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그 아름다운 단어의 남용을 중단해야

<한국경제> 다산칼럼 '질서를 사랑하는 나라'를 비판한다

등록 2008.07.03 16:42수정 2008.07.03 16:42
0
원고료로 응원
질서를 지켜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우왕좌왕’한 모습에 Zeus 주신은 ‘부끄러움’이라는 디나미스(dynamis: 고유한 능력이나 가능성)를 부여했다. 즉 질서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즉 사회는 이러한 타인에 대한 ‘관계’를 겸손하게 유지하면서 안정적으로 작동된다.
 
즉 질서는 인간사회에서 학습되는 고유한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동물들의 ‘개체조절’이나 ‘먹이사슬’같은 생존의 본능과는 구별된다. 즉 질서에 대한 문제는 ‘당연히 습득되어야 할 본능’이 제대로 학습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동반한다. 이는 터무니없는 학습 커리큘럼을 ‘의무’라는 상위범주에 구속시키고자 하는 위험에 대한 경계를 말한다. ‘국민개조’를 제일과제로 내세웠던 군사정권은 모든 논쟁을 ‘질서의 이름으로’ 다 무마했다. 그리고 그 이름하에 엄청난 ‘반질서적인 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촛불시위에서 몇 번의 ‘과격성’이 등장한 이후 <촛불=반질서>라는 공식이 가히 파죽지세로 표출되고 있다. 미국과의 동맹문제, 재협상을 할 경우 국가신뢰도가 하락한다는 문제등과 다르게 “너희가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라는 것은 본질을 완전히 엉뚱한 곳에서 해석하겠다는 일종의 협박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협박이 지금 비일비재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자에 대한 질서란 무엇인가?
 
남성일 교수는 7월 2일자 칼럼(한국경제)에서 촛불집회를 무질서한 폭력성으로 규정했다. 남교수는 공공분야의 질서가 ‘내 자유가 소중한만큼 남의 자유도 소중하다는 배려’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질서가 사회적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져 그 꿈같은 단어인 ‘선진화’에 길목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무조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큰 오류가 있다. 이 메커니즘은 바로 ‘촛불이 일어선 이유’이기 때문이다.
 
a

한국경제 <다산칼럼> 질서를 사랑하는 나라 (남성일 서강대 경제대학원장) ⓒ 한국경제

▲ 한국경제 <다산칼럼> 질서를 사랑하는 나라 (남성일 서강대 경제대학원장) ⓒ 한국경제
 
여기서 그 촛불이 이렇게 ‘거대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분명 정부는 국민에 ‘대한’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지나친 부끄러움으로 누가 보아도 지나칠 정도의 ‘질서의식’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부끄러움의 방향이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다. 이를 알고도 ‘흥분’하지 않는 것은 질서를 이해하는 자의 도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내 차를 누가 뒤에서 박았다. 명백한 상대방 100% 과실이다. 그런데 이 사고가 오죽 심각한 것이 아니라 차는 완전히 박살나고 같이 동승한 친구는 중태에 빠질 정도였다고 하자. 이럴 때 반대편의 질서는 바로 부끄러움부터 시작해야 한다. 분명한 사과와 환자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 그리고 완전한 보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것을 다 해야하겠다는 그러한 의지 말이다. 이러한 부끄러움의 표출은 오히려 “맞아요. 제가 급브레이크를 밟은것도 잘못이지요”라는 없는 잘못도 나로부터 인지하게 한다. 이게 질서의 ‘순환’이다.
 
그런데 가해자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 XX야!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라고 소리를 지르면 그때부터 상황은 복잡해진다. 그 사람이 날 협박하면 난 ‘경찰’을 부르게 될 것이고 자꾸만 트집을 잡으면 ‘목격자’를 찾게 될 것이다. 교통법률을 잘 알고 있는 변호사 친구에게 연락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에 대한 반격은 그 시작부터 ‘과잉’되게 되어 있다. 그것 또한 분명한 질서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 거대한 촛불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남의 자유에 대한 배려'가 이렇게 무식하게 흘러왔는데 어찌 그 반응이 그렇게 단촐할 수 있겠냐 하는 것이다. 반대로 국민에 대한 한없는 부끄러움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이렇게 큰일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작부터 배후세력, 음모론, 과학적 사고 등을 운운하며 '건방진 가해자'의 모습을 적나라게 보여준것이 사실이다.
 
시위대의 폭력성! 누구보다 시위대가 그들을 부끄러워한다
 
질서의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은 그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에 있다. 예를들어 '반공'이 가장 중요한 질서로 규정될때에는 '잘못된 질서'임을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동조했다. 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된다는 것은 이러한 '잘못된 질서'에 대한 분명한 리액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정치인, 언론인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민들이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질서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이다.
 
시위대의 일부가 과격한 모습을 보였다. 전경차를 박살내고 전경을 폭행했다. 물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자의 만행이나 다름없다. 그런에 이것이 어떻게 사회안에서 순환되고 있는가? 놀랍게도 '시위대 자체'에서 이것에 대한 반대소리가 제일 크다. 이는 군사정권이 야당의 투쟁이 아닌 내부적 성찰에 의해서 '성찰'하는 것과 같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 모습이다. 그렇게 잘났다는 정치인들이 절대 하지 않은 부끄러움에 대한 리액션이 바로 시위대 '내'에서 발생했다. 그것의 결과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비폭력적 모습에 대한 국민적 동조이다.
 
촛불시위는 이렇게 질서의 기본도 보이지 않은 정부에 대한 지극히 '질서적인 모습'의 표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집단은 스스로 자성하면서 간혹 망각할 수 있는 '부끄러움'을 언제나 되새기고 있다. 촛불은 질서를 사랑하기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질서를 사랑하기에 꺼질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정부는 국제관계라는 것이 ‘질서’의 명목으로 쉽사리 유지되는 않는 생각보다 훨씬 지저분한 역학관계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한결 쿨하다. 그래서 이번 결과가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라고 뼈저리게 사과하면 되는 것이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고 싶어할 뿐이다. 그런데 청와대 뒷동산에서 한없이 반성했다고 하자마자 국가정체성 운운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끄러움이란 것이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망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하나, 남교수는 일본의 휴대폰문화가 아주 질서가 있는점을 서두에 강조했다. 수백의 군중들이 남을 방해하지 않고 '소근소근' 통화를 한단다. 그리고 불법천지인 광화문을 걱정했다. 꺼지지 않는 촛불을 '공공장소에서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정도에 비유할 수 있다니 대단한다. 작금의 사태는 "공공장소에서는 휴대폰을 진동모드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당연한 공손이 아닌 "진동으로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멘트에 대한 일종의 어이없음이다. 또 '벨소리'가 한번 울렸다고 이를 폭도니, 좌파니, 친북이니 어쩌고 저쩌고 하는 해괴망칙한 상상력에 대한 어이없음이다.
 
정부는 한없이 '공손'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공손에 국민은 공손하게 응답할 것이다. 우리에겐 '부끄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사과해라. 2MB.
2008.07.03 16:42 ⓒ 2008 OhmyNews
#촛불시위 #질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