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유배 길 만큼이나 어렵게 찾아간 장릉

[강의식 교육과 현장 답사를 병행한 자연유산 공부] ⑥ 장릉가는 길

등록 2008.08.10 11:33수정 2008.08.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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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이도 검룡이도 자신을 보여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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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룡소 가는 길의 선돌 ⓒ 이상기

검룡소 가는 길의 선돌 ⓒ 이상기

 

지난밤 비가 끝없이 내렸지만 그나마 숙소가 넓고 쾌적해서 다들 잠을 잘 잘 수 있었다. 아침 6시쯤 일어나 TV를 보니 밤새도록 비가 와 곳곳에 물난리가 나고 야단이다.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니 벌서 오늘 일정 이야기로 말이 많다. 오늘 첫 답사지가 미인폭포인데 그곳으로 가는 길에 물이 넘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답사지를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로 바꿀 예정이라고 한다. 비가 오면 수량이 늘어 미인폭포가 장관일 텐데 아쉽다. 그나마 검룡소에를 가볼 수 있다니 다행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차는 검룡소로 출발한다. 그런데 오늘도 빗줄기가 보통이 아니다. 모두들 오늘의 답사 진행에 대해 불안해한다. 우리 답사팀장은 여기저기 전화를 거느라고 정신이 없다. 차는 소도천 변으로 나 있는 31번 국도를 따라 가다 황지천을 만나면서 좌회전해 상류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태서교를 지나 우회전해 35번 국도로 들어선 다음 구봉산을 지나 피재(820m, 삼수령)를 넘는다. 이곳 피재의 다른 이름이 삼수령인데 그것은 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오십천의 물길이 이곳에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삼수령을 넘어 우리는 골지천을 따라 내려간다. 4㎞쯤 갔을까, 창죽교가 나오고 차는 좌회전해 골짜기 길로 들어선다. 이 길을 계속 따라가면 거의 끝쯤에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가 있고 그 물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금대봉(1418m)에 이르게 된다. 차는 6㎞쯤 들어가 주차장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모두들 우비와 우산으로 단단히 차비를 하고 검룡소를 향해 간다. 산길 입구 선돌에 검룡소라는 검은 글씨가 선명하다.

 

다행히 이곳 태백시 해설사가 우리를 검룡소까지 안내하기로 하고 앞장을 선다. 그는 조금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검룡소까지 갈 것을 권한다. 그런데 500m쯤 갔을까, 검룡소 가는 길 위로 물이 철철 넘쳐흐른다. 비가 많이 와 길이 바로 물길로 변한 것이다. 우리를 이끄는 정성조 팀장이 안전을 위해 철수할 것을 제안한다.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만약 비가 더 와 길이 유실된다면 이건 정말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항재를 넘다 만난 운무의 함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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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의 함백산 1 ⓒ 이상기

운무의 함백산 1 ⓒ 이상기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다시 차로 돌아온다. 그 사이 비가 어찌나 세차게 오는지 바지고 신발이고 물에 흠뻑 젖었다. 차에 돌아온 나는 바지와 양말을 갈아 신는다. 물로 인해 척척하던 몸이 그나마 개운해진다. 차는 다시 다음 행선지인 장릉을 향해 출발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 태백시로 해서 38번 국도를 따라 싸리재를 넘는다. 옛날에는 싸리재가 정말 구절양장이었지만 이제는 터널이 나 쉽게 넘을 수 있다.

 

싸리재를 넘어 고한읍에 가까이 갔는데 길이 끊어져 영월로 가기 위해서는 만항재를 넘어 31번 국도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31번 국도를 타고 화방재를 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든다. 고한에서 화방재에 이르는 414번 지방도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도를 달리는 도로이다. 정점인 만항재는 해발이 1330m이다. 1330m라면 웬만한 산보다 높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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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의 함백산 2 ⓒ 이상기

운무의 함백산 2 ⓒ 이상기

 

그런데 우리가 정말 어렵게 이 고개를 넘는지 알았던지 함백산이 운무 속에 잠깐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산줄기 곳곳에는 하얀 구름이 걸려 있고 정상을 이루는 봉우리 세 개는 신성하기까지 하다. 함백산은 해발이 1572m로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태백산의 높이는 1566m이다. 높이로는 함백산이 형님인 셈이다. 그래서 이름도 태백과 소백을 포함한다는 뜻인 함백산(含白山)이 되었다.

 

함백산 주변은 높은 산인데도 도로가 거미줄처럼 나 있다. 그것은 과거 이 주변에서 석탄이 채굴되었기 때문이다. 함백탄좌, 동해광업소, 상동탄광 등 옛날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광산들 이름이 생각난다. 만항재를 넘어 굽이굽이 길을 내려온 우리는 옥동천을 따라 나 있는 31번 국도를 따라간다. 이 길에는 상동읍과 중동면이 있다. 우리는 점심을 중동면 소재지인 녹전리에서 먹도록 예약이 되어 있다. 

 

소박한 점심도 먹고 옥수수 복숭아도 먹고

 

중동에 도착하니 치안센터도 보이고 농협도 보인다. 그나마 면소재지라고 그래도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음식점에 들어가 그동안의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점심을 먹는다. 어른들이야 이런 폭우를 여러 번 보았지만 애들은 익숙치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함께 온 엄마들이 자식들을 열심히 챙겨준다. 점심을 먹고 차는 다시 영월을 향해 출발한다.

 

31번 국도가 이제는 옥동천을 멀리하고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수라리재로 이어진다. 차는 이 길을 따라 석항리에 이른 다음 옥동천을 따라 간다. 이 길은 31번과 38번 국도가 만나는 곳으로, 만약 길이 끊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신동쪽에서 오는 38번 국도를 타고 석항리로 왔을 것이다. 길은 이제 석항천을 따라 영월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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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 지역을 흐르는 큰 물 ⓒ 이상기

청령포 지역을 흐르는 큰 물 ⓒ 이상기

 

그런데 석항천의 물 흐름이 대단히 빠르고 무섭다. 상류에서 내린 비를 모두 담아 흐르기 때문이다. 흙탕물에 수위도 높고 파도도 높고 속도도 빠르다. 다행히 제방까지는 여유가 있어 범람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나마 점심을 넘으면서 빗줄기가 조금은 약해지는 것 같아 다행이다.

 

가다가 보니 마침 길가에 옥수를 쪄서 파는 좌판이 보인다. 애들이 먹고 싶어 했는지 아니면 어른들이 원했는지 차가 선다. 그리고는 옥수수를 사고 복숭아를 산다. 그런데 옥수수는 쪄 놓은 게 그리 많지를 않아 사람 수만큼 살 수가 없단다. 이런 시골에서 팔리는 양이 많지를 않을 테니 적게 쪄 놓을 수밖에. 우리는 옥수수를 두 사람에 하나씩, 복숭아를 한 사람에 하나씩 배당받는다. 별 맛은 없지만 그래도 맛을 보게 하려는 그 정성이 대단하다. 이게 바로 여행하면서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다.  

 

장릉에 얽힌 정사와 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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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묻혀있는 장릉 ⓒ 이상기

단종이 묻혀있는 장릉 ⓒ 이상기

 

영월 시내에 접어들면서 차는 정선에서 내려오는 동강을 지나 장릉으로 향한다. 장릉, 조선 6대 임금 단종이 묻힌 곳이다. 안타까운 단종 이야기는 청령포에서 하기로 하고 이곳에서는 오로지 장릉에 얽힌 이야기만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영월 사람들은 이곳 장릉을 단종의 얼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정확히는 단종의 넋이 땅 속에 묻혀 있고 단종의 혼이 떠도는 곳이다.

 

단종은 노산군이 되었다가 서인(庶人)으로 격하된 다음 1457년(세조 2) 10월 21일 영월군의 객사인 관풍헌에서 죽는다. 당시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서인이 된 단종의 주검을 거둘 수가 없었다. 오로지 영월 호장으로 있던 엄흥도(嚴興道)만이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서북쪽 산으로 들어가 그곳에 시신을 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종대왕 행록(行錄)」에는 “단종이 죽자 호장 엄홍도가 통곡하면서 관을 갖추어 이튿날에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고을 북쪽 5리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고 나와 있다.

 

이후 단종의 무덤은 중종 11년(1516) 왕명으로 찾게 될 때까지 방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종은 12월 10일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단종 묘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신상은 치제(致祭) 후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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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 ⓒ 이상기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 ⓒ 이상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된다.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다.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고 한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중종실록』: 중종 11년(1516) 12월10일>

그리고 숙종은 1681년(숙종 7년) 7월 경연관 이민서의 제의로 서인이었던 단종을 노산군으로 추봉되고 8월에는 우부승지 송창을 보내 제사지내게 한다. 1698년(숙종 24년)에는 숙종대왕의 윤음(綸音)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된다. 숙종대왕이 내린 비망기(備忘記)에 보면 ‘세조가 노산군을 죽이게 된 것은 세조의 본뜻이 아니었다. 그 근본 원인이 사육신에게 있었고 그 사육신들의 충절이 포상을 받은 지금 단종을 명나라의 예에 따라 복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단종의 복위가 세조의 성덕을 훼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빛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묘호(廟號)가 단종(端宗)이고 능호(陵號)는 장릉(莊陵)이며 시호(諡號)는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이다. 그리고 1704년(숙종 30)에는 단종 재위 3년간의 기록인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으로 바뀌게 된다. 숙부에 의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지 4반세기 만에 단종은 다시 왕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넋과 혼이 장릉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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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대왕 영정 ⓒ 이상기

단종대왕 영정 ⓒ 이상기

“내가 생각하기로는 세조[光廟]께서 선위(禪位)를 받으신 초기에는 노산 대군(魯山大君)을 존봉(尊奉)하여 태상왕(太上王)으로 삼았고, 또 한 달에 세 번씩이나 문안하는 예(禮)를 시행하였다. 불행하게도 마지막에 내린 처분은 아마도 세조의 본뜻이 아닌 듯하며, 그 근원을 추구해보면 육신(六臣)에게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육신이 이미 정포(旌褒)되었는데, 그들의 옛 임금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것은 또 다시 어떤 혐의와 장애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명나라 경태제(景泰帝)의 일은 비록 서로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역시 본받아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제 추복하게 되면, 이는 세조의 성덕(盛德)에도 더욱 빛이 있을 것으로 여긴다. 아! 지난날 신규(申奎)의 상소를 반도 읽기 전에 슬픈 감회가 저절로 마음속에 간절해져, 일찍이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거론했다는 것으로써 털끝만큼이라도 불평스러운 생각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연석(筵席)에서 먼저 묻게 된 까닭이었다.

 

아!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은 서로 그렇게 먼 것이 아니니,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열락(悅樂)하여 이렇게 서로 감동할 이치가 있었던 것인가? 소원(疏遠)한 신하로서 지극히 중대한 일을 거론하게 되었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일을 끝내 시행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아! 천자(天子)나 왕가(王家)의 처사(處事)는 필부(匹夫)와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혹 판단에 의해 결정하고 논의에 구애받지 않는 경우도 옛부터 있었으니, 진실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찌 반드시 의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속히 성대한 의식을 시행하도록 하라.”

                                    <『숙종실록』 숙종 24년 무인(1698) 10월24일(을축)>

2008.08.10 11:33 ⓒ 2008 OhmyNews
#검룡소 #함백산 #만항재 #단종 #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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