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하라

[역사소설 소현세자 12] 진취적인 정치사상서에 충격 받다

등록 2008.03.04 13:35수정 2008.03.0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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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 인조3년(1625)에 지은 벽제관은 주춧돌만 남아있고 잡초만 무성하다. ⓒ 이정근


청나라 군대가 철수하는 의주대로의 벽제 길은 사람들로 미어졌다.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지어 철군하는 청나라 군졸들, 두 손이 묶인 채 정처 없이 끌려가는 포로들, 청나라 사람들이 정말 붉은 돼지처럼 생겼나? 호기심이 발동하여 구경나온 사람들. 포로 무리에서 피붙이를 발견하고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사람들, 온갖 사람들이 몰려나와 북새통을 이루었다.

여기에서도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백성들을 수탈하여 돈이 있거나 금, 은 패물이 있는 집 자제들은 끌려가는 도중에도 속환 값만 치르면 풀려났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찾아오는 이도 없고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끌려갈 뿐이었다. 속바치고 풀려난 포로와 기뻐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서러움이었다.


벽제에서 한성 점령군과 합류한 청나라 군대가 혜음령에 이르렀다. 현재는 파주시 광탄과 고양시를 가르는 행정구역의 경계선이지만 당시에는 한성과 의주에 이르는 관서대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고개 아래에는 벽제관이 있었다. 대국의 사신들이 한성 입성준비를 하던 곳이고 떠나는 조선 사신들이 도성과 작별을 고하던 곳이다. 소현은 명봉산 아래 깎아지른 고갯길 마루턱에서 남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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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음령. 혜음령 고개 마루에서 바라본 삼각산. ⓒ 이정근


"잘있거라, 삼각산아. 다시보마 삼각산아!"

고개를 내려가면 삼각산을 볼 수 없다. 삼각산은 도성의 조산이다. 어디에서 보아도 눈에 들어오고 그 자리에 그렇게 있기만 해도 듬직한 산이었다. 허나, 이제는 더 이상 삼각산을 볼 수 없다. 다시 볼 기약도 없다. 그러나 다시 보자고 다짐했다.

철군 행렬이 임진강을 건너고 개성을 지났다. 황주에 이르렀을 때, 북에서 마중 나온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조선에 출정하여 개선하고 돌아가는 청나라 장수들의 가족이었다. 대부분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무사들이었다. 평소에 용골대 뒤에서 소현세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마부대가 소현 가까이 다가왔다.

"제 아들놈입니다."


아버지를 닮아 인물은 훤칠하지 않지만 늠름한 젊은이를 소개했다.

"이분은 조선국 세자이시다. 인사드리도록 하라."
젊은이가 오른팔을 들어 각을 꺾으며 예를 올렸다. 소현도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그래 올해 나이가 몇인가?"
"열일곱입니다."

"무슨 책을 읽었는가?"
되놈들이 책하고는 담을 쌓았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약간은 무시하는 듯한 어조였다.

"맹자를 읽었습니다."

소현의 전신에 전율이 흘렀다. '맹자'는 조선의 유생들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매우 진취적인 정치사상서가 아닌가? 청나라는 오랑캐 종족으로 말 타고 만주벌판을 내달리는 야만인쯤으로 생각했는데 새파란 소년이 ‘맹자’를 읽었다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그래, 어느 구절을 좋아 하는가?"
"맹자의 진심(盡心) 하편에 나오는 인불가이무치(人不可以無恥)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뜻을 아는가?"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하면 부끄러울 일이 없을 것이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하지 말자는 것이 저의 좌우명입니다."

젊은이에게서 청나라의 미래를 다시 보았다

당찬 젊은이였다. 청나라 사람들을 무지렁이로만 알고 얕보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는 청나라의 젊은이를 만나니 자신이 한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패망하여 볼모로 잡혀가는 일국의 왕세자. 자괴감이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청나라군의 철군 행렬이 평양에 도착했다. 점령군 장수와 평양감사가 대동문까지 나와 영접했다. 대동문은 평양의 관문이며 내성 정문이다. 지난번 정묘년 난리에 소실된 대동문을 2년 전에 고쳐 지었는데 다행히 이번 병화(兵禍)는 입지 않고 살아 있었다. 배흘림 기둥 위에 얹혀진 부드럽고 우아한 팔작지붕의 곡선이 이곳이 색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대동문을 통과하여 시가지에 들어갔다. 고구려의 고도(古都) 평양은 황량했다. 아직도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평양은 대부분의 집이 불타고 텅 비어 있었다. 길거리에는 주검이 나딩굴고 있었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어린아이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고구려 때 평양을 지킨 을밀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을밀대는 석축만 남아 있을 뿐 흔적도 없이 불타버렸다. 높이 36척(11m)의 대(臺) 위에 세워진 겹처마 합각지붕이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누각이었다. 이제는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동족에 의한 패망보다도 이민족에 굴복이 더 가슴 아팠다

부벽루에서 연회가 열렸다. 도르곤의 개선을 축하하는 연회였다. 도르곤을 위시한 청나라 장수들과 소현세자와 평양감사가 참석했다. 대동강 청류벽 위에 자리 잡은 부벽루는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환상적인 누각이었다. 풍광은 좋았지만 그들만의 축하 연회에 소현은 흥이 날 리 없었다. 소현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성은 텅 빈 채로 달 한 조각 떠 있고(城空月一片(성공월일편)
오래된 조천석 위에 천 년의 구름 흐르네(石老雲千秋(석로운천추)
산은 오늘도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山靑江自流(산청강자류)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데(麟馬去不返(인마거불반)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天孫何處遊(천송하처유)
부벽루/목은집(牧隱集)

고려의 패망을 읊으던 목은의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동족끼리의 패망과 건국도 가슴 아프게 읊조리는데 나는 현재 이민족에게 끌려가는 몸이 아닌가?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 저하!"
눈을 떴다. 평양감사였다.

"백성들의 굶주림을 더 이상 눈을 뜨고 보지 못하겠습니다."

감사는 울먹이고 있었다. 평양은 한성보다 더 심한 약탈에 시달렸다. 백성들은 식량이 떨어져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부황이 들어 얼굴이 사람 같지 않았다. 허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는 몸. 세자라고 해서 대책이 없었다.

"우리가 먹을 양식을 덜어내어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한성을 떠나올 때, 시강원 관리들과 익위사 관원 등 200여 명이 먹을 식량을 챙겨가지고 떠났다. 그 식량에서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소현세자 #부벽루 #대동문 #평양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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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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