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빛나는 시'는 어디서 빚어진 것일까?

<시인세계>, '문인들의 아지트' 기획특집으로 실어

등록 2008.06.29 19:48수정 2008.06.3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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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술과 기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고은 시인. ⓒ 한국문학평화포럼

먼저 문제 하나. 아래 열거하는 다방과 술집들의 공통점은 뭘까?

아리스다방, 은성, 사슴, 낭만, 평화만들기, 시인학교, 탑골, 이화, 귀천, 예술가, 가락지, 은경이네….


맞다. 몇몇의 사람들은 이미 정답을 마음 속으로 말했겠지만 위에 언급된 것들은 모두 이른바 '문인들의 아지트'가 달았던 옥호다. 수십 년에 걸쳐 시인들의 눈물과 한숨을 머금으며 그 안에서 '빛나는 시'를 잉태해낸 공간.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몇 차례나 오르며 문명을 떨치고 있는 시인 고은(75). 지금이야 세계적 시인의 반열에 오른 그이지만, 고은에게도 가난과 절망을 자양분으로 시를 써야했던 젊은 날이 있었다.

바로 그 가난한 젊은 날, 고은 시인은 단골 술집에서 쓴 소주를 마시며 세상과 자신을 돌아보고, 그 성찰의 힘으로 수십 년을 인구에 회자될 빛나는 노래를 빚어냈다. 그 풍경을 1970년대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로 활동했던 정규웅은 이렇게 술회한다.

고은 시인이 '싸게 술 마신 노하우'를 공개하다

"70년대 초 나는 고은 시인에게서 가벼운 주머니로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어느 날 오후 서너 시쯤 볼 일을 마치고 신문사로 돌아가던 중 광화문에서 고은 시인을 만났다. 고 시인은 무작정 나를 뒷골목 선술집으로 끌고 갔다. 둘 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데 고 시인은 호기 있게 찌개와 소주를 주문했다. 소주 두 병을 마시고 찌개가 바닥이 나자 고 시인은 냄비에다 물을 붓고 밑반찬을 모두 쏟아 부은 다음 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마셨는데도 술값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랬다. 허름하고 값싼 주점, 벽지가 담배 연기에 찌든 다방은 시인들의 꿈과 희망이 영글어가던 장소인 동시에, 굴곡의 한국문학사가 형성된 공간이었다. <시인세계> 여름호는 기획특집으로 바로 이런 장소와 공간을 탐색하고 있다. 이름 하여 '시인들의 단골 아지트'.

이 특집에 참여한 필자들의 면면이 다채롭고 화려하다. 총론격인 '문인들의 장소 문인들의 공간 이야기'는 시인 장석주가 썼고, 울산대 국문과 소래섭 교수는 한국문학사에서 다방이 차지하는 엄청난 비중(?)을 세세하게 서술했다.

여기에 원로시인 황금찬과 김종길, 김규동에서부터 중견 이태수와 이문재,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문인보다 더 문인 같은 문학기자'로 이름을 날린 정규웅과 현재 <한겨레신문> 문학전문기자로 활동 중인 최재봉의 글까지.

장석주는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세를 탔던 명동의 막걸리집 은성과 여기에 드나들던 '명동백작' 이봉구와 전혜린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시인과 술집의 밀접성에 주목한다. 그의 글은 문인들의 아지트가 명동에서 종로와 인사동, 청진동으로 옮겨 다니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의 글 소제목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에 가깝다.

'아리스다방에는 언제나 김종삼이 있다'
'반포치킨의 성자, 김현'
'다방은 한국문단의 이면이다'
'전봉래와 정운삼, 다방에서 살다 다방에서 죽다'
'마리서사(시인 박인환이 운영했던 서점), 실패한 한국 모더니즘의 산실'

문인들의 아지트, 술과 낭만의 시대에 대한 향수

흔해 빠진 검찰 출입기자 혹은, 총리실 출입기자가 아닌 '청진동(문인들의 단골 술집이 유난히 많던 동네) 출입기자'라는 별칭을 안고 살았던 정규웅의 글 '1970-1980년대 문인들의 단골술집 풍속도'는 읽는 재미가 쏠쏠할 뿐 아니라, 가난했지만 낭만이 넘쳤던 시대의 노스탤지어까지 부른다.

정규웅은 '슬픔과 결곡의 시인'으로 불리던 박용래가 한국문단의 마당발 이문구의 사무실로 찾아와 아침부터 술을 마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 조병화와 송지영, 이병주 등 원로급 문인들이 자주 찾던 주점 '사슴'의 풍경 등을 담담히 그려내 읽는 이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앞서 언급한 고은 시인과의 에피소드 역시 여기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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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의 아지트로 이름 높았던 술집 중 하나인 '시인학교' 풍경. ⓒ 오마이뉴스 이종호


선배 문학기자의 바통을 받아 '그곳에 가면 시인의 별똥별을 볼 수 있다'라는 글을 이어가는 현직 문학기자 최재봉이 묘사하는 풍경도 정겹기는 마찬가지다.

"(위치를 옮긴 평화만들기는) 한때 웬만한 문학상 시상식의 뒤풀이를 도맡아 유치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장소가 좁아진 터라 큰 모임을 수용하지는 못한다. 원래 집 벽에 김지하 시인이 직접 썼던 이용악의 시 '그리움'만은 벽지를 통째로 뜯어다 옮겨 놓아서 예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요즘 평화만들기에서는 출판사 학고재의 손철주 주간이 취흥이 오르면 즉석에서 펼치는 '애정 한시 특강'이 인기다. 벽 한쪽에 걸린 칠판에 달필로 원시를 적고는 한 구절씩 새기면서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가 술맛을 한껏 돋운다."

여기에 더해 최재봉은 김종삼 시인의 시 제목을 술집 이름으로 사용한 문인들의 또 다른 아지트 '시인학교'와 경영난으로 지금은 사라진 홍익대학교 인근 '예술가', 요 몇 년 사이 문인들이 대거 이주해 새롭게 문학동네로 각광받는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크롬바허', 전라북도 전주의 '문인 사랑방'으로 이름이 높은 '새벽강' 등도 소개하고 있다.

이제는 모두 80세를 넘긴 한국문단의 원로 김종길, 김규동, 황금찬 시인은 자신과 친구, 선후배들이 무시로 드나들었던 백록다방과 풀러워다방, 자연장다방, 문예살롱, 명천옥 시절을 추억하며 회상에 젖는다. 

광주에는 '왕자관', 대구에는 '맥향', 부산에는 '풍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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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단골 아지트'를 특집으로 실은 <시인세계> 여름호. ⓒ 문학세계사

대한민국 곳곳에 시인과 소설가가 있을진대 문인들의 아지트가 서울·경기에만 있을 리 없다.

일흔 여덟의 노시인 범대순은 광주가 '예향'으로 불리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시동인지 <원탁>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며, 동인 멤버들이 40년간 단골로 드나들었던 중국집 '왕자관'을 추억한다.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태수 시인은 자신과 박정남, 박해수, 이경록, 이기철, 이하석, 이동순, 정호승 등이 창립 멤버였던 '자유시' 동인을 기억 속에서 소급해낸다. 그 기억 속에서 이 시인은 1979년 그들의 아지트 '맥향'에서 펼쳐졌던 동인 시화전과 시낭송회를 어제 일처럼 그리워하기도 한다.

부산 서면 롯데호텔 맞은편 문화공간 '풍락재'의 방장으로 불리는 서규정 시인은 "시인의 권위는 술로 통한다. 무조건 쎄야 한다. 젊잖게 한두 잔, 잔만 부딪치다 갈 바엔 비싼 교통비 들여 누가 나올까, 적어도 통음이다"라는 말로 시인들이 은행원이나 동사무소 공무원 같아진 세태를 은근슬쩍 비꼬기도 한다.  

이외에도 '시인들의 단골 아지트' 기획특집에는 20년 단골 주점 '다다'에 얽힌 시인 이문재의 추억담(나의 기억문화유산, 다다), 신촌의 허름한 목로에서 걸핏하면 정신을 놓아버리는 정병근 시인의 취중 실수담('은경이네'에는 은경이가 없다) 등이 실렸다. 이 글들 역시 맛깔난 읽을거리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반가운 선물이 될 듯하다.

비단 문인들에게만 단골술집이 있지는 않을 터. 특출한 예술가가 아닌 보통의 삶을 사는 우리 역시 저마다의 '아지트'를 찾아 시원한 맥주 한 잔 들이켜고 싶은 여름날 저물녘이다.
#아지트 #시인 #은성 #시인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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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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