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니스가 머 별거가? 이거이 피트니스 아이갓쏘?

초안산 산책길

등록 2008.05.15 15:37수정 2008.05.1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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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산(楚安山)은 우리 동네 100미터밖에 되지 않는 아주 조그마한 산이다. 친구의 권유로 아침마다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이번 2주 동안은 제대로 출근부에 도장을 찍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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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부러진 주인모를 비석. 초안산은 내시(內侍)묘가 많은 산으로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거의 방치되어 있다. 녹천정 아래 내시 승극철의 부부묘가 있어 생활사 일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 이덕은



우리 동네에서 초안산으로 오르는 길은 고갯마루까지 창동으로 넘어가는 큰길이 닦여 있어 어려움이 없으나 지름길이 없어 고갯마루 축대를 이용하여 샛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나타나는 이름 모를 무덤. 이 산은 조선시대 궐내 잡무를 맡아보던 내시(內侍)들의 묘가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여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쓰러진 비석, 문인석, 상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60년대 후반 이곳에 국민주택들을 개발하며 주인 없는 석물들을 함부로 캐갔다고도 하는데, 대개 그러하듯 좋은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는다. 그렇게 무덤이 훼손되다 보니 산길을 걸으면서도 불룩 솟아오른 곳이면 남의 묘가 아닌지 조심스럽다. 어떤 곳은 비석이 너부러져 산책로 한가운데 노출되어 있는데 세워놓기엔 내 힘에 부치니 그저 좋은 마음으로 비껴 지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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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안산 정상 105미리 포탄껍질로 만든 종.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이다. 군대시절 막사나 연병장에 있던 기억이 나는가? 초안산은 100미터 조금 넘는 얕은 산이다. ⓒ 이덕은


산은 육산이지만 산책로는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진흙은 아니고 마치 궁궐에 깔아 놓은 삼화토(三和土)와 같은 성질이라 항상 빗자루로 쓸어 놓은 느낌이다. 육교를 건너서,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계단을 조금 오르다 보면 30분도 안되어 정상에 다다른다.

정상에는 군대생활했던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는 105미리 포탄껍질로 만든 빨간 종과 조잡하게 철제로 만든 깃대봉 하나가 있다. 올라오는 길에 거미줄처럼 엮인 참호들도 있는 것으로 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군 막사나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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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체육장. 흔히 볼 수 있는 체조외에도 독창적으로 자신에 맞는 운동법을 개발하여 아침마다 하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나만의 피트니스'가 아닌가? ⓒ 이덕은



아침운동에 그렇게 많은 종류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익히 보아왔던 체조, 평행봉, 아령, 역기, 윗몸 일으키기 외에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몸 구부리기 하는 사람, 두 팔을 올렸다 내리면서 뱃속의 공기를 내뿜듯이 소리치는 사람, 벤치에 누워 리듬에 맞춰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는 사람, 경보를 하며 박수를 치는 사람... 

모두 나름대로 고안해낸 것이니, 피트니스가 따로 있나? 이것이 바로 자신만의 '피트니스'지. 처음에는 별일이다 싶으나 눈에 익다보니 안 보이면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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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민턴장에 자리 빼앗긴 문인석 아무리 문화재로 지정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주변의 석물로 보아 코트가 봉분이었을 것 같은 배드민턴장. 석조인간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이덕은


정상 부근에는 검은 비닐하우스용 덮개로 장막을 쳐놓은 배드민턴장이 몇 곳 있는데 매우 조악하여 경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어떤 곳은 자리 배치상 상석과 문인석을 밀어내고 봉분 부근을 코트로 사용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되기까지 해 서울시에서 지정한 사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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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으로 스며드는 아침햇살. 이런 맛으로 산책 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 이덕은


헬기장을 거쳐 조금 내려가다 보면 초안산에서 거의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암반이 나오고 인조 잔디 축구장 곁에 작은 정자와 체육시설이 나온다. 여기가 내가 몸 비틀기와 간단히 역기를 드는 곳이다.

한 세트 끝날 때마다 숨고르기를 하며 쳐다보는 하늘과 참나무 이파리와 역기틀에 비치는 아침의 붉은 햇살은 나의 머리 속을 깨끗이 비워준다. 곁에서 평행봉하던 산책객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내려온다.

숲길은 군데군데 작은 개활지를 만드는데 벚꽃이 피든, 아카시아 꽃이 피든, 바닥에 떨어진 꽃잎 위에 앉아, 찬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딱다구리 소리를 듣는 맛도 일품이다.

아파트 곁에 위치한 약수터 근처에는 모양이 좋은 커다란 후박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밑으로 들어가 보면 사이클 선수 다리통 같은 근육질의 나무 기둥들이 십여 그루 모여서 마치 한 나무인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은 유난 떨지 않아도 곳곳에 널려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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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사잇길. 낙엽송을 심어놓아 마치 숲속을 걷는 것 같다. 아파트는 성냥갑같으나 어떻게 이렇게 조경해놓을 생각을 했을까? ⓒ 이덕은


약수터나 샘물을 가면 항상 느끼는 것 하나. 운동 삼아 물 받으러 오는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영업집에서 쓸 물을 받는 것도 아닌데 커다란 생수통에서부터 페트병 다발까지 들고 와서 물 한 모금 먹고 가는 것까지 민망스럽게 만들지는 말아야지. 죄송하다 비집고 들어가 물 한 그릇 들이키고 큰길 쪽으로 나간다.

성냥갑처럼 멋대가리 없이 지어놓은 아파트지만 아파트 출입문으로부터 큰길로 이르는 샛길은 낙엽송이 도열하듯 서있어 마치 산 속 숲길을 걷는 기분이다.  

병원을 옮기며 시작한 산책길. 근방에 이런 야트막한 산이 있어 고맙고, 지나치며 주고받는 인사말이 반갑고, 굳이 피트니스다 뭐다 하며 의무감을 지워주지 않아 가볍고, 지난 밤 알코올 기운이 빠져 나가며 머리 속이 맑아지니 즐겁다.

끝으로 노래방에서 고음으로 뻗치는 부분에서 '바튼 기침'이 없어지는 것은 덤으로 받는 선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닥다리즈포토갤러리 (http://yonseidc.com에서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닥다리즈포토갤러리 (http://yonseidc.com에서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초안산 #휘트니스 #승극철 #내시 #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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