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게르만' 히스패닉, 왜 힐러리에 열광할까

[해외리포트] 힐러리 부활, 분산된 여심 아닌 4000만 히스패닉 지지 덕분

등록 2008.03.10 21:25수정 2008.03.1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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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대선주자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뉴욕 주)이 텍사스 프라이머리(예비선거) 날인 4일 댈러스의 '에레라즈'란 레스토랑에 들러 지지자들과 박수를 치고 있다. 힐러리는 이 지역에서 히스패닉의 지지에 힘입어 승리,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 로이터/연합


지난 4일 '미니 슈퍼화요일'의 주인공은 힐러리였다. 이날 텍사스·오하이오·버몬트·로드아일랜드 등 4개 주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힐러리는 버몬트를 뺀 3개 주에서 승리했다. 일찍 개표가 끝난 버몬트에서 오바마가 승리하면서 12연패를 달리던 힐러리였다.

이날 승리는 그녀를 벼랑 끝에서 구원했다. 하루 전만 해도 평당원들로부터는 물론 민주당 지도부로부터도 "당을 위해 용퇴할 마음이 없는가"라며 은근히 압력을 받던 그녀였다.

힐러리의 구세주는 누구였을까?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그녀에게 여성 표심이 몰리는 건 당연하다. 사실 2월 5일 슈퍼화요일의 선전에 여성 표심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그날 이후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남편 클린턴의 말대로 텍사스, 오하이오에서도 진다면 힐러리는 "끝장"이었다.

그녀를 부활시킨 건 여성이 아니라, 4000만 명에 달하는 히스패닉의 충성이었다.

힐러리 부활 스토리의 절정, 텍사스

이날 '힐러리 부활 스토리'의 절정은 텍사스 혈투였다. 현직 주지사의 지지를 받았던 힐러리였기에 오하이오 주 승리는 어느 정도 예상됐었다. 버몬트·로드아일랜드에서도 선거 전 실시된 여론조사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투표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텍사스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백중세 지역이었다. 2000년 부시 대통령 당선에 지대한 공헌을 한 만큼 텍사스는 전통적인 '빨간 주(공화당 우위 주)'이다. 따라서 민주당 후보 간 경쟁에 텍사스 주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이전 선거의 경우 슈퍼화요일에 이미 각 당의 대선 후보 윤곽이 그려졌다. 한 달 뒤에나 있는 텍사스 코커스와 프라이머리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야말로 텍사스는 각 당 경선의 찬밥 격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오바마, 힐러리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텍사스까지 선거 열기가 전달됐다. 텍사스 주민들은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각 당 후보 경선에 나섰다. 그 결과 누구도 이들의 표심을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이전의 몇몇 여론 조사는 힐러리의 우위를 점쳤지만, 오바마의 급상승하는 인기에 선거 직전(3일) 발표된 여론 조사(조그비 인터내셔널 실시)는 오바마의 승리를 예상했다.

텍사스 완승의 원동력, '브라운 파워'

텍사스에서 힐러리를 승리로 이끈 건 여성도 흑인도 아닌 '브라운 파워' 히스패닉의 힘이었다. 완전한 백인도 완전한 흑인도 아닌 어중간한 피부색이라서 붙은 '브라운' 표 66%가 힐러리로 향했다. 오바마를 지지한 히스패닉은 32%에 불과했다. 히스패닉 지지를 40%만 받아도 텍사스에서 승리한다는 오바마 진영의 간절한 바람은 처참히 구겨졌다.

텍사스에서도 히스패닉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샌 안토니오·아마릴로·멕시코와 접경 지역인 엘 파소·라레도 등의 도시에서는 힐러리에게 70~80%가 넘는 몰표가 쏟아졌다. 다인종이 함께 사는 대도시 댈러스·휴스턴·오스틴 등에서 오바마 지지가 많지 않았다면 오바마는 참패를 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반면, 힐러리를 지지한 텍사스 여성표는 54%에 지나지 않았다. 오바마를 지지한 여성표가 45%인 것을 감안하면 '히스패닉 변수'에 비해 여성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흑인의 단결력도 역부족이었다. 흑인 84%가 오바마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지만 텍사스 인구의 32%를 차지하는 히스패닉에 비해 19%에 지나지 않는 흑인은 '쪽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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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경선 텍사스 지역별 결과. 짙은 색은 힐러리 승리 지역, 옅은 회색은 오바마 승리 지역이다. 히스패닉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샌 안토니오(San Antonio), 아마릴로(Amarillo), 멕시코와 접경 지역인 엘 파소(El Passo), 라 레도 (Laredo) 등의 도시는 모두 힐러리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 <댈러스모닝뉴스>



히스패닉 주=힐러리 주

히스패닉들의 '힐러리 편애'는 텍사스로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경선 과정이 보여주는 대로 히스패닉이 주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플로리다, 뉴욕 등에서는 모두 힐러리가 승리했다. "대형 주에 강하다"는 힐러리에 대한 평가는 "히스패닉이 많은 주에 강하다"라는 평가와 치환 가능하다.

민주당 최대 선거인수 363명을 뽑았던 캘리포니아는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36%가 히스패닉 유권자다. 뉴멕시코 44%, 애리조나 29%, 플로리다 20%, 뉴욕 16% 등 힐러리가 승리한 주는 모두 히스패닉이 백인을 제외한 최대 인종인 주였다.

반면 흑인인 오바마는 흑인 지역은 물론, 히스패닉이 적은 백인 우위 지역에서 승리를 놓치지 않았다. 흑인이 주류를 이루는 루이지애나·앨러배마·조지아·사우스캐롤라이나 등은 오바마의 텃밭이었다. 이어 노스다코타·아이다호·네브래스카·미네소타 등 히스패닉이 많지 않고 백인이 절대 다수인 지역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에게 "변방에 강하다"는 평가가 가능하다면 이는 "히스패닉이 없는 곳에서 강하다"라는 평가와 다름없다. 8일 실시된 와이오밍 주 경선에서 오바마가 승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평가는 앞으로 남은 경선에 그대로 이어질 전망이다. 히스패닉 비율이 낮고 백인 절대 다수 지역으로 아직 경선이 남은 몬태· 인디애나·노스캐롤라이나 등은 모두 힐러리 대신 오바마를 선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히스패닉의 이유 있는 충성... "좋았던 1990년대"

무엇이 히스패닉들을 힐러리에 열광하게 만들었는가? 왜 그들은 미국 내 같은 소수 인종인 흑인 오바마를 멀리하는가? 히스패닉들에게는 "1990년대로 돌아가자"라는 구호가 어떤 다른 정치 구호보다 호소력이 있다. 1993년부터 2001년까지 클린턴 정부 시절에 히스패닉은 그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꿀 수 있었다.

1994년 나프타(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유명무실해졌다. 부정부패와 경제 정책 실패로 나날이 빈부격차가 커지던 멕시코를 등지고 사람들은 미국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일본 등 아시아 신흥 공업국들의 가격 경쟁력에 밀려 나날이 시장을 잠식당하던 미국은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았던 클린턴 정부와 히스패닉의 밀월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칸소 주지사 경력으로 워싱턴 정가에 정치 기반이 약했던 클린턴은 새로운 이민자 세력을 자신의 정치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핸리 시네로스 전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등 클린턴은 히스패닉계를 자신의 내각에서 중용했다.

반면 2000년대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급증하는 히스패닉계에 대한 견제로 히스패닉의 목을 조이는 반(反) 이민 정책들이 쏟아졌다. 힐러리의 등장은 히스패닉들로 하여금 199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흑인 "죽쒀서 개 준 꼴"

히스패닉이 힐러리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힐러리의 상대인 오바마가 흑인이라는 이유도 크다. 미국에서 히스패닉의 적은 주류인 백인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소수 인종인 흑인이다.

흑인들의 히스패닉에 대한 경계심은 생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백인에 비해 흑인들은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고 단순한 직종에 많이 분포해 있었다. 1990년대에 쏟아져 들어오는 값싼 히스패닉 노동력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본 것도 흑인이었다.

교육 수준이 낮은 히스패닉들이 넘보기 힘든 첨단 직종에 종사하는 백인들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었다. 백인 경영자들은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게 해주는 히스패닉을 반겨 마지않았다.

게다가 히스패닉들은 흑인들이 겪었던 인종 차별도 크게 겪지 않았다.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결과, 1990년대 미국의 공공 영역에서 눈에 띄는 인종 차별은 거의 사라졌다. 히스패닉들은 열심히만 일하면 큰 어려움 없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었다.

흑인들에게 히스패닉은 자신들이 어렵게 가꾼 나무에서 열매만 훔쳐가는 집단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흑인들의 이런 시각은 상당한 정치력을 확보하고 있던 흑인 압력단체에 전달됐다. 그들은 히스패닉을 견제하는 구체적인 정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 불법 체류자 단속과 추방이 급증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히스패닉에게 흑인 대통령을 허락하는 것은 자살 폭탄 조끼를 입는 것과 같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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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현재 민주당 경선 결과. 보라색이 오바마, 노란색이 힐러리 승리 지역. 나머지는 미경선 지역. ⓒ 구글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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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 인구 센서스 결과, 각 주에서 가장 인구 비중이 높은 인종 및 민족을 표시한 지도. 주황색이 히스패닉, 하늘색이 흑인, 진한 파란색을 비롯한 나머지 지역(노란색 지역은 제외)은 유럽계 백인이 가장 많은 주를 의미한다. 힐러리가 승리한 캘리포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의 주는 모두 히스패닉 인구가 많은 곳임을 알 수 있다. ⓒ 2000년 인구 센서스



'내재적 관점'으로 제국 분석해야

한국이 히스패닉에 대한 관심을 두기에는 지리적인 간격이 너무 큰 듯하다. 그 때문인지 미국 대선에 대한 분석은 한국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21세기 제국의 처지에서 히스패닉은 북한의 핵무기나 중동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미국은 옛 로마 제국을 붕괴시킨 게르만족에 히스패닉을 빗대고 있다. 실제로 히스패닉의 높은 출산율, 상류층이 하기 싫어하는 업종을 떠맡으면서 미국 경제의 기반이 되고 있는 점, 히스패닉계 미군 출신의 증가, 히스패닉이 사용하는 스페인어 공용화 비율 확대 등에서 오늘날 미국과 로마 제국 말기 사이에 유사점이 큰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의 새 대통령이 가장 먼저 만나야 하는 외국 수반은 언제나 미국 대통령이다. 미국 대선이 한국에 그렇게 의미가 크다면 그에 대한 분석에 깊이를 더해야 한다. 한국의 관점이 아니라 제국이 생각하는 '내재적 관점'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것이 적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이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이다.
#히스패닉 #힐러리 #오바마 #NAFTA #미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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