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반, 남자 둘이 내방 문을 두드려댔다

김치찌개 끓이다가 죽을 뻔한 사연

등록 2008.05.22 10:43수정 2008.05.2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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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유학 생활 3년차. 자취 생활도 3년차로 접어들면서 혼자 살림하는 데 꽤 익숙해졌다. 주중에는 학교 다니느라 요리할 시간이 거의 없다. 그래서 주로 주말 밤 한 11시~12시 쯤에 다음 주에 먹을 양식을 만들어 놓곤 한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주말을 맞이해서 '쓸고, 닦고, 빨래하고' 자취생의 3D 업종을 해치운 후 깨끗한 방에서 기분좋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요리라고 할 것도 없지만 얼마 전에 사다놓은 돼지고기로 김치찌개를 끓일 계획이었다. 상큼한 기분으로 돼지고기에 양념도 팍팍해서 후라이팬에 기름 두르고 볶고…. 아무튼 나름 정성이 많이 들어간 자취생표 김치찌개였다.

보글보글 김치찌개가 끓고 있었다. 요리책에 나온 '20분 정도 끓인 다음 마지막에 소금으로 간을 하면 더 맛있답니다'라는 친절한 설명을 따르기로 했다. 어지럽혀진 주방을 다 치우고 시간을 보니 12시쯤 됐다. '한 15분 있다가 간 맞추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시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봤다.

뿌연 연기 속에서 울린 초인종 소리

그런데, 분명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쾅쾅" "띵동띵동"하며 누군가 미친듯이 문을 치고, 초인종을 계속 눌러대는 게 아닌가? 몽롱한 정신으로 시계를 봤다. 새벽 4시 반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남자 둘의 목소리가 났다. 누워서 이게 무슨 상황일까 생각했다. 저 사람들이 새벽에 왜 내 집 문을 치고 초인종을 누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었다. 난 무서워서 집에 없는 척 하고 숨죽이고 자기로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안 가고 계속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몽롱한 정신으로 계속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맞다.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4시간'쯤 전에…. 모든 감각이 급속도로 곤두섰다. 부엌으로 갔다. 김치찌개는 어디가고 냄비 안에 새까만 숯덩이가 있었다. 연기와 함께. 불은 모두 켜져 있었고 창문은 모조리 닫혀 있었다. 어쩐지 뿌옇더라니…. 창문을 죄다 열었다.

늦었다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생을 달리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잠에 취했는지, 연기에 취했는지 몽롱한 정신으로 잠을 청했다. 새벽 6시쯤에도 남자 둘이 또 와서 초인종을 눌렀지만 두려운 마음에 역시 집에 없는 척했다. 두드림이 심해질수록 친구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야, 얼마 전에 아는 언니가 자취방에서 공부하는데 갑자기 창문으로 손이 쑥 들어오더래. 놀래서 경찰에 신고했는데 알고 보니 옆집 남자였다고. 조심해라'
'혼자 있는데 누가 문 따는 소리가 들려서 너무 무서웠어.'

무슨 일일까? 새벽에 찾아오는 공무원도 있나? 세상이 흉흉하다더니 이제 막 대놓고 이상한 남자들이 찾아오나 싶었다. 얼마 뒤 문 두드리는 소리는 멈췄다.

고마운 이웃도 무서워해야 하는 세상

너무 이상한 새벽이었다. 아침에 엄마한테 전화해서 새벽에 일어났던 이상한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김치찌개 끓이다가 죽을 뻔하고, 또 새벽에 이상한 남자 둘이 와서 자꾸 문을 두드려서 무서웠다고. 얘기를 듣던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 사람들이 너 구해준 것 같은데?"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앞뒤가 딱딱 들어맞았다. 옆집에 남자 둘이 살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옆집 사는 사람들이 문을 통해서 타는 냄새를 맡고 문을 두드린 것이다. 기척이 없으니 고맙게도 2시간 뒤인 새벽 6시에 와서 또 살펴본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변태 취급을 했으니….

김치찌개 때문에 죽을 뻔하다가 그 남자분들 덕택에 목숨을 건진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사실을 알고 나서도 남자 둘이 사는 방에 찾아가기가 조금 겁이 나서 아직까지 감사하다는 인사조차도 못했다.

조깅하던 여고생이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칼에 찔려 죽질 않나, 초등학생을 성폭행하고 살인하는 일이 일어나질 않나. 여기저기서 듣는 흉흉한 사건들 때문에 내 마음도 흉흉해졌나 보다.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면 반가운 마음보다는 흠칫하게 된다.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버릇이 들어버린 것 같다. 심지어 도움을 준 사람의 문도 함부로 두드리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아무도 함부로 믿을 수 없는 슬픈 세상이다.

일주일이 넘은 지금도 집에는 타는 냄새가 가득하다.
#김치찌개 #흉흉한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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