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전가하려다 되치기 당하는 대륙의 자존심

[역사소설 소현세자 77] 범문정과 일합을 겨룬 소현

등록 2008.07.26 19:55수정 2008.07.2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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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심양 황성에 있는 남문이다
남문. 심양 황성에 있는 남문이다이정근

궁궐을 감싸고 있는 황성 4대문에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승전고다. 전선에 나가있던 홍타이지가 개선한 것이다. 송산소에 매복해 있던 명나라 군대 1만 여명이 청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초전에는 승기를 잡았으나 팔기군의 기동력에 전멸한 것이다. 황궁에서 승전 환영연이 베풀어졌다. 청나라의 초대를 받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참석했다.

황제가 전선에서 돌아왔는데 세자관에 할당된 잔치 일정은 잡히지 않았다. 관향에서 급히 보내온 670냥으로 구입한 잔치 물건이 무더운 날씨에 상하고 과일이 썩었다. 그렇다고 세자관에서 잔치 일정을 잡을 일도 아니었다.


세자 이하 관원들 모두가 애를 태우고 있는데 범문정이 세자를 불렀다. 빈객과 익위사 관원을 대동한 소현이 예부를 방문했다.

"봉림대군이 병문안을 다녀와도 좋다는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떠나도 좋소. 원손도 함께 가도록 하시오."

"황제의 명이 이러하니 감격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대군은 바로 내보내겠지만 원손은 병약하고 날씨가 무더우니 서늘한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출발시키려고 합니다."

동생은 병환에 시달리는 부왕 곁으로 빨리 보내고 싶었고 아들은 하루라도 더 곁에 두고 싶었다.

"황제께서 이미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시기를 선택하는 것은 세자께서 알아서 하시오."


"국왕을 곁에서 모실 사람이 없으니 봉림대군이 빨리 갔다 오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황제에게 아뢰어 보겠소."


조선 체류기간을 길게 잡아달라고 청했다. 자신은 상징적인 볼모이기 때문에 빨리 돌아와야 했지만 봉림대군은 병환에 시달리는 부왕 곁에서 오래오래 있기를 원했다. 부인도 함께 나가기를 기대했으나 봉림대군 혼자 나가라는 명이 떨어졌다. 황궁으로 봉림을 부른 홍타이지는 안장을 갖춘 말 1필과 여우 옷 1벌, 담비 옷 1벌. 가죽신 1켤레를 하사했다. 이어 팔왕 아지거가 자신의 집으로 봉림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돌려보내면 분노를 살 것 같아 마지못해 받았다

"저에게는 없는 것이 없으니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말씀해주시오."

"병중에 계시는 부왕을 뵙기 위하여 나가는 길이라 머지않아 돌아 올테니 필요한 게 없습니다."

봉림이 정중히 사양했으나 팔왕은 노자에 쓰라고 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를 주었다. 봉림은  사양하고 싶었으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세자관으로 돌아온 봉림에게 팔왕이 말 1필과 비단 1필을 보내왔다. 돌려보내면 팔왕의 분노를 살 것 같아 마지못해 받았다.

고국으로 떠나는 봉림대군이 세자에게 4배를 올렸다. 하직인사다. 사적으로는 형과 동생이지만 저하와 신하다. 예를 마친 봉림대군이 세자관을 나섰다. 대군 별감이 앞장서고 대군 사부 서원리가 그 뒤를 따랐다. 대군 군관들이 호위하는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렬을 따르는 수레에는 예부에서 보내온 찬물 여섯 상자와 쌀 1포대도 실려 있었다.

귀국길에 오른 봉림은 기뻤다. 가면 되돌아와야 하는 볼모길이지만 우선 숨 막힐 것 같은 심양을 벗어난다는 것이 좋았고 고국에 돌아간다는 것이 가슴 설레었다. 봉림대군이 고국으로 떠난 후, 피파박시와 용골대를 대동한 범문정이 세자관을 찾아왔다.

"임경업이 지휘하는 수군을 앞으로 전진하게 하였으나 전진하지 않았고 요하 하구에 군량을 내려놓으라 하였으나 쌀부대를 부리지 않았소. 이럴 수 있습니까?"

"오랫동안 수군 소식을 몰라 관중은 물론 본국에서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 기별을 알게 되어 다행스럽습니다."

소현은 능청스럽게 범문정의 예봉을 피했다. 청나라에 징발된 조선 수군이 해주를 출항했다. 지휘관은 수군 상장으로 임명된 임경업이었다. 그러나 해주 앞바다로 나간 선단이 연락두절 오리무중이 되었다. 당황한 조정은 초탐선(哨探船)을 내보내 수색했으나 선단을 발견하지 못하고 회항했었다.

"전날 육군을 징발할 때도 제때에 맞춰 들어오지 않아 노한 마음을 참고 있었소. 조선 수군이 우리의 명령을 듣지 않아 낭패스러우니 세자관의 조처가 있어야 할 것 같소."

"본국에서 보낸 군대의 지휘권은 대국에 있소. 거기에 세자가 개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오."

적개심에 불타는 장수와 병사들

해주를 출항한 조선 수군은 연안을 따라 금주 앞바다에 도착했다. 명나라의 전선과 부딪치면 접전을 피하고 2선으로 물러났다.

'이번 출전은 육군과 수군이 한꺼번에 나아가 성새를 보이려는 것이니 명나라 병선을 만나면 접전하지 말라.'

정명수를 통한 황제의 밀명도 있었지만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임경업으로 하여금 소극적으로 대처하게 했다. 병자호란 당시 의주부윤이었던 임경업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이 뼈에 사무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로 받들던 명나라에 칼을 겨누는 것은 배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임경업뿐만 아니라 조선 사대부들의 정서였고 병사들이 징발 전투에 임하는 기본 생각이었다.

"금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전선에 결전이 임박하여 수군 중에서 1천명을 뽑아 육전에 쓰고 나머지 4천명의 군병은 돌려보낼 생각이오. 전투에 나서는 1천 병사의 옷과 식량을 때맞춰 보내야 할 것이고 그들이 탈 말 1천 필도 보내야 할 것이오."

"식량은 배에 실려 있는 군량이 적지 않으니 그것을 가져다 쓰면 될 것이고 수군 포병은 보군과 달라 말에 익숙하지 않으니 따로 전마(戰馬)를 뽑아 오지 않아도 될 것이오."

"세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곁에 있던 피파박시가 소현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쓰지 않은 군병을 돌려보내는 여부와 시기를 조선에서 선택하시오."

"본국의 회답을 구하기 위하여 먼 거리를 왕복하는 동안 4천명의 군병이 쓸데없는 군량만 축낼 것이니 빨리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오. 회군의 군권은 오직 대국에 있으니 본국의 회답을 구할 필요가 없을 듯 하오."

"세자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피파박시가 거듭 소현의 의견에 동조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불쾌한 눈초리로 피파박시를 노려보던 범문정이 시선을 소현에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매미.  적송에 붙어있는 매미
매미. 적송에 붙어있는 매미이정근
"조선군은 왜 싸우려 하지 않는 것이오?"

"전장에 나간 군사의 진퇴는 장수의 소관이거늘 관중에서 어찌 알겠습니까?"

"임경업은 눈앞에 명나라 병선 38척이 있었으나 그들과 싸우지 않고 꽁무니를 뺐소. 조정의 분부에 따라 명나라 사람들과 내통하여 그런 것이 아니오?"

"본국에서 힘을 다해 병사와 무기를 보내놓고 어찌 다른 뜻을 두겠습니까. 임금이 장수를 정해 국경 밖으로 내보냈으면 나아가고 들어오는 것과 이기고 지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있습니다. 이를 어찌 본국의 전하께서 진퇴와 승패를 통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소현의 목소리는 칼칼했다. 세자관 집무실을 뒤덮고 있던 습하고 무더운 공기가 서늘해졌다. 청나라 조정을 떠받치고 있는 문무의 대가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어디에선가 무더위를 날려주는 매미소리가 들렸다. 고국에서 가져온 금강송에 붙어있던 매미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허물을 세자관에 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곡절을 알리려는 것뿐이오."

명나라 수군이 건재한 것으로 판단한 청나라는 조선 수군을 징발했다.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가야하는 청나라에게 명 수군은 걸림돌이었다. 금주 앞바다에서 명나라 수군을 시험한 결과 청나라는 오판을 절감했다. 명나라 수군은 도망과 투항으로 궤멸직전이었던 것이다. 작전실패를 조선에 전가하려던 범문정의 술수는 소현세자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소현세자 #범문정 #심양 #피파박시 #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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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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