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없는 내 소설 <제국과 인간>을 100회째 올리며

[창작노트] 이제 가을도 왔으니, 소설 좀 읽으면 어떨까요

등록 2008.08.15 17:29수정 2008.08.15 17:29
0
원고료로 응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는 모든 것이 새로우면서도 친숙하고,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가 된다. (게오르크 루카치, <소설의 이론>에서)

 

루카치가 말하는 행복한 시대란 그리스 시대를 가리킨다. 루카치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리스 시대를 인간 소외가 없는 이상향으로 간주했다.

 

나는 그리스 시대라고 해서 유달리 인간의 삶이 행복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 시대라고 해서 창공의 뭇별이 유달리 반짝일 리도 없을 뿐더러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다고 생각 들지 않는다. 또한 시대가 행복하다고 해서 그 시대 인간의 삶이 곧장 행복한 것도 아니다. 어느 면에서 인간의 삶이란 불행한 시대일수록 더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다고 본다.

 

풍요로운 도시의 저녁에는 아름다운 황혼이 없다. 척박한 대지일수록 황혼은 장엄하게 물들여지는 법이다. 우리가 나라와 자유를 빼앗긴 식민지 시대는 지극히 척박한 시대였다. 그래서인지 이 시대에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꽃피운 인물이 의외로 많았다.

 

악몽의 시대를 아름답게 살다 간 사람들 

 

오늘(15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소설 <제국과 인간>의 100회째를 올린다. 내가 이 소설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식민지 시대라는 척박한 세월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한 인물들을 재현하는 일이었다. 1편 ‘상해의 영혼들’의 신규식과 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의 정정화와 3편 ‘열두 개의 눈동자’의 장준하가 그들이다. 물론 그들은 역사상 실제 인물들이다.

 

이와 함께 그들과는 기질적으로 완전히 상반되지만 아름다움과 장엄함에서는 그들에 손색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1편의 김태수와 2편의 김문수와 3편의 임주호가 그들이다. 이 세 사람은 물론 허구적 인물들이다. 하지만 나는 허구적 인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역사가 기억하고 있지 않을 뿐, 그들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살았던 무명의 인물들이 실제로는 적지 않게 있었으리라는 하는 믿음 때문이다.

 

오늘로 100회째이니 연재 목표량의 반쯤이 세상에 나온 셈이다. 우리 국민은 친일 청산 또는 식민지 청산에 관심이 대단히 높다. 하지만 이 숭고한 관심이 지나치게 구호로만 외쳐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친일청산은 구호보다는 콘텐츠로 해야

 

이것은 지난 반 년 동안 소설을 연재하면서 내가 유감스럽게 느낀 점이다. 친일청산이란 구호보다는 콘텐츠로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식민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사 연구는 매우 피상적이고 실적 위주이다. 그러다 보니 순수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적다.

 

지금 뉴 라이트를 비롯한 비 민족 세력들은 부단히 우리의 독립운동의 역사를 흠집 내고 있다. 심지어 독립운동 연구에 식민사관의 영향이 미치고 있기까지 하니 이는 사뭇 개탄할 만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 진실을 말하는 데 소설은 부적합한가

 

오마이뉴스의 독자들은 대단히 생동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 민감하며 진실을 원망(願望)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처럼 비현실적인 것에는 관심이 적어 보인다. 물론 모든 소설은 ‘거짓말’이다. 내 소설의 관객이 적은 것은 식민지 시대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데 소설은 부적합하다는 독자들의 인식도 한몫 했으리라고 본다.

 

소설이 가치가 없다고 보는 이유는, 소설은 ‘비현실’ 또는‘거짓말’이기 때문일 터이다. 따라서 현실을 제대로 알기도 어려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조작된 비현실이나 거짓말까지 읽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이 아닌 논문이나 역사는 진실인가? 진실은커녕 사실조차도 제대로 담지 않은 허튼 논문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역사에는 진실 또는 사실이 담보되어 있는가? 우리가 아는 대로 역사란 승자의 기록물이다. 어쩔 수 없이 패자는 폄하되고 승자는 상찬되는 속성을 띠는 것이 역사물이다. 일례로 과연 왕건은 중후한 창업군주이고 궁예는 괴팍한 독재자였을까?  아닐 수도 있다. 왕건은 승자이고 궁예는 패자일 따름이다. 역사란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 취사선택되는 기록일 뿐이다.

 

이로 보아 역사는 사실이라고 말해 놓고서 하는 거짓말이다. 따라서 역사는 패자인 독립운동가들을 부단히 폄훼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 패자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독립운동사에도 이런 약육강식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같은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지금 승자들의 구미에 맞는 인물들은 부각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인물들은 과소평가되거나 외면된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구한말 사재를 털어 상해로 건너 가 동제사를 만든 신규식 선생은 임시정부 창업의 제1인자이다. 그는 임정 수립 후 보직을 사양하다가 이승만으로 인해 분열된 임시정부의 수습을 위해 국무총리 겸 법무장관 직을 맡았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헌신적이고도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중국무관학교에 보내 양성한 독립운동가의 수는 최소 60명이 넘는다. 그 중에는 민필호도 있고 이범석도 있다. 그는 지극히 한국적인 교양인이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분열하고 위축되자 단식으로 호소하다가 운명하고 말았다. 해방 후 이승만이 받은 훈장은 대한민국장인데 신규식의 것은 그보다 아래인 대통령장이었다. 이처럼 역사란 승자를 우대하고 비승자를 홀대한다.

   

반면 소설은 처음부터 거짓말이라고 말해 놓고서 하는 거짓말이다. ‘사실인 체하는 거짓말(역사)’과 ‘거짓이라고 미리 까놓고서 하는 거짓말(소설)’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을까? 아니면 어느 것이 더 무가치할까? 무엇보다도 사실인 체하는 거짓말의 실상을 까발리는 데에는 거짓말의 방법 이외에는 도무지 없는 것을 어떻게 하랴?

 

연재를 시작할 때 나는 ‘제국주의에 도전한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다룸으로써 온전한 친일청산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부작 4,000장 분량을 허술하지 않게 쓰겠다고 약속했다. 지금 2,000여 장 진도가 나갔으니 처음 약속을 반쯤 실천한 셈이다.

 

일제의 정치적 침략에 초점을 맞추면서 임시정부의 창업 과정을 그린 1편 ‘상해의 영혼들’은 지난 6월에 끝을 맺었고, 지금은 일제의 문화적 침탈에 초점을 둔 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를 연재하고 있다. 2편에는 중국의 서단 중경까지 쫓겨나야 했던 임시정부의 기구한 운명이 펼쳐진다. 이런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아줌마’ 정정화와 청년 독립운동가 김문수 등이 주요 인물이다.

 

가을쯤에 시작될 3편 ‘열두 개의 눈동자’에서는 일제의 사회적 침략을 다룬다. 여기에는 태평양전쟁의 실상과 함께 우익 독립운동가 장준하와 좌익 독립운동가 이강국의 역동적인 삶이 그려질 것이다. 그리고 미국 원자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성 물리학자 임수경의 삶이 소개된다.

 

가을도 왔으니 소설 한 번 읽어 보시지요

 

연재를 시작하면서 미미했던 독자 수는 다행히 반년 만에 두세 배 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 소설은 여전히 독자들에게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설을 올릴 때 가끔 관객 없는 무대에서 헛동작을 하고 있는 배우처럼 외로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불평하는 작가는 더 외로워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 소설을 외면하는 독자들에게, 그저 대수롭지 않게, “이제 가을도 되었으니 소설 한 번 읽어 보시지요.”라고 권유한다.        

덧붙이는 글 |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최근 조선 성종 때에 중국으로 표류해 간 날카롭고 명민한 유학자 최부의 삶을 그린 소설 <오백년 동안의 표류>(어문학사)를 출간했습니다.

2008.08.15 17:29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최근 조선 성종 때에 중국으로 표류해 간 날카롭고 명민한 유학자 최부의 삶을 그린 소설 <오백년 동안의 표류>(어문학사)를 출간했습니다.
#소설 #제국과 인간 # 임시정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윤석열 대통령 태도가...' KBS와 MBC의 엇갈린 평가
  2. 2 5년 뒤에도 포스코가 한국에 있을까?
  3. 3 윤 대통령 95분에서 확인된 네 가지, 이건 비극이다
  4. 4 6자로 요약되는 윤 대통령 기자회견... 이 노래 들려주고 싶다
  5. 5 누드사진 강요에 '업둥이'까지... '미녀와 순정남', 진짜 괜찮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