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여,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15] 가이낙스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록 2008.07.25 09:23수정 2008.07.2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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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의 등장인물들. 아야나미 레이(좌),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중), 이카리 신지(우) ⓒ 가이낙스



신세기 에반게리온, 애니메이션의 살아있는 전설


1995년 10월 4일 일본의 TV도쿄 방송에서 첫 전파를 타 1996년 3월 26일에 26화로 종영한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Neon Genesis EVANGELION)>. 이 작품의 감독은 1990년 NHK의 전파를 탄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애니메이션 회사 가이낙스(GAINAX)의 안노 히데아키. 과연 그는 앞으로 이 작품이 몰고 올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시리즈 전체의 경제효과 약 400억 엔(4000억 원), 2007년 현재 관련 상품 총 매출이 무려 1500억 엔(1조 5000억 원)을 넘어서는 전대미문의 기록이다. 구체적인 숫자로 보자면 LD, VHS, DVD를 전부 합한 판매 장수가 약 450만 장, TV 방영 주제가를 담은 CD가 100만 장, 원작 애니메이션을 만화책으로 낸 시리즈 11권까지의 누계가 1500만 부에 이른다.

이 외에 다양한 상품의 캐릭터로 사용되고 있으며, 관련 상품이 6000종이 넘고 해외에서 판매된 것까지 감안한다면 천문학적인 수치가 예상된다. 심지어 10년도 훨씬 더 지난
2007년 9월 극장판 '에반게리온: 서(序)'(2007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가 개봉되기도 했다. 이 <에반게리온: 서>의 DVD는 올 초 일본에서 발매됐는데 1주 만에 21만9000장이 팔렸다. 이는 일본에서 발표된 모든 DVD 중 단연 1위의 판매량으로 기록됐다. 1995년에 태어나서 아직까지도 애니메이션에 관한 모든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지만 단순히 화폐 단위로 그 영향력을 환산하는 것으로는 이 대작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커다란 로봇과 정의감 넘치는 멋진 조종사 주인공이 나와서 악의 무리와 싸워 활약하는 내용을 담은 소위 '슈퍼로봇물'은 하나의 장르가 형성될 정도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류를 이뤄왔다. 마징가 Z,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 철인28호 등 바다 건너 우리에게도 이미 친숙한 로봇들이 즐비하다. 압도적인 전력과 멋진 필살기의 로봇, 그리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비현실적' 정의감에 사로잡힌 주인공들은 청소년의 가슴에 닮고 싶은 '이데아'를 새겨 넣었다.

그런데, 1995년에 나타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기존의 슈퍼로봇물이 가진 모든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이전의 '비현실적' 정의감에 사로잡힌 엘리트 주인공은 그저 홀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애정결핍의 평범한 14세 소년 이카리 신지로 바뀌었다. 이전의 압도적인 전력과 멋진 필살기의 로봇은 불완전할 뿐더러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정체불명의 '에반게리온'으로 대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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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이카리 신지 ⓒ 가이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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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하는 에반게리온 초호기 ⓒ 가이낙스



이뿐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조차 가지지 못한 복제인간(이카리 신지 어머니의 클론)으로 에반게리온을 조종하는 아야나미 레이, 실험 중에 부인을 잃고 냉혈한이 되어 버린 이카리 겐도(이카리 신지의 아버지), 외모 출중에 성적은 우수하나 성격파탄자이면서 가정환경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에반게리온 조종사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연애조차 제대로 못하는 작전사령 카츠라기 미사토. 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어딘가 결핍되어 있고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 또한 범상치 않다.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침공하는 '사도'들과 그에 맞서 '에반게리온'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비밀기관 '네르프'. 하지만 사실 네르프는 사도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는 수상한 조직 '제레'의 하부기관이다. 수상한 종교적 상징들과 세기말적 분위기, 그리고 끊이지 않는 미스터리는 기존의 단순명쾌, 권선징악의 슈퍼로봇물 스토리와는 분명 대척점에 있다.

방영 초기에는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회가 거듭할수록 관심을 끌더니 마지막 25화와 26화에서는 전대미문의 사이코 드라마 연출로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오히려 방영이 끝난 후에 인기가 치솟아 급기야는 재방영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일본에서 사회현상으로까지 얘기되는 '에반게리온 신드롬'이 퍼지게 된다.

에반게리온, 오타쿠 신드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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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나미 레이의 피규어 ⓒ sabob.egloos.com


이러한 에반게리온의 신드롬의 중심에는 '오타쿠'가 있다. 오타쿠(オタク)는 특정 분야나 취미에 열중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마니아(mania)라는 개념이 해당 분야에만 열중한다는 의미다.

반면, 오타쿠는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서브컬쳐뿐만 아니라 '비슷한 계열의 상품'들, 예를 들어서 피규어, 프라모델, 일러스트집 등을 통해 인접 분야에도 열중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한국어의 '폐인'이 비슷한 어감의 단어라 할 수 있다. 폐인과 유사하게 오타쿠는 현실에서의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나, 실제 대부분의 오타쿠들은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는 한에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이 오타쿠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에반게리온의 등장인물들, 어딘가 결핍되고 트라우마를 안고 있으면서 편집증적이고 현실도피적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예전의 비현실적 정의감에 가득찬 주인공은 오타쿠들에게 '이데아'는 될 수 있었지만, 자신과 동일시하기에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등장인물들은 오타쿠들이 지닌 감정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 자신이었다. 자신과 닮은 불완전한 모습의 캐릭터가 에반게리온을 타고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오타쿠 자신도 현실에서 그러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희망과 기대감을 제공했다.

게다가 종교적 상징과 예언적인 수사들, 미스터리로 가득한 세기말적 분위기와 수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길 수 있는 스토리는 오타쿠들에게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거대한 캔버스를 제공했다. 세상과 거리를 둔 오타쿠들에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현실 도피적 쾌락을 맛볼 수 있는 신천지가 됐다. 그들은 열광하고 또 열광했다. 에반게리온에 대한 나름의 분석과 재창조를 실행한 엄청난 분량의 텍스트와 책들이 쏟아졌다. 갖가지 캐릭터 상품들은 나오는 즉시 오타쿠들에 의해 수집됐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이렇게 오타쿠들을 중심으로 대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 이유는 가이낙스와 안노 히데아키 감독 자신들이 한때 오타쿠였기 때문이었다. 그들 자신이 오타쿠였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오타쿠의 행동양식과 특징을 잘 알고 있었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기획단계부터 철저하게 오타쿠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1987년 가이낙스라는 이름을 걸고 야심차게 준비한 애니메이션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가 비평가들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참패했다. 가이낙스는 내부 논의 끝에 참패의 원인으로 오타쿠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으로 진단한다.

미소녀나 슈퍼로봇에 열광하는 오타쿠들의 이목을 끌기에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는 너무나도 진지하고 리얼한 '작품'이었다. 1989년에 오타쿠적인 요소를 가미한 <건버스터- 톱을 노려라>로 히트를 친 가이낙스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 이어 드디어 1995년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들어 낸다.

미소녀, 슈퍼로봇, 밀리터리, 동성애, 미소년, 미스터리, 패러디 등 오타쿠가 열광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한꺼번에 담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다시 없을 인기를 끌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주장이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TV시리즈 마지막 25화, 26화에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사실상 오타쿠들에게 꿈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하고 있다는 의견이 그것이다. 그 의견에 따르면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자신이 만든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단지 만들어낸 가상이고 그림일 뿐이라고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

오타쿠여,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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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사이코 드라마처럼 진행되는 에반게리온 25화 ⓒ 가이낙스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도망치는 거겠지
실패하는 게 무서운 거지?
남에게 미움받는 게 무서운 거지?
약한 자신을 보는 게 무서운 거지?
그런 건 미사토씨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래, 우리들은 모두 마찬가지야
마음이 어딘가에 빠져 있어
그게 무서운 거야
불안한 거야
그래서 지금 하나가 되려고 하고 있어
서로 보충해 주려고 하고 있어
그것이 보완계획

인간은 무리지어 있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어
자신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괴로운 거야
그래서 외로운 거야
그래서 마음을, 몸을 합치고 싶어해
하나가 되고 싶은 거로군
인간은 여리고 약한 것으로 되어 있어
마음도, 몸도 여리고 약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렇기 때문에 서로 보완해 가지 않으면 안돼

...(중략)...

확실히 에바 초호기는 네 자신의 일부야
하지만 에바에 의지하면 에바 그 자체가 네가 되어 버려
진짜 네 자신은 어디에도 없어져 버리는 거야

- <신세기 에반게리온> 내레이션 중

자신이 오타쿠였기 때문에 그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안노 히데아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로 인해 오타쿠들이 더욱 늘어나는 상황을 불편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용상 가장 중요한 최종화 25화, 26화에서 스토리를 마무리 짓지 않고 오타쿠들에게 일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압축하자면 다음과 같은 말이 아닐까?

"TV 앞에서 뭐하는 거야? 멍청이들아! 이건 가짜야. 그림일 뿐이라고.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하라고. 최소한 미소녀에 히히덕거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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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노 히데아키 감독 ⓒ 가이낙스

결국 에반게리온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등장하는 '인류보완계획'은 사실상 안노 히데아키의 '오타쿠 보완계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견이 사실이라면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이러한 의도는 완전히 실패한 듯하다. 이미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오타쿠 애니메이션'의 대명사가 됐다. 이후에 나온 수많은 애니메이션들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모델 케이스로 삼아 오타쿠들의 '오심(オ心)'을 흔들었고, 오타쿠들은 국경을 넘고 인종을 초월해 전 세계로 퍼져가는 추세다.

사실 중요한 것은 오타쿠가 급격하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조건이다. 학교에서는 무자비한 입시경쟁에 내몰리고, 졸업하면 비정규직이나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우울한 현실에서 젊은이들은 몸은 도피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이라도 도피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대리만족을 가능하게 만드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도피처다(물론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필자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한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원하는 오타쿠 보완계획은 어쩌면 입시경쟁의 세상, 비정규직과 실업자가 넘치는 막가파식 자본주의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오타쿠들의 인기를 받으며 크게 성공한 작품이면서도 그 안에는 오타쿠에 대한 날이 선 비판이 들어 있다. 굉장히 모순된 이 작품은 어쩌면 우리 세상이 매우 모순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에반게리온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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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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