를 보기가 영 부담스럽다는 점이다. 조선 선비들이 보여준 처세술을 차마 담지 못한 이유는, 그래서 선비 정신 몇 가지만 쓱 내민 이유는 그들 삶에서 역겨운 내가 나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 삶에 담긴 그 처세술이란 것들이 소신인지 처신이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구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솔직히 다시 읽어야 할 판이다.

덧붙이는 글 |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 정광호 지음. 눌와, 2003.

이 책 글들은 지은이가 오랜 전 <월간중앙>에 연재했던 글이며, 이를 다시 1980년 새밭에서 나온 <조선왕조 선비평전>으로 엮었는데, 이 책을 수정보완한 책이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이다. <조선왕조 선비평전>에서 정북창(鄭北窓), 장승업(張承業), 박한영(朴漢永)을 제외한 16인을 생몰연대 순으로 담았다.


덧붙이는 글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 정광호 지음. 눌와, 2003.

이 책 글들은 지은이가 오랜 전 <월간중앙>에 연재했던 글이며, 이를 다시 1980년 새밭에서 나온 <조선왕조 선비평전>으로 엮었는데, 이 책을 수정보완한 책이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이다. <조선왕조 선비평전>에서 정북창(鄭北窓), 장승업(張承業), 박한영(朴漢永)을 제외한 16인을 생몰연대 순으로 담았다.

선비, 소신과 처신의 삶

정광호 지음,
눌와, 2003


#선비 #처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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