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한번에 청첩장은 2가지... 앗, 잘못 보냈네

청첩장 보고 깜짝 놀란 처가... 결혼은 하나 하나 채우며 사는 것

등록 2008.05.06 18:08수정 2008.05.07 23:0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내 결혼 이야기 말이다. 나는 결혼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배우자를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될 정도로 치렁치렁한 생각들…. 이 생각들은 주로 시시각각 변하는 것들이었지만, 그 중 변치 않는 것이 꼭 하나 있었다. 형식에 구애됨이 없는 사랑의 마음만으로 채워지는 결혼식을 꿈꾸었던 것이 그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허황된 생각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때 그 꿈은 나의 진심이었다. 우린 결혼 예물을 주고받지 않는다, 주례 선생은 평소 존경하던 그 분으로 한다, 결혼식장은 경비가 들지 않는 교회로 한다, 첫 출발은 단칸방에서 시작한다, 신혼여행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국내 여러 곳과 고향 마을을 들려 '민주화의 성지'라고 하는 광주 북구 망월동 묘지 참배로 대신한다는 등의 구체적 계획까지 잡고 있었다. 내용이 형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마 당시 나의 빈핍한 경제적 형편이 이런 생각을 도출해 냈는지도 모른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고 있을 때, 문병온 한 아가씨와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 오던 그런 상(像)의 여성이었다. 우린 병원 로비에서 짧은 기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이야기는 결혼 이야기로까지 발전했다. 나의 결혼관을 쉽게 받아들일 아가씨는 많지 않을 터이었다.

무(無)에서 하나하나 장만해가며 사는 것

a

신혼여행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국내, 고향 마을을 들려 민주화의 성지라고 하는 광주 북구 망월동 국립5·18묘지 참배로 대신한다는 등 구체적인 계획을 잡았었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이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린 더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모든 것을 수긍은 하지만 예물 등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나는 그녀를 설득했다. "갖추어 출발한 결혼 생활은 무미건조할 것 같다, 무(無)에서 하나하나 장만해가며 사는 것이 결혼 생활의 참 재미 아니겠느냐"는 등의 말로 그를 설득했던 것 같다. 어렵사리 그녀의 동의를 받아냈다.

우린 일사천리로 결혼식을 준비했다. 병원을 조기 퇴원하고, 양가(고아인 내가 '양가'라고 해봐야 처가밖에 없었지만) 동의를 어렵게 받아냈다. 처가에서는 불분명한 나의 직업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내 딸을 데려가서 먹여살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직업이랄 것도 없이 사회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으니 부모님들의 염려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 산(?)도 넘었다.  탐탁치 않지만 너희 둘이 좋아하는 것 같으니 식은 1년 준비기간을 거쳐 내년 가을에 하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까지 발전되었다. 결혼이 성사되기까지는 많은 변수가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년의 기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우린 기왕 허락해주신 것 몇 개월 후, 농번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 5월에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경비가 들지 않는 결혼식은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준비가 복잡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 예물도, 예단도 없는 결혼식. 식장도 교회로 쉽게 결정되고 신혼여행도 고향을 거쳐 광주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준비가 없어도 될 일이었다.

그 중 당시 조금은 부담이 되는 것이 방을 얻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방은 신랑 측에서 얻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천애고아 신세인 나에게는 단칸방도 얻을 돈이 없었다. 다행히 직장에 다니고 있던 아내 될 사람이 대출을 받아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 둘만 아는 것으로 해 두었다.

날짜를 잡고 청첩장을 인쇄하고 주위에 우리의 결혼식을 알렸다. 청첩장은 두 종류를 찍었다. 하나는 친척들에게 돌릴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회 운동의 동지들에게 돌릴 것으로 말이다.

사건은 처가 쪽에서 벌어졌다

사건의 발단은 처가 쪽에서 벌어졌다. 신실한 기독교 가정인 처가에서 교회 목사님에게 전한 청첩장이 친척용이 아닌 사회운동 동지용이었던 것이다. 그 청첩의 내용은 대충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의 믿음직한 형제 이명재 동지와 사랑스런 자매 박성숙 동지가 이 사회 변혁의 선상에서…. "

이런 내용의 청첩장을 받은 보수적인 목사님이 깜짝 놀란 것은 '그야말로' 놀랄 일이 아니다.

주례를 맡아주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자료사진). ⓒ 권우성

우린 서울 명동 입구 향린교회에서 백기완 선생 주례로 식을 올렸다. 참석한 사람들이 '민중결혼식'이라고 명명해 주었다. 풍물패가 등장해서 한바탕 흥겨운 놀이마당을 연출한 후, '상록수'를 부르며 신랑 신부가 손을 맞잡고 입장해서, 두 몸이 힘을 합해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라는 주례사를 듣고 뒤풀이를 하는 순서로 우리의 결혼식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지금도 결혼식 사진을 볼 때마다 처가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사진 속 젊은 동지들(?)의 밝은 얼굴들과는 대조적으로 찌푸린 얼굴들의 처가 쪽 손님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물패가 동원된 난장판 결혼식을 황당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찌푸린 얼굴로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뒷풀이 뒤 우린 기차를 타고, 그리고 버스를 갈아 타고 중소도시의 한 여관에서 신혼 첫밤을  보냈다. 이튿날 광주 망월동 5·18묘지를 참배한 뒤 비슷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지하 단칸방에 차린 신혼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인생의 재미를 다른 각도에서 보다

억대를 운위하며 결혼식을 준비한다는 말들이 들려온다. 결혼식의 방식과 예물을 마련하는 과정에서의 불협화음으로 식을 올리기 전에 깨졌다는 얘기도 듣는다. 그리고 최고로 첨단의 혼수품을 완비하여 거창하게 새 출발을 하는 커플들 이야기도 들려온다. 하지만 나에게 이런 호화로운 결혼식이 조금도 부럽지 않은 것은 인생의 재미를 다른 각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너나없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부족함을 하나하나 채워 가는 것이 인생의 참 재미라고 생각한다.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없는 것으로 출발해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힘을 합해 살아가면서 생활용품을 알뜰살뜰 장만해 가는 것, 그 속에서 진정한 '부부 일체'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고 행복이 아닐까?

맨몸으로,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시작한 우리이지만 지금, 누구 못지않게 인간다운 그리고 행복한 삶을 농촌에서 일구어 가고 있다. 동시에 많은 물질이 행복의 절대 조건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친환경 결혼> 응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친환경 결혼> 응모글'입니다.
#이명재 #신혼 여행 #결혼 예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사 3년 만에 발견한 이 나무... 이게 웬 떡입니까
  2. 2 '내'가 먹는 음식이 '우리'를 죽이는 기막힌 현실
  3. 3 도시락 가게 사장인데요, 스스로 이건 칭찬합니다
  4. 4 장미란, 그리 띄울 때는 언제고
  5. 5 '입틀막' 카이스트 졸업생 "석유에 관대한 대통령, 과학자에게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