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색시가 사고 쳤다네

[역사소설 소현세자 17]사고 친 세자빈, 계산된 도발이었을까?

등록 2008.03.14 13:49수정 2008.03.1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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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전. 경덕궁의 정전 숭정전에서 세자의 가례가 거행되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사실과 관계없는 자료사진입니다. ⓒ 이정근


섣달 스무이레. 소현세자의 가례가 숭정전에서 거행되었다. 인조 등극 이후 처음 갖는 경축행사였다. 그동안 인조는 생부 원종 추승과 생모 계운궁(啓運宮) 장례 절차문제로 상처를 많이 받았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은 치명적이었다. 쿠데타군을 이끌고 도성으로 진공할 때의 기개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인조는 이 모든 것을 한방에 날려버리기 위하여 세자의 혼례를 성대하게 치르라 명했다.

사가에서도 맏이를 처음 혼인시키는 개혼(開婚)은 집안의 경사다. 하물며 임금이 세자빈을 맞아들이는 국혼이다. 대통을 이을 원손을 낳아줄 여인이 궁에 들어온 것이다.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더구나 소현은 인조에게 있어서 첫아들이고 인조 나이 이제 서른둘. 삼십대 초반에 며느리를 본 셈이다.


경덕궁 창건 이래 처음 갖는 행사를 경축하기 위하여 시전은 철시했고 흥화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도성에 있는 종친과 대소신료는 물론 지방의 수령들도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운종가와 황토현, 그리고 돈의문에도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백성들도 모처럼 호란(胡亂)의 시름을 잊고 경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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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전도. 김정호의 수선전도(首善全圖)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왼쪽 아래가 경희궁이다. 김정호가 그린 수선전도에는 경희궁이 운종가를 지나 흥인지문과 일직선상에 있다. ⓒ 이정근


인조는 흐뭇했다. 세자가 대통을 잇고 그의 아들 원손이 보위에 오르면 종묘사직은 튼실할 것 같았다. 이제 어떠한 국난이 닥쳐도 정묘년 때처럼 세자가 허둥지둥 피신하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분조(分朝)하면 나라의 위기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국강병으로 외국의 침략을 격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몽진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조는 가례교서를 반포했다.

“왕은 이른다. 대혼(大昏)은 만세를 잇는 것이다. 이제 세자가 성혼하였으니 그 빛이 빛나지 않는가? 왕실의 아름다운 덕화를 상고해 보면 반드시 지어미의 유순함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나는 태자를 세움에 먼저 배필 구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다. 선인의 교훈대로 덕을 기준으로 힘써 구하였고 조정에서 세신(世臣)에게 물어 명문가의 출신을 얻었다. 드디어 강석기의 둘째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하였고 세자가 초계(醮戒)하여 친영을 마쳤다. 육례를 이미 갖춤은 만복의 근원이며 이것은 종사의 큰 복이니 신민은 경복하라.”

정월 초하룻날. 새해가 밝았다. 새 신랑이 된 세자가 처음 맞는 새해다.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본조(本朝)의 진하례(陳賀禮)를 거행하였다. 강빈도 배행했다. 그런데 새색시 강빈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다음날 사헌부에서 득달같이 상언이 올라왔다.


“왕세자빈이 조현(朝見)할 적에 타고 온 연(輦)의 뒤를 배종한 시녀들이 말을 타고 숭정문 앞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시강원은 제대로 규검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날 연의 뒤를 수행한 관원을 문책하시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병방 승지를 추고하소서.”

궐내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 타고 통행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대소신료들도 금기사항인데 하물며 시녀들이 말을 타고 궁에 들어왔으니 대궐이 발칵 뒤집혔다. 시녀들은 여자다. 조선은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를 내린 유교사회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사건이 터진 것이다. 연루된 시강원 관원과 병방승지가 줄줄이 문책 당했다.

사고 친 세자빈, 계산된 도발이었을까?

강빈은 사대부집 출신이다. 더구나 아버지가 승지다. 궁중법도를 모를 리 없다. 위로는 대왕대비(인목대비)가 있고 중전이 있지만 내명부 서열 3위다. 연을 타고 앞서가는 강빈이 뒤 따라오는 말발굽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다. 계산된 도발이었을까? 강빈이 어리고 새색시이기 때문에 아랫것들을 지휘할 힘이 없었을까?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시작된 것일까?

가례를 마친 인조는 공신 및 그의 적장자들과 함께 북악에서 회맹제(會盟祭)를 가졌다. 임금이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여(轝)를 타고 악차(幄次)에 도착했다. 면복(冕服)을 갖춘 왕세자와 복장을 갖춘 배제관(陪祭官) 및 집사관(執事官)들이 모두 들어와 의식 절차에 맞춰 예를 거행하였다.

회맹의식은 단(壇)을 세우고 남면(南面)하여 완석(莞席)을 깔았다. 소 한 마리, 양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를 제단에 희생으로 바쳤다. 왕이 신하들의 충성을 확약하고 주입시키는 회맹단은 경복궁 신무문 북쪽에 있었다. 오늘날 청와대 자리다.

“공훈을 기리는 뜻에서 같이 맹세를 하니 신명(神明)이 보증하는 바이다. 단서(丹書)에 분명히 기록하여 종묘사직의 영화를 같이 할 것을 산하(山河)를 두고 맹세하는 바이며 앞으로 그대들의 자손에게도 두고두고 영화를 누리게 할 것이다. 오늘 이후로 천세(世)에 이르기까지 군신 상하의 은혜와 의리가 변함이 없을 것이며 하나의 절의를 시종 일관 견지하여 좋은 일 궂은일을 함께 감당할 것이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길 경우에는 하늘과 땅의 신령들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회맹단으로 공신 적장자들을 불러내어 가진 회맹의식은 선혈이 낭자했다. 살아 있는 양을 잡아 서로 그 피를 돌려 마시고 벌건 입술로 서약(誓約)을 꼭 지킨다는 단심(丹心)을 신(神)에게 맹세하는 의식을 삽혈동맹(歃血同盟)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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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전. 숭정전 편액 ⓒ 이정근


회맹제를 끝낸 인조는 숭정전에서 또 한 차례 의식을 가졌다.

“신하로서 충성스러운 노고를 다 바쳐 공적이 드러났기에 국가가 경상(慶賞)으로 보답하여 이에 대려(帶礪)의 맹세를 확인하는 일환으로 이장(彛章)을 서훈하고 대호(大號)를 부연하는 바이다. 이 사실을 천지신명에게 고하여 같이 희생의 피를 마시며 맹세하는 한편, 그대들의 모습을 그려 화려한 기린각(麒麟閣)에 봉안하는 등 모든 성대한 의식을 구전(舊典)에 따라 준행하는 바이다.”

흉년인 관계로 연회는 베풀지 않고 단지 제주(祭酒)와 번육(燔肉)을 여러 공신 및 여러 제관(祭官)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술 한 순배씩만 돌리고 파하였다. 신하들을 돌려보낸 인조는 어수당(魚水堂)에 술상을 차려 놓고 세자만 시종하도록 명하였다.

“종묘사직이 너의 양 어깨에 달려 있다. 학문을 쌓고 덕을 길러 부디 성군이 되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정묘년 변란으로 파괴된 어수당은 인조가 어소(御所)를 옮기면서 중건했다. 열무정(閱武亭) 가에 못을 파고 10여명이 탈 수 있는 화선(畫船)을 만들어 띄웠다. 궁가(宮家)의 여악(女樂)을 불러 노래하고 춤을 추게 하며 뱃놀이를 즐겼다. 인조는 환관들에게 말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소문은 날개를 달고 궁궐 담장을 넘었다.

광해가 자신의 왕좌에 위협이 되는 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정원군의 집터를 헐어내고 새로이 지은 궁전이 경덕궁이다. 집을 지은 사람은 경덕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광해가 지어준 궁궐에서 아들의 혼례를 올렸으니 시정에서 괴이한 소문이 퍼졌다.

“죽 쒀서 개 좋은 일 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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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화문. 경덕궁의 정문이다. 경덕궁은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식을 거행했던 곳이다. ⓒ 이정근


소현세자가 혼례를 올린 경덕궁(慶德宮)은 우리에게 잊혀진 궁궐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경운궁(덕수궁) 즉조당에서 즉위한 인조는 창덕궁에 거처했으나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불타 경덕궁으로 이어했다. 이후 경종이 즉위식을 가졌고 영조 36년, 인조의 생부 원종의 시호(諡號)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하여 경덕을 경희로 개칭하여 경희궁이 되었다.

영조가 집경당에서 승하했고 정조가 즉위한 곳이 경희궁이다. 이후 조선 후기 국왕들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東闕)로 삼고 경희궁을 서궐(西闕)로 삼아 번갈아 오가며 거처했다. 이렇듯 조선조 후기부터 말기까지 약 280여년을 어엿한 조선왕궁이던 경희궁은 나라가 망하자 일제에 의해야 완전히 파괴되었다. 일제는 경희궁에 일본인 자녀를 위한 경성중학(서울고)을 세우고 나머지 토지는 분양해 버렸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興化門)은 박문사 산문으로 이축되었고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구내에 이건 되었다. 그 후 흥화문은 박정희시대 영빈관이 되었다가 호텔 신라 정문이 되었으며 경희궁터에 있던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되돌아왔으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원래 흥화문 자리는 현 구세군회관 건물에 동향으로 세워졌으나 현재는 남향이다. 수난의 연속 흥화문이다.
#경덕궁 #경희궁 #강빈 #소현세자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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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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