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명이오! 조선은 식량과 군마를 보내시오"

[역사소설 소현세자 78] 거세어지는 식량독촉... 쓰러진 왕세자

등록 2008.07.28 18:53수정 2008.07.2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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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관. 세자관으로 알려진 심양아동도서관. ⓒ 이정근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 짝을 찾아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잦아들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원손을 내보내는 일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늦어지면 일찍 찾아오는 추위가 천칠백리 머나먼 여정에 고생길이다. 삼복 무더위에 늘어졌던 세자관 노복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국 채비를 마친 원손이 소현세자에게 예를 갖추었다.

"저하! 강녕하시옵소서."


다섯 살배기 어린 꼬마지만 궁중의 법도가 배어 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엎드려 절하는 모습이 앙증맞고 귀엽다.

"몸성히 잘 가거라. 원손."

석철의 하직인사를 받는 소현은 목이 메었다. 저 어린 것을 어미 곁에 두지 못하는 아비. 참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세자에게 4배를 올린 원손이 강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빈궁마마!"

빈궁과 신하의 예법이다. 원손은 임신이 무엇인지 모른다. 내관들이 가르쳐준 대로 인사말을 올린 것이다.


"석철아!!"

본능적인 모자의정 때문에 궁중법도를 깬 강빈

강빈은 법도를 깨버렸다. 거추장스러운 궁중법도를 벗어던지고 본능적인 어머니로 돌아간 것이다. 석철을 껴안은 강빈은 하염없이 흐느꼈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훔쳤다. 타의에 의해서 헤어져야 하는 엄마와 아들. 모정을 갈라놓은 현실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빈궁마마! 원손 아기씨가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은 친정동생 강문명이었다. 우의정으로 있는 강석기의 질자로 강문벽이 들어왔고 세자 볼모생활 시초부터 근무했기 때문에 교대하여 나가면서 원손배행 책임을 맡았다.

재신 오준이 인솔한 원손 행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원과 노복들이 허리를 굽혀 원손 원행의 안녕을 빌었다. 떠나가는 원손을 바라보던 강빈은 가마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날씨가 서늘해졌지만 세자관에 할당된 잔치는 열리지 않았다. 속이 타는 것은 세자와 관원들. 준비한 음식이 부패하고 과일이 썩어 문드러졌다. 세자관에서 본국에 장계를 올렸다.

"잔치 문제를 해당부서에서 황제께 아뢰었으나 아직 날짜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관향에서 보내온 720냥으로 잔치에 쓸 물건을 사들였으나들 벌레 먹고 상해서 쓸 수 없는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남아있는 여유 돈에서 보대평고 속량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주는 예부 관리가 포로 하나를 속량해주기를 청하여 지불하고 나니 1백 냥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앞날이 답답합니다."
- <심양장계>

조선을 도와주려는 청나라의 고위 인사들

원손이 고국으로 떠난 후, 팔왕이 사람을 보내왔다. 빈객은 팔왕전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세자의 허락을 받은 빈객이 팔왕전을 방문했다.

"지난번 보군을 징발했을 때 피로하고 지친 자들을 보내 우리의 진격에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이번 수군은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반수 이상이 파도에 휩쓸렸다. 뿐만 아니라 식량을 실은 배 세 척이 적진에 투항하였다고 한다. 어찌된 일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선군의 행태를 가지고 황제와 여러 왕들이 심각하게 논의했다. 내가 '조선군은 정예하지 못하고 멀리 바닷길을 오면서 태풍을 만나 그럴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를 싫어하는 법이니 누가 일부러 죽을 곳으로 빠져 들었겠느냐'라고 말씀드려 황제의 진노가 풀렸다. 이번 일은 이렇게 지나간다 해도 앞으로 징발하는 일이 또 있을 텐데 이와 같이 한다면 전날 일과 아울러 중한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정성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께서 분부하시는 일을 세자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본국에 알려야 한다'고 하며 회피하고 있다. 이것을 황제께서 매우 불쾌하게 여기신다. 이후로 황제의 명이 있으면 모름지기 이런 뜻을 잘 알아서 응답하여 근심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명심하여 전하겠습니다."

승전국과 패전국. 상국과 조공국. 청나라와 조선은 분명히 입장이 달랐지만 조선을 이해하려는 고위급 인사들이 있었다. 팔왕과 도르곤이다. 팔왕은 봉림대군 귀국길에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다. 그들의 친절이 고도의 강온 양면작전인지 아직 모른다.

조선은 황제의 명을 따르는 일만 남았소

조선 수군을 징발하여 명나라 수군과 일전을 벌이려던 작전실패를 조선에 떠넘기려다 소현세자에게 완패당한 범문정이 용골대를 비롯한 청나라 장수들을 대동하고 세자관을 찾아왔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황제의 명이오."

범문정이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애써 위엄을 부렸다.

"조선 국왕은 수군 영장을 잡아가서 벌을 내리고 다른 장수를 보내야 할 것이오."

"임경업이 고의로 군법을 어긴 죄가 있다면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본국에 황제의 뜻을 전하겠소."

"수군에서 보군으로 전용한 정군 1000명과 짐을 나를 복직군(卜直軍) 500명이 먹을 식량과 옷을 빨리 보내오도록 하시오. 포수는 말을 다룰지 모른다 하지만 짐을 나를 땐 말이 필요하니 말도 보내시오."

"본국에서 수군을 보내는 데 진력을 다하여 식량을 마련하기가 어려우울 뿐 아니라 설혹 마련한다 해도 수천리 밖에서 말과 인부로 1500명분의 식량을 실어 와야 할 텐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의복의 경우는 군병들의 고을 수령에게 공문을 보낸 뒤에 그들의 집에서 의복을 마련하여 보내와야 할 텐데 추위가 닥치기 전에는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돌려보내는 군병들 가운데 병들고 지친 자와 심지어 돌림병에 걸린 자들도 있는데 군량을 다 나른 후에 돌아가게 한다면 인정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대국의 선처를 부탁합니다."

"일없소. 황제의 명이오. 조선은 식량과 군마와 의복을 보내오는 일만 남았소."

소현세자와 얘기가 길어지면 또 무너진다고 생각했을까? 범문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장수들을 데리고 세자관을 빠져 나갔다. 소현은 난감했다. 본국을 대신하여 막아선다고 될 일이 아닐 것 만 같았다. 범문정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 소현은 선전관 송사호를 임경업 장군 진중에 보내 현황을 파악했다.

묘책은 있으나 운송비용이 난감하다

"해주위의 우리 병선에 3800섬의 군량이 실려 있으니 이를 의주에 하역하여 심양으로 수송하면 저들이 요구하는 식량 명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운송수단이 없어 세마(貰馬)와 수레를 빌려 써야 하는데 수레 1대에 3섬씩을 실으면 1275대의 수레가 필요하고 1필에 20말씩을 싣는 말로 계산하면 2868마리의 말이 필요합니다. 의주에서 심양까지 1필의 말을 세내는 값이 무명 2필이니 돈으로 계산하면 2만1510냥입니다.

또한, 군병의 의복과 가죽신은 남아있는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겨울을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수들이 탈 말은 스스로 마련할 사람들이 없으니 제가 병사(兵使) 때 역참에 은닉해 두었던 역마 80필이 있으니 그 중에서 30필을 들여오면 아쉬운 대로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전관을 통하여 임경업의 보고를 받은 소현은 식량수송문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허나 막대한 운송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본국에서 선박편을 이용하여 금주위로 직행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본국에 쌀이 없다. 임경업의 묘안처럼 군량을 식량으로 변통한다 하더라도 운송비가 태산이니 아득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혼자 고민하고 있을 일도 아니었다. 빈객으로 하여금 본국에 장계를 올리라 명했다. 며칠 후, 범문정이 다시 찾아왔다.

"군량을 실어 나를 말은 언제 들어옵니까?"
"조선의 물자사정으로는 갑자기 많은 수효의 말을 징발하기가 어렵습니다. 장수가 탈 말과 군병의 의복을 실은 말이 머잖아 들어 올테니 이 말을 보태서 군량을 실어 나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 마리의 말로 수 천섬의 식량을 어떻게 나른단 말이오?"
"우리가 말을 세내거나 수레를 빌려 쓸 수 있도록 아문에서 도와주십시오."

"돈 가치가 없어 세차(貰車) 세마(貰馬) 비용이 2만 냥이 넘게 드는데 감당할 수 있겠소?"
"그래서 아문의 협조를 부탁드리는 것 입니다."

"우리는 알바 아니오. 사람이 져 나르던, 말에 실어 나르던 때에 맞춰 옮겨놓기만 하시오. 혹시라도 지연되면 중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조선의 장래가 달려 있소."

범문정이 돌아갔다. 집무실에 홀로 앉은 소현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말과 식량은 들어와야 한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던 고국의 사정이 녹녹치 않다.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목이 뻣뻣해지고 혀가 말라 왔다. 오른쪽 다리가 저리고 마비증세가 왔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현기증이다. 결국 소현이 쓰러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의관 박군과 정훤이 처소로 옮기고 가입퇴열탕(加入退熱湯)을 올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소현세자 #범문정 #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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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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