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 아이는 왜 수업시간에 괴성을 질렀을까?

내가 아이들을 신뢰하는 이유

등록 2008.06.19 10:33수정 2008.06.19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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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반장이잖아!

다른 학생도 아니고 학급 반장이라는 녀석이 수업시간에 자주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산만한 태도를 보이면 수업하기가 참 난감해집니다. 그런 경우, 대개 이런 식으로 훈계를 늘어놓지요. 

"너는 반장이 돼가지고 수업태도가 그게 뭐냐? 반장이면 네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지."

이 정도면 사실 훈계가 과한 편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고 곧바로 태도를 고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교사의 훈계나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이들이 문제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식으로 항명(?)을 하는 아이도 있지요.     

"반장이라고 꼭 모범을 보여야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법은, 말하자면 불문법이니 그 아이의 눈앞에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해서 이런 식으로 대거리를 하고 말지요.  

"그럼 보통 애들 만큼은 해야지. 넌 그 정도도 못되잖아."


그 뒤의 그림은 안 봐도 뻔합니다. 숫제 닭싸움이 되기 십상이지요. 싸움이 격렬해지면 누가 이기고 지고가 없습니다. 이겨도 상처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더욱이 교사와 학생이 맞붙으면 교사는 싸움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볼썽사나운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웬만하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요.

훈계한 후 몇 분 뒤에 터진 괴성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위에 예시한 전형의 한 아이에게, 역시 예시한 수준의 과하지 않은 훈계를 주고 난 뒤였습니다. 한참 수업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는 괴성이 들렸습니다. 진원지를 확인해보니 반장 아이였습니다. 한 번은 그냥 넘겼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괴성이 들렸습니다. 그 괴성을 풀어보니 이런 문맥이었습니다.  

"너 조용히 안 해!"

반장은 떠드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괴성처럼 들린 것이지요. 저는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조금은 화가 나기도 해서 반장 아이를 앞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너 선생님한데 불만 있니?"
"(큰 소리로) 없는데요."

"그럼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래?"
"(외치듯이) 애들이 떠들어서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요."

"너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 것 같은데?"
"(괴성에 가깝게)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도 너 소리 지르고 있잖아."
"(더욱 큰 소리로) 아닌데요. 애들 못 떠들게 하라면서요?"

"그렇다고 그렇게 수업에 방해될 만큼 소리를 지르면 안 되지."
"(심하게 몸을 떨면서)조용히 말하면 애들이 제 말 듣는 줄 아세요?"

"네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애들도 말을 듣지. 큰 소리만 친다고 말을 듣는 건 아니잖아. 아마 선생님이 네 자존심을 건드려서 그런 것 같은데 그랬다면 내가 사과하마. 선생님도 화가 나서 말을 함부로 했을 수도 있어. 진심이야. 선생님이 학생에게 사과하는 것 쉬운 일 아니야. 내 사과를 받아주고 자리에 들어가거라. 그리고 지금은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혹시 너도 선생님에게 사과할 일이 있으면 사과해. 알았지?"

선천적인 심장 질환 앓고 있는 아이

아이는 저에게 손을 잡힌 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전체 아이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장하기가 쉬운 게 아니야. 너희들이 반장을 도와주어야지. 알았지?"
"예."

대답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뭔가 진실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보였습니다. 그 다음날, 수업시간에 반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부반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가 선생님께 사과하고 싶다고 꼭 말씀드려 달라고 했어요."
"○○이는 오늘 결석한 거야?"
"병원에 입원했어요. 본래 몸이 안 좋아요. 어제도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랬다고, 선생님께 꼭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나중에 확인해보니 반장 아이는 자율신경과 관련된 선천적인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가끔 수업시간에 엎드려 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날 먼저 사과할 생각을 한 것도 아이의 상태가 심각해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심각한 상태를 교사에 대한 반감의 크기로 오해하여 아이를 몰아세우거나, 아이의 불손한 행동으로 인해 다친 교사의 자존심을 먼저 챙기려 했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배반당한 경험 없어

다행히도 제 자신보다는 아이에게 집중하여 한 호흡을 쉴 여유를 가진 것이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이들을 신뢰합니다. 흔히들 아이들에게 잘해주면 머리 꼭대기에 앉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정말 아이들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아이들과 진정한 인간적인 만남을 경험한 교사라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아이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반장 아이에게 선뜻 사과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전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제 진실을 배반당한 경험이 없습니다. 한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제 인격 결함이 문제될지언정 사랑의 세례를 받은 아이가 그 사랑을 배반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연습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진실 연습, 혹은 사랑 연습 말입니다. 그 연습 과정에서 거짓말을 하고 다소 실망스러운 행동을 한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 어느 것도 연습 과정 없이 단련되는 것은 없으니까요. 

곱상하게 생긴 외모만큼이나 착한 심성을 지닌 반장 아이의 병이 하루빨리 낫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반장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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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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