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생명력, 계보는 살아 있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15] 훈구대신과 사림

등록 2008.03.10 14:21수정 2008.03.11 09:24
0
원고료로 응원
a

근정전. 조선 건국 초 법궁이었던 근정전에 구름이 모였다 흩어진다 ⓒ 이정근


조선 건국 이래 강력한 왕권에 숨죽이던 훈구대신들이 세조 조를 거치면서 권력의 중앙에 부상했다. 조카의 왕위찬탈이라는 업(業)에 시달리던 세조는 권세라는 미끼를 던지며 이들을 중용했고 권력에 취한 그들은 정통성에 취약한 세조의 바람막이 역할을 자임했다. 이들은 중앙집권을 추구했으며 부국강병이라는 미명아래 사리사욕을 채우며 부(富)를 축적했다.

훈구대신들의 부는 부패와 동전의 양면이다.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한 김종직 등 사림(士林)이 부패한 이들의 견제세력으로 등장했다. 위기를 느낀 훈구파는 연산의 폭력성을 끌어들여 뇌관을 터트렸다. 훈구파는 도전세력 사림파를 피바람으로 응징했다. 4대 사화(士禍)다. 50년간 지속된 피의 숙청으로 수많은 선비들이 희생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권력의 중앙에 기사회생한 사림은 정통성에 문제점을 안고 있는 선조 조에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다. 구름은 만나면 갈라지고 세력은 뭉치면 흩어진다 했던가? 권력을 독점한 이들은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훈구세력과 변화를 추구하려는 신진세력이 각을 세우며 대립했다. 결국 이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했다.

a

품계석. 경복궁 근정전 품계석. 이 자리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했다. ⓒ 이정근


부패한 선배 세력을 타도하겠다고 뭉친 동인은 퇴계(退溪) 이황, 남명(南冥) 조식, 화담(花潭) 서경덕의 문인(門人)들이었다. 그들이 내거는 기치는 도덕성이었고 중심에 김효원이 있었다. 도성의 동쪽에 있던 김효원의 사랑채는 유성룡, 이산해, 이발, 우성전, 최영경이 선배들을 성토하는 장(場)이었다.

현대 정치사에서 ‘차떼기 당’이라는 말처럼 “서인은 태반이 훈척세가다(西人太半勳戚勢家)’라는 딱지는 치명적이었다. 동인에게 기선을 빼앗긴 서인은 위기를 느꼈다. 이 때 동서분당을 극구 말리던 율곡이 서인에 합류했다. 서인을 이끌던 심의겸은 입이 째졌고 그가 살던 도성 서쪽은 단비가 내렸다.

동인에게 밀리던 서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 우계 성혼이었다. 율곡의 친구 성혼은 아버지 성수침을 통하여 정암 조광조와 닿아 있고 정암은 한훤당 김굉필로 이어지며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하이니 사림파의 뿌리였다. 조의제문(弔義帝文) 파동으로 부관참시당한 김종직은 영남학파의 비조다.

상대적으로 우월적 정통성을 확보한 서인은 정철 응징문제로 갈등을 빚다 이산해와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북인과 우성전, 유성룡의 남인으로 세포분열했다. 분열 DNA는 북인 조식, 남인 이황이라는 학맥이었다. 오늘날에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구름은 만나면 갈라지고 세력은 뭉치면 흩어진다

광해 조에 득세한 북인은 대북, 소북으로 나뉘어 내홍을 겪다 인조반정으로 몰락했다. 등거리외교라는 정치실험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서인은 광해의 등거리외교에 경악했다. 존주(尊周)의 대상 명나라를 멀리하고 후금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하여 매월 망궐례를 올리던 서인들에게 배명정책은 재조지은에 반하는 가치관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인들에게 정체성의 자기부정이었다.

임금을 군(君)으로 끌어내리고 왕을 강화도에 위리안치 시킨 훈구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보수로 회귀한 것이다. 부패와 척실이라는 오명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이다. 그들을 받쳐주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오늘날에도 고위 관직에 나가려는 사람들의 재산을 들추어 보면 억! 억! 소리가 난다. 자본주위사회에서 부와 재산은 지탄의 대상이 아니다. 정당한 이재행위는 존경을 받는다. 기업인은 직업이 장사꾼이다. 하지만 왕조시대 선비들은 장사꾼이 아니다. 나라에 봉직하고 국록을 먹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고래등 같은 집을 지니고 수많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부정과 불법과 가까이 지냈다는 방증이 아닐까.

권력은 부를 낳았고 축적된 부는 권력을 재생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 때 무력동원도 불사했다. 인조반정은 무력을 동원한 군사 쿠데타였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현대에도 쿠데타는 곱게 보아 줄 수 없는데 하물며 왕조시대의 쿠데타는 반역의 동전양면이다. 그들은 권력지향적이었다.

a

김장생. 김장생의 수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김자점과 김류는 쿠데타의 행동대장일 뿐 서인세력의 좌장은 장동 김 대감이었고 정신적인 지주는 김장생이었다. 김장생은 서인의 중진 김계휘의 아들로서 율곡 이이, 송익필과 동문이다.

그의 학맥을 이은 사람이 아들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 이유태, 송준길, 장유, 이후원 등 훗날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 인물이며 강빈의 아버지 강석기도 김장생의 문하생이다.

김 대감은 인왕산 아래 장동. 오늘날의 청운초교 뒤쪽 왕회장 집 근처 살았다. 때문에 불과 며칠 전에 병판을 그만두었으나 장동대감이라고 부른다. 김장생은 길 건너 경기상고 자리에서 살았다.

김 대감은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로 출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권율장군의 종사관으로 호남지방을 왕래하면서 명나라 원군을 지원했다. 이 때 뼈 속 깊이 새겨둔 것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이며 명나라에 대한 무한한 충이었다.

“대감께서 어인 일로 이른 아침에 소인의 누옥을 찾아주셨습니까?”

김 대감을 사랑채로 안내한 강석기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김 대감은 강석기보다 20세 가까이 연상이었다. 훗날 김 대감의 손녀딸과 강석기의 둘째 아들 강문명과 혼인하게 되어 사돈이 된다.

“긴한 얘기가 있어 결례를 무릎 쓰고 이렇게 찾아왔네. 네, 거두절미하고 단조직입적으로 묻겠네. 자네 여식이 올해 몇인가?”
강석기의 눈이 휘둥구레졌다.

“올해 열 넷입니다만 어인일로…?”
영문을 모르는 강석기는 긴장했다.

“머지않아 세자빈 간택이 있을 걸세. 자네 여식을 세자빈으로 넣을 테니 그리 알도록 하게.”
의사타진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고였다. 강석기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내 딸이 세자빈이라? 세자가 등극하면 나는 국구가 되고 내 딸이 아들을 낳으면 임금님의 할아버지가 된다?”

a

왕좌. 왕의 자리. 경복궁 근정전. ⓒ 이정근


꿈같은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지금 듣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승 김장생은 용상의 자리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무서운 자리라고 가르침을 주셨다. 가문의 영광이 될지? 문중의 불행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자신은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신다는 승지다. 승지도 모르는 혼담이 오고 간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저희 여식이라니요?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아직 어리고 배운 것도 미천하여 어림없습니다.”
“일 없네. 그런 줄 알고 난 일어나겠네.”

문을 박차고 나오던 김 대감과 댕기머리 소녀가 부딪쳤다. 당황한 소녀는 머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이 녀석인가?”
“네 저의 여식입니다.”

“인물이 곱구만….”
“과찬이십니다.”

김 대감이 돌아간 그날 밤, 소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늘 천(天)자 위에 유일한 지존이 지아비 부(夫)자라고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혼담이 오고 간다는 것이 야속하다. 아버지로부터 여자로 태어나고 지아비에 의해 여성으로 재탄생한다는 나의 삶을 내가 선택했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효라고 배웠지만 평범한 여인으로 살고 싶다. 숨 막힐 것 같은 궁궐은 싫다.”
#훈구파 #사림파 #4대사화 #김장생 #강석기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