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종의 비밀을 투시할 수 있는 역사현미경

[서평] 스토리를 찰나화한 신라 종에 담긴 비밀을 해부한 <에밀레종의 비밀>

등록 2008.06.09 16:14수정 2008.06.13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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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토함산 불국사대종과 종루 ⓒ 임윤수


한 아이가 있었네.
아이는 엄마가 무서웠다네.
엄마는 오빠 집을 세상에서 젤로 크게 지어주고 싶었다네.
엄마는 아이를 팔아 오빠와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네.
아이는 도가니에 던져져 종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네.
오늘도 엄마를 원망하면서 울부짖고 있다네.
에밀레, 에밀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에밀레종의 전설을 <에밀레종의 비밀>의 저자 성낙주는 에밀레종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배경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했다. 성낙주가 쓰고, '푸른역사'에서 펴낸 <에밀레종의 전설>은 전설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 손가락이라는 전설을 통해서라도 가리킬 수밖에 없었던 에밀레종에 담긴 시대적 비밀을 시공을 초월해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는 성능 좋은 역사 현미경이다.


에밀레종의 전설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 현미경

물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치수를 재고, 무게도 달아보고, 이런저런 특성을 측정해 구체적으로 검토해 봐야 하지만 현미경을 이용한 미세조직 관찰이야말로 필수다. 가시광선을 광원으로 하는 광학현미경은 가시광선의 파장이 갖는 한계상 1000배 남짓으로 그 확대범위가 제한되지만, 맨눈으로서는 비밀일 수밖에 없는 미세조직을 관찰하는 데 아주 유용하다.

그럼에도 1000배쯤 확대하면 초점범위가 상당히 좁아지고,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을 관찰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 맞닥뜨린다. 그러기에 현미경으로 조직을 관찰하려면 특성을 대표할 만한 부분을 잘 선택(Sampling)해야 하고, 초점을 맞추기 위해 절대적 수평이 이루어지도록 부단히 준비를 해야 하는 수고쯤은 감수해야 했던 게 얼마 전까지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요즘에 등장하는 현미경은 디지털 기술을 접목시킴으로 초점범위에 대한 난해를 완벽하게 해소시켜 선명한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고, 단차측정까지도 가능해졌다. 옷을 벗기거나 살을 째지 않고도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X-레이처럼 금속의 내부조직을 관찰할 수 있는 투과전자현미경이라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표면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관찰이 불가능하니 굳이 아랫부분까지 봐야 한다면 양파껍질을 벗겨 내듯 겉 부분을 갈아내면서 봐야 하는 게 광학현미경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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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낙주 지음 - 에밀레종의 비밀 / 534쪽, 2만5000원 ⓒ 푸른역사

필자가 <에밀레종의 전설>을 역사를 투시할 수 있는 '멀티현미경'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디지털 기술이 접목된 요즘의 현미경처럼 시공을 초월한 접목과 투과현미경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배경까지 독자들의 렌즈에 또렷하게 상을 맺어가는 책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인 '심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에밀레종을 정의한다.

"에밀레종은 위풍 넘치는 웅자와 화려한 의장, 장엄한 울림으로 저 예술사의 고원에 당당히 올랐다. 그렇지만 에밀레종만큼 우리에게 당혹감을 안겨주는 예술품은 드물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존재 자체가 불가해한 미답의 세계가 곧 에밀레종이다."

이어 "서라벌 사람들이 하대신라 실력자들의 눈을 피해 혜공왕을 추모하는 은밀한 제식에서 나지막하게 읊조리던 피묻은 제문이 에밀레종전설인 셈이다"라는 설명으로 에밀레종의 전설을 규정하고 있다.

'에밀레' 한국인이 만들어낸 가장 슬픈 어휘

이어지는 글에서 저자는 '에밀레'라는 말은 한국인이 만들어낸 가장 슬픈 어휘 가운데 하나이다. 흡사 '아리랑'처럼 애절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음소만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듯 맘속으로 읊조리기만 해도 벌써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고 했다. 또 '전설이란 개인의 즉흥적인 사유나 허구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거기에는 개인의 의식과 체험을 앞서는 근원적인 집단 무의식의 여러 심리 내용이 가장 순수하게 나타나 있다. 삶과 우주를 바라보는 특정 집단의 치밀하고도 과학적인 사유의 결과물이 곧 전설이다'로 정의해 전설이 가지는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에밀레종 전설은 엘리트 사가의 춘추필법을 뛰어넘는 '음습한 전설들'로 가득 차 있다. 창작 집단의 예리한 직관력은 중대왕실의 파멸이라는 궁중비극 속에 내재된 '야만적 폭력'을 간파했고, 그들의 출중한 문학적 상상력은 고래의 인신공희담의 형식을 빌려다가 그것을 온전하게 보존한 문학 '작품'을 창작했다. 자신들이 직접 목격한 정치적 격변을, 참으로 '의뭉스럽게도' 모자간의 갈등을 축으로 삼아 오라비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와 동일시 한, 그리하여 남편과 자식을 배반한 어미와 억울하게 희생된 아이의 이야기로의 각색한 것이다"라는 설명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인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 에밀레종 전설임을 입증하고 있다.

지방에 따라 약간씩 내용을 달리하는 채집된 전설들을 실언형, 배신형, 후일담형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전설을 서사물의 구성단계인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그리고 대단원으로 나누어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설뿐 아니라 에밀레종의 규모와 음색이 갖는 특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와 기호학으로 에밀레종의 미려함을 설명하고 있다. '신라종은 1300년 전 이 땅에 살던 신라인이 우리한테 송출한 거룩한 기호의 덩어리이다. 신라종의 송신자는 신라인이고, 수신자는 오늘의 우리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멀티현미경의 기능에 입체분해능을 더한 입체적 내용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빗대어 본 에밀레종

신라인의 논리적 사유를 확인시켜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물증은 종체 표면의 특이한 구성이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상대와 꽃집, 비천 당좌, 하대 등의 요소가 기승전결의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잠시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빗대어 그 점을 알아보기로 하자.

맨 먼저 종의 어깨 부분, 곧 보상당초문으로 충만한 상대는 <진달래꽃>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로 시작하는 기련에 해당한다. 종체의 첫머리를 화려한 꽃문양의 굵은 띠로서 열어젖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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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의 종정부는 용 한마리가 원통을 짊어지고 헤엄을 치는 모습으로, 저자 성낙주는 <에밀레종의 비밀>에서 에밀레종의 원통은 만파식적, 단룡은 문무왕이라고 하였다. ⓒ 성낙주


다음으로 그 상대에 바짝 붙인 꽃집 네 곳과 거기에 피어난 36송이의 연꽃은 <진달래꽃>의 승련에 잘 대응한다. 곧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와 똑같이 화사한 꽃밭의 이미지가 물큰하다.

거기서 텅 빈 듯한 복종으로 내려가면 이번에는 홀연 비천이 그 휘황한 자태를 드러내고, 활짝 핀 연꽃 모양의 당좌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야말로 시상의 일대 반전이 일어난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진달래꽃>의 전연과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하대에선 상대가 고스란히 재현된다. <진달래꽃>의 기련이 결련에서 반복되는 것과 같은 이름 하여 수미관상법이다. 그러면서도 밋밋한 상대에 비해 종구를 여덟 갈래를 짓고 그 자리마다 탐스런 연꽃 송이를 심어 변화를 추구한다.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는 <진달래꽃>의 기련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로 작중 화자의 언설이 더욱 강조 심화된 결연과 마찬가지다. 가령 <진달래꽃>의 결연이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다"의 기련을 되풀이했다면 단조로움을 면치 못했을 것처럼, 에밀레종에서 상·하대를 똑같이 처리했다면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에밀레종은 상이한 요소들의 유기적 통합 속에 절대의 미감을 자랑한다. 그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지우거나 변형되면,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에 심각한 균열이 초래되고 통일적인 미감이 상실되고 만다. 에밀레종은 스스로의 덩치에 짓눌리거나 스스로의 화려함에 압도됨이 없이 모든 요소가 엄정하게 통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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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레종의 비천상 ⓒ 성낙주


에밀레종의 외양을 <진달래꽃>의 초점을 맞춰 기승전결로 상을 맺어내니 비밀을 해독해 내는 저자의 심안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저자는 역사를 생명체로 규정하고 있기에 제시하는 논증과 주장엔 생명력과 유기성이 생생하다.

'역사는 단순한 물리적 시간의 퇴적물이 아니며 막연한 꿈의 집합체도 아니다. 때로 인간의 이성을 조롱하고 열정을 경멸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보면 모든 변화의 흐름이 나름의 인과를 맺으며 연사의 벽에 아로새겨져 있곤 한다. 그렇듯이 우비고뇌의 감정까지도 창조적 에너지로 환원시켜 변혁의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는, 우연까지도 필연으로 수렴해 내는 불가해한 생명체가 인간의 역사이다.'

서슴지 않은 시비곡직의 언사, 빠트리지 않은 경책

저자는 중간 중간에 최완수나 유홍준과 같은 선학들의 실명을 거명하며 시비곡직의 언사도 서슴지 않는다.

'개인사에도 질곡이 있지만, 국가나 민족의 역사에도 시대의 질곡이란 게 있다. 과거의 역사를 살아간 이들이 부득이하게 짊어진 그 질곡의 덫을 공유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어떠한 논리도 비이성의 폭력적 담론으로 떨어질 우려가 높다.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시대의 질곡을 단 한줌이라도 나누어지지 않은 채, 시간의 거리를 방패 삼아 현재라는 안전지대에서 행하는 일방적인 역사 서술은 공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비겁한 행위, 혹은 공허한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에밀레종의 비밀을 드러내는 저자로서의 경책(警責)도 빠트리지 않고 있다. 

현미경의 초점을 맞추듯 한 장 한 장을 넘기다 보면 제1부 음습한 전설, 에밀레종 전설, 제2부 신라 신삼보에 담긴 무열왕계의 꿈, 제3부 에밀레종의 신비, 제4부 거장들의 세계와 부록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다. 에밀레종의 비밀을 해석하고 들여다보는 데 소요될만한 역사적 배경이나 설화들조차 촘촘히 구성되어 있어 문양 하나, 용어 하나에 담긴 의미조차 씨줄과 날줄로 확인할 수 있다.

217개의 참고문헌과, 152개의 주석들이 저자 성낙주가 밝히고자 했던 <에밀레종의 비밀>에 조명되고 있어 손가락이라고 하는 전설의 렌즈에 초점이 맞춰진 실체, 에밀레종에 담긴 비밀들이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서 만큼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흐릿하기만 했던 비밀이 또렷하게 상을 맺는다.

덧붙이는 글 | (푸른역사) 성낙주 지음 - 에밀레종의 비밀 / 534쪽, 2만5000원


덧붙이는 글 (푸른역사) 성낙주 지음 - 에밀레종의 비밀 / 534쪽, 2만5000원

에밀레종의 비밀 - 소리로 세상을 다스려라

성낙주 지음,
푸른역사, 2008


#에밀레종 #만파식적 #현미경 #시비곡직 #진달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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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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