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젊은 피 수혈, 그 득실은?

[사극으로 역사읽기]

등록 2008.04.15 10:42수정 2008.04.1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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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의 정조 임금. 고종시대에 그는 리더십이 훌륭한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젊은 피 수혈전략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MBC


정조의 미행이 계속되고 있다. 군주에서 선비로 변신한 정조 임금은 도성의 민심을 살피는 한편 새로운 인재들을 계속해서 찾아다니고 있다. 미행을 통해 발굴된 ‘젊은 피’들이 규장각에 속속 투입되고 있다.

<이산> 제60회(4월 14일 방영)에서는 ‘젊은 피 수혈’의 성과물 중 하나로서 실학자 이덕무(1741~1793년)의 등용을 소개했다. <청장관전서>라는 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덕무는 18세기 후반에는 청나라에까지 소개된 유명한 시인이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이덕무 등의 청나라 파견이 논의되는 것으로 보아, 현재 <이산>의 시점은 정조 2년(1778)경으로 보인다.

이덕무 외에 <이산>에 자주 소개되는 실학자로는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를 들 수 있다. 드라마 상의 박제가는 “공부만 할 게 아니라 무예도 단련해야 한다”는 주군의 명령을 받고 울며 겨자 먹기로 활쏘기 연습에 주력하고 있다.

서얼로 대표되는 이들 중간계급의 기용은 정조 개혁정치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있다. 보수세력인 노론과 대비되는 이들은 개혁을 추구하는 정조의 의지를 상징하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중간계급의 기용은 비단 한국사나 조선정치사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나 세계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 19세기 이전의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와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한 가지 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흔히 조선 후기는 서민의 시대라고들 한다. 서민의 시대를 다른 말로 하면 중간계급의 시대가 된다. 이 시기에는 서민의 성장을 반영하는 서민의 문화가 두드러지게 발전했다.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노비의 사회적 성장도 이같은 서민의 성장이라는 새로운 현상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중인계층인 서얼 역시 서민층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왕조의 봉건적 경제관계가 약화되는 새로운 현상을 배경으로 이들 중간계급은 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 대약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 후기의 신분 혼란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신분이동이 없었다면, 정조가 그들 계층을 제도권에 적극 편입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함께 일어났다는 점이다. 청나라에서는 이미 명나라 때부터 중간계급인 상인계층이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에도막부가 통치한 일본에서도 중간계급인 상인계층이 역시 비약적 성장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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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피 수혈 전략의 일환으로 발탁된 실학자 박제가. 드라마 <이산>. ⓒ MBC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동아시아 중간계급의 성장이 서양 부르주아의 성장과 시기를 같이했다는 점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시피, 서양 부르주아 역시 본래는 중간계급이었다. 이렇게 세계적 범위에서 중간계급의 성장이 비슷한 시기에 공통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세계가 고도의 경제적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제국주의자들은 아편전쟁 이후에야 비로소 세계사가 시작된 것처럼 주장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승리 시점을 기준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싶어 하는 승자들의 공통된 정서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최근 세계 각국의 경제사 연구성과를 정리해 놓은 <리오리엔트>에서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역설한 바와 같이, 세계는 19세기 이전에도 이미 고도의 경제적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19세기 이전의 세계에 고도의 경제적 상호작용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19세기 이전에 차·비단·도자기의 실물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대대적으로 이동하는 한편 아메리카 은(화폐)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대대적으로 이동한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동서양 두 지역의 중간계급이 비슷한 시기에 큰 성장을 이룩했지만, 그 결과는 동서양에서 서로 판이하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서양 선진국가들의 부르주아는 18세기말에 봉건지배층을 전복하고 권력을 쟁취했지만, 동양의 주요 국가인 조선·청·일본 등의 중간계급은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적 수단을 획득하지 못했다.

1776년 미국 독립혁명,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서양 주요 선진국가들의 부르주아계급은 정조 임금의 집권기에 자신들의 경제적 성장을 정치적 성장으로 변환시켰지만, 동양의 중간계급은 그냥 경제적 성장에 만족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권력교체가 일어났지만, 동양에서는 그것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직후인 19세기에 동양이 서양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원인 중 하나로는, 서양은 ‘대표팀’의 ‘세대교체’에 성공한 반면 동양은 그것에 실패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편전쟁(1840년) 이후의 ‘월드컵’(서세동점)에서 싱싱한 서양팀들은 노쇠한 동양팀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우세를 선보였다. 지배층의 ‘컬러’가 동서양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한 가지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동서양의 중간계급이 비슷한 현상을 배경으로 비슷한 성장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말에 동양의 중간계급이 서양의 부르주아와 달리 권력쟁취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술력의 차이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국제정치나 국내정치의 차원에서 한두 가지의 요인만 제시하기로 한다.

중간계급이 성장을 거듭하던 시기에 서양에서는 국가들 간의 상호 경쟁이 끊임없이 발생한 데 반해 동양 3국 간에는 장기간의 평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 3국은 상호 대결을 자제하면서 내부 강화에 주력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조·청·일 3국에서 똑같이 자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국학운동이나 문예부흥 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평화가 세 나라에게 시간적 여유를 제공했던 것이다. 정조 시기의 문예부흥도 이러한 국제관계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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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소재 규장각(현재 명칭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정조의 젊은 피 수혈전략을 상징하는 기구였다.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


그런데 이같은 동양 3국의 평화는 동양 3국의 지배층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동양 3국의 도전계급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국제관계의 안정을 배경으로 동양 3국의 지배층이 국내 도전세력을 상대로 더 높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의 서양 지배층들이 밖으로는 외국 지배층과 경쟁하면서 안으로는 국내 부르주아계급을 상대해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동양 3국의 지배층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를 누린 셈이다. 18세기 이전까지 동양 3국의 중간계급이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기존 지배층을 쉽게 꺾지 못한 한 가지 이유는 이와 같이 국제평화로 인해 3국 지배층이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었던 데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제평화에 힘입어 지배층의 역량이 국내로 집중될 수 있었다는 조·청·일 3국의 공통점 외에, 정조시대에 나타난 조선왕조 나름의 특징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정조의 적극적인 중간계급 편입전략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젊은 피 수혈 전략이었다. 

드라마 <이산>에서 여러 차례 강조된 바와 같이 정조 임금은 노비들의 신분적 제약을 풀어주려고 하는 한편 중인계급인 서얼 등을 제도권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선보였다. 정조 임금의 젊은 피 수혈전략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조 임금의 시도는 그 자체로서는 매우 훌륭한 일이었지만, 위에서 소개한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중간계급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정치적 기능도 발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간계급을 부분적으로 편입시키는 수준에 그친 정조의 젊은 피 수혈전략은, 중간계급의 정치적 욕구를 ‘관리’하고 그들의 불만 폭발을 예방하는 정치적 효과를 산출하고 있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80% 가량의 지지를 얻던 1993년 상반기에 한국 운동권이 누구를 상대로 투쟁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잠시 혼란을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정조 시대의 개혁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산출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중간계급이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정치적 성장을 획득하기 위해 대대적인 투쟁을 벌이던 18세기 후반에 조선에서는 중간계급의 투쟁이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동양 3국의 평화로 인해 3국의 지배층이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었던 데다가 정조 임금이 서얼 등용과 개혁정치 등을 통해 중간계급의 정치적 욕구를 일정 정도 제도권으로 편입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중간계급은 더 이상의 도약을 할 수 없었다. 임금이 ‘선정’을 베푸는 상황 하에서는 도전세력이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가 한층 더 힘들어질 것이다.  

어찌 보면 ‘맛보기’라고도 평할 수 있는 정조 임금의 ‘젊은 피 수혈 전략’은, 기술력의 한계 같은 경제적 측면과 더불어 조선 중간계급의 정치적 성장을 제약하는 효과를 산출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서세동점 시대에 노쇠한 조선왕조가 싱싱한 서양 국가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도록 만든 한 가지 요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왕조의 수호자인 정조 임금으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혁명가가 될 수 없는 ‘선천적 한계’를 타고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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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kimjongsung.com.FM101.9 (목)11시25분. (저서) 조선상고사(번역) 2판,나는 세종이다,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 여자,철의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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