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소리나게 힘든, 설악산을 만나다

강원도 여행 (1) 설악산 등반

등록 2008.08.18 08:57수정 2008.08.1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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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을 만나다 힘들게 올라오던 천불동 계곡~ 드디어 전망이 드러나기 시작하고...공룡능선이 조망된다~ ⓒ 이명화


우린 마치 이제 막 수학여행 온 사춘기 소년 소녀처럼, 혹은 신혼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즐거워한다. 집을 나서 길 위에 차를 올려놓고부터 끝도 없을 것처럼 이어지는 길, 길 위를 차로 달리며 가슴 설렌다. 지도상으로 보면 경남 양산에서 강원도 속초는 끝에서 끝, 극에서 극이다. 우리는 먼 길 여행을 나선 것이다.

첫째 날( 8.11 .월), 설악동 야영장


설악산(해발 1708미터)은 '신성하고 숭고한 산'이라는 뜻에서 예로부터 설산, 설봉산, 설화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금강산을 서리뫼라고 한 것과 관련해 우리말로 '설뫼'라고도 하였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라산(1950미터), 지리산(1915미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설악산을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 않다. 하룻길을 달려왔다. 설악동 야영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6시 10분이었다. 아침에 출발해 저녁에 도착했다. 참으로 먼 거리다.

설악산국립공원 내에는 마을과 상가, 노래방, 모텔, 은행, 동사무소, 민박집, 카지노 등 모든 시설을 다 갖추고 있다. 야영장에 자리를 잡고 남편은 텐트를 친다. 주차비 2000원, 야영비 3500원, 샤워비 1인당 1000원이다. 야영장 시설은 넓고 깨끗하고 아주 잘 되어 있다. 설악동 야영장은 9만7670제곱미터, 취사장 6동, 화장실 4동, 샤워장 3동, 매점 1동, 매표소 1동, 관리동 1동, 운동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야영장은 마치 크고 넓은 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다. 잔디와 풀밭으로 되어 있는 넓은 야영장에 텐트를 친다. 화장실도 아주 깨끗하고 샤워장에 물은 얼음처럼 차고 콸콸 흘러 물 걱정이 없다. 마치 공원처럼 넓은 야영장 군데군데 나무그늘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야영하고 있다. 혹시 텐트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이곳 야영장에 쳐놓은 유료 텐트를 이용할 수 있다. 텐트를 다 치고 나니 6시 45분이다.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든다. 저녁을 먹은 뒤 속초 시내에 들러 필요한 물품들을 몇 가지 구입한다. 속초 시내 대형할인점은 여행객들이 몰려 성수기를 누리고 있는 듯하다. 국립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속초 시내의 해감내 풍겨오는 바다를 낀 떠들썩함과는 다르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도열한 고요한 아스팔트길로 이어지고 국립공원 내에서도 B동과 C동으로 갈라진다.

B동은 노래방, 카지노, 모텔, 상가 등 제법 규모가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아무 준비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좋은 시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C동은 큰 야영장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마을, 마을 안에 소박한 집들과 상가들로 되어 있다. 밤이 되면서 야영장 텐트 불빛들도 하나 둘씩 켜지고 일찍 잠든 사람들의 텐트는 불이 꺼져 있다. 가을 밤 같다. 밤공기는 차고 상쾌하고, 귀뚜라미가 울어댄다. 늦은 밤, 대학생들이 모여 앉아 단합대회라도 하는 것일까.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밤을 잊은 채 피 끓는 뜨거운 청춘의 한 때를 보내고 있고, 국립공원 체험장에 모인 초등학생은 단체로 모여앉아 산악 영화를 보고 있다.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정과 가족들과 함께 온 사람들의 정겨운 모습들이 야영장 안에 느껴진다. 넓은 야영장에는 많은 텐트촌이 형성되었는데도 조금씩 떨어져 있어 속닥속닥, 소곤소곤 좀 멀리 들려올 뿐 시끄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가족들과 함께 온 사람들, 부부, 연인, 친구들, 단체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든 설악동 야영장의 밤은 길어간다.

30분은 족히 걸리는 야영장 안을 밤공기 속에서 산책한다. 밤을 잊은 사람들이 밤늦도록 불빛을 밝히고 있다. 설악동 야영장 텐트 마을에 밤 깊을수록 별이 내린다. 기대 이상으로 넓디 넓은 풀밭, 깨끗한 텐트촌. 멋진 밤이다. 밤 11시 30분, 텐트 속에 들어온다. 이웃 텐트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둘째 날(8. 12. 화), 소공원 앞~소청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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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을 만나다 어렵게 올라가는 길~서서히 공룡능선이 드러난다~ ⓒ 이명화


새벽 3시 50분, 잠이 깬다. 화장실 가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오니 귀뚜라미 울음소리만 들려 올 뿐, 텐트촌은 고요 속에 잠겨 있다. 화장실 옆 계곡 물소리 밤새 환하게 밝히고 있고 귀뚜라미 노래 소리 합창을 하고 있다. 가을이 느껴진다. 일찍 산행 준비를 서두른다. 오전 8시 10분, 야영장 입구 앞에서 시내버스(1000원)을 타고 설악산 국립공원 소공원 앞에서 내린다. 차를 타고 오는데도 10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설악산 국립공원 소공원 앞에 도착, 아침 8시 20분이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2500원), 검표소를 지나 신흥사 앞을 지난다. 등산로에 접어든다. 울창한 나무들이 크고 우람하다. 빗방울이 성글게 떨어진다. 비가 오려나. 신경 쓰이는 날씨다. 9시부터는 비가 제법 오기 시작한다. 계곡은 끝없이 이어지고 올라갈수록 더 많은 물소리가 환하다.

등산로를 올라가면서 산장에서 흐르는 물을 담는다. 9시 40분, 비선대 앞을 지난다. 비선대는 기암절벽 사이에 한 장의 넓은 바위가 못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빗줄기는 줄어들지 않을 모양이다. 비선대 뒤 높고 거대한 암봉들 위로 로프를 타고 올라가는 산악인들의 모습이 멀리 보인다. 하늘이라도 찌를 듯한 까마득히 높은 암봉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은 몇 개의 점처럼 작아 보이고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우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절벽을 타는 사람들, 참 대단하다. 대청봉, 공룡 능선, 비선대로 갈라지는 이정표 앞에서 대피소 쪽으로 향한다. 빗줄기가 좀 약해진다. 매미울음 소리 숨가쁘게 울어대고, 맑디맑은 물소리 환하다. 비선대를 지나다가 잠시 쉰다. 눈을 들어 보는 곳마다 첨벙 뛰어들고 싶도록 맑디 맑은 계곡물이다. 높고 높은 암봉들로 이루어진 산들을 지난다. 비는 그쳤다 오다 반복하고 산에서 먹는 치킨 맛이 그만이다.

문수암을 지난다. 천불동 계곡에 들어서면, 비선대에서 천불동계곡을 따라 0.6킬로미터 지점에 맑은 물이 고인 이곳을 문수담이라 한다. 잦은 바위골(440미터)이다. 오전 10시 40분, 대청봉, 비선대 갈림길이기도 하다. 귀면암(420미터)을 거쳐 칠선골 입구(580미터)를 지난다. 양폭대피소까지 900미터 남았다. 귀면암과 양폭 사이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 골짜기에 5개의 폭포가 연이어 떨어지며 장관을 이루는 오련폭포를 옆에 끼고 계속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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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을 만나다 깎아지른 듯한 높은 비선대... 암봉을 타고 오르는 사람들 한 개의 점 같다. ⓒ 이명화


양폭대피소(750미터)에 도착, 낮 12시 20분이다. 비가 많이 쏟아지니까 이곳에서 비를 피하거나 지쳐 쉬어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비좁은 마당에 가득하다. 양폭대피소는 식수도 없고, 취사장이라곤 마당 한귀퉁이에 있는 비에 젖고 있는 나무의자 몇 개요, 앉을 자리조차 넉넉지 않아 불편하다. 물이 고프면 양폭 대피소 앞에 저만치 흘러내려가는 계곡물을 마실 수밖에 없다.

젖은 나무의자들, 좁은 마당 처마 밑 시멘트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 다리가 아파서 서 있을 수도 없고, 앉자니 자리가 없고 어정쩡하게 마당에 서서 우리는 비를 맞고 서 있다. 한참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 겨우 앉는다. 남편이 끓여주는 라면을 먹는 동안 빗줄기가 조금 약해져 있다. 양폭대피소까지 오는 동안 비가 계속 내려서 사진도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

길 따라 걷노라면 하늘은 너무 높아 까마득히 멀고, 끝도 보이지 않는 높은 바위봉우리들, 거침없고 사정없이 높고 우람하고 거만하게 치솟은 거대한 암봉들이 이어질 뿐이다. 한 치의 양보도 아량도 허락지 않을 것 같은 뻗어 오른 거대한 암봉들이 양쪽으로 우뚝 솟아 있다. 거대한 암봉들 사이 깊은 천불동계곡 골짜기를 걷고 있는 나는 아주 작디 작은 존재일 뿐이다.

지리산을 어머니 품속 같은 산이라고 했던가. 그땐 몰랐건만, 설악산에 와서야 알 것 같다. 설악산에 비하면 지리산은 따뜻한 어머니 품속처럼 넉넉하고 따뜻한 산이란 것을. 가끔 높디 높은 철계단을 통과하면서 어렵게 여기까지 왔다. 갈 길은 험난하고 먼 것 같다. 이 우중엔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보다 하산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낮 1시 15분, 또 다시 출발한다. 많이 올라온 것 같은데 아직도 갈 길은 멀고멀다.

양폭포를 지난다. 거대한 바위산이 계곡 양쪽으로 수직으로 높이 뻗어 솟아 있고 직각으로 내리뻗고 치솟은 철계단에 의지해 이 암봉 구간을 지난다. 위험천만의 깎아지른 듯한, 올려보아도 끝이 다 보이지 않는 바위산들을 빗길에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걸어 철계단 구간을 통과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남편은 어지러워서 못가겠다며 비에 젖은 철계단을 한발 한발 겨우 내딛는다. 금방이라도 높디 높은 암봉들에서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면서.

이제 조금 완만한 계곡 길을 걷는다. 희운각 대피소, 양폭대피소 갈림길 앞 계곡 바위 위에서 휴식, 희운각 대피소는 1.1킬로미터 앞에 두고 있다. 내려오는 사람에게 묻는다. 희운각대피소는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고 한다. 끝없이 흐르는 맑디 맑은 계곡물에 세수를 한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다. 조금 올라가자 계곡 물소리도 끊기고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1시간 훨씬 넘도록 오르막길이다. 무너미 고개정상(1020미터)에 도착한다.

휴~. 가파른 경사길에 겨우 올라 무너미고개 정상에 올랐다. 오후 2시 50분이다. 공룡능선이 마주 보인다. 희운각 대피소(1050미터)에 도착. 이곳 역시 약수터가 없다. 설악산은 물이 아주 귀한 듯하다. 계곡물은 계속 마르지 않고 풍부한데 약수터가 없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희운각 대피소에서 판매하는 물을 사먹거나(작은 물통 1500원), 아니면 저 아래 흐르는 계곡물을 마셔야 한다. 가져온 물도 다 떨어져 가는데, 시원하게 흐르는 약수터의 물이 정말 아쉽다.

소금물에 담금 배추처럼 비를 맞고 계속되는 산행길에 지쳐서 중청대피소까지 가려고 했던 처음 계획을 포기한다. 희운각대피소에서 1박을 할까 생각했지만 이미 방은 꽉 찼다고 한다. 다시 출발한다. 소청봉까지라도 가야 한다. 좀더 힘을 내자. 희운각대피소를 지나면서 비는 그치고 날이 조금 개이기 시작한다. 가파른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갈수록 급경사 오르막길이다. 무너미고개서부터 계속 되는 높은 고갯길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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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을 만나다 전망바위에서 내려다 본 운무에 가렸다 열렸다 하는 설악산.. ⓒ 이명화


천천히 공룡능선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희운각대피소에서 소청대피소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다. 소청대피소가 가까워질수록 더 높고 경사진 길로 이어져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숨이 턱에 닿는다. 한발 한발 내딛기가 몇 초씩 걸린다. 내가 걷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걷는 것 같다. 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어디야, 도대체?"를 몇 번이고 되풀이 한다. 악~! 소리 나게 힘든 경사길을 지난다. 그나마 힘들게 오를수록 공룡능선이 드러나고 우리가 걸어올라 온 천불동계곡 그 높디 높은 바위 산봉우리들 전체가 드러나면서 위안이 된다.

많아 올라왔다. 공룡능선을 마주하고 바라본다. 고요한 산, 인적 없다면 그야말로 적요한 산이다. 공룡능선 사이로 운무가 깔려 있다. 깊은 계곡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위산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조금씩 드러나는 면모들. 날이 갠다. 오후 5시 10분, 소청대피소에 도착한다. 온 몸은 비로 흠씬 젖어 축 처져 있다. 좁은 대피소에는 비가 와서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우리처럼 중청대피소까지 가려고 했던 처음 계획을 변경한 사람들도 많은 듯하다. 비가 오니 밖에서는 못하고 좁은 공간에서 젖은 몸을 말리며 밥을 해 먹느라 발 디딜 틈이 없고 불쾌지수는 더 높아진다. 지친 몸에 절은 배추처럼 젖어 무거운데 사람들로 붐비니 더 힘들게 느껴진다. 젖은 옷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다. 밖에 나와 보니, 바로 앞에 용아 장성능선이 조망된다. 운무에 싸인 아름다운 바위봉우리들이 한폭의 수묵화 같다.

소청대피소 아래 한 눈에 보인다. 천불동계곡으로 까마득히 높은 암봉들 사이로 걸어서 겨우 오른 소청 대피소. 높이 올라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우린 힘들게 올라와 높이 올라와야 볼 수 있는 것들을 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 산에 또 오르는 것일까. 산에 오르면서 이따금 희망처럼, 선물처럼 조망되는 아름다운 그것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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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을 만나다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용아장성 능선~의 붉은 낙조~ 참 보기 드문 낙조라 한다... ⓒ 이명화


소청대피소 앞 저 멀리 조망되는 용아장성능선, 그 위로 낙조가 붉게 물든다. 일년 삼백육십 오일 중, 200일 정도는 안개에 싸여 있다는 설악산. 설악산에 올라올 때마다 운무에 가려 아무것도 조망하지 못하고 갔다는 옆의 사람은 용아장성 능선 위로 붉게 물드는 낙조를 바라보며 '올라올 때의 힘들었던 것이 싹 달아나 버렸다'며 탄성을 내지른다.

우린 그저 신묘막측한 신의 솜씨에 할 말을 잃는다. 또 다시 비가 내린다. 늦은 밤에도 비를 맞으며 대피소를 찾아드는 사람들, 터져 나갈 듯 많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밤 9시에 소등한다. 어둠이 내리고 비는 쉬지도 않고 밤을 새워 내린다.

셋째 날(8. 13. 수), 소청대피소~한계령

새벽 5시, 잠이 깬다. 옆의 사람들이 깰까봐 조용히 일어나 랜턴 불을 밝히고 화장실로 향한다. 바깥은 아직 깜깜하다. 잠을 한 번 깨고 보니 쉬 잠이 오지 않는다. 한참 누워있다 일어난다. 대피소는 어젯밤보다 한산한 느낌이다. 일찍 일어난 까닭일까. 아침밥을 간단히 먹는다. 옆에 사람 하는 말, "대피소 중에서 그래도 여기가 제일 좋아요, 인심이 있어 보이고 자유롭거든요"한다. 미처 예약하지 못하고 와도 잠자리 얻을 수 있고 내치지 않아서 좋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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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을 만나다 소청대피소에서 바라 본 운무에 가려진 용아장성 능선~ ⓒ 이명화


소청대피소 산장지기는 아주 친절하다. 소청대피소 150미터 아래엔 약수 물이 아주 차고 시원하다. 설악산에 올라 처음으로 맛보는 약수물이다. 샘물을 충분히 받아 물통에 채워 이제 또 출발한다. 오전 7시 20분이다. 소청대피소에서 400미터 가량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짙은 안개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이는 카메라를 세워놓고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한 장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담기는 것일까. 그걸 또 누가 알까. 계단길이 이어지고 전망대에 오르니 안개 묻은 바람이 시원하다. 7시 40분 소청봉에 도착한다. 소청봉에서 대청봉 가는 능선 길은 양쪽이 탁 트여 있어 바람이 자유롭다. 안개는 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여전히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참 높이도 올라왔나 보다. 막힘없이 자유롭게 바람이 분다. 사방은 안개에 갇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조망바위에 오른다. 여기서도 사진 찍기 위해 카메라를 앞에 설치해 두고 우의를 입은 채 안개 속에 앉아 있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다. 벼랑가에 홀로 핀 이름모를 꽃을 찍고 있는 중이다. "대청봉에 올라가면 꼭대기에 하얀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고 일러준다. 날 보고 꼭 찍으라고 한다. "그 꽃을 설악의 단풍이라고 한다"는 것까지 친절하게 일러 준다. 작품 사진을 찍으시냐고 물었더니 그냥 취미로 한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리곤, "지금 대청봉에 올라가면 안개에 가려서 아무것도 안 보일 거예요, 한참을 기다려야 할 텐데 추워서 못 기다릴 것"이라 한다. 다시 오르막길이다. 안개 속을 걷는다. 천불동 계곡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에 당도했지만 짙은 안개가 모든 사물을 지워버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천불동 계곡은 설악산에 있는 대표적인 계곡의 하나로 비선대에서 대청동으로 오르는 7킬로미터 코스의 중간 계곡으로 설악의 산악미를 한 곳에 집약하고 있는 곳이다.

천불동계곡이라는 호칭은 천불폭포에서 딴 것이라 한다. 날이 맑으면 대청봉 가는 높은 능선길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일 천불동계곡은 짙은 안개에 묻혀 있다. 끝청 갈림길을 만난다. 중청대피소에 도착, 오전 8시 15분이다. 중청대피소는 설악산에서 만난 다른 대피소들보다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다. 탈의실, 취사장 등도 깨끗하고 화장실도 암모니아 냄새 가득 나는 다른 곳과는 달리 거품으로 씻어내는 포세식으로 되어 있어 불쾌감이 덜하다. 중청대피소에서 잠시 휴식, 비가 갑자기 쏟아진다. 더 거세어지는 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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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을 만나다 흐리고 비오는 날의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에 올라~ ⓒ 이명화


어제도 비를 맞고 온종일 걸었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비 맞고 걷기가 싫다. 비가 그치기를 앉아서 기다려본다. 대청봉에 일찍 올라갔던 사람들이 비에 흠씬 젖은 몸으로 대청봉 대피소로 뛰어든다.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올라갔던 사람도 비만 맞고 돌아왔다. 설악산 정상인 대청봉에 올랐다가 한계령으로 해서 하산하려던 처음 계획을 변경해야 하나,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하나 고민된다.

사진기를 들고 대청봉에 올라갔던 중년 남자는 오늘 같은 날 한계령 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길이 아주 험하다고, 그나마 천불동계곡 길이 그 중에서도 가장 편한 길이라 한다. 시간 또한 긴 길이다. 어제 그렇게 힘들게 올라온 계곡길이건만, 그렇다면 다른 길은 얼마나 험하단 말인가. 해서, 어제 온 길로 다시 내려가리라 마음먹는다. 일단 설악산 최고봉 대청봉으로 올라간다.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조망되지 않는다 하여 코앞에 있는 대청봉을 보지 않고 어찌 그냥 갈 수 있으랴. 아까보다 빗줄기가 약해져 있다. 오전 9시 25분 대청봉에 도착한다. 역시 안개에 가려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대청봉 바위에 앉아 대청봉 아래 펼쳐질 아름다운 경관을 기다려본다. 실망스럽게도 안개는 좀처럼 물러가지 않는다. 한동안 앉아 기다리다가 다시 내려간다. 그래, 오늘만 날인가. 다음에 오마, 중청대피소에서 잠시 휴식 후 다시 출발, 갑자기 햇볕이 쨍 하고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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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을 만나다 한계령으로 가는 길에~저 멀리 공룡능선과 용아장성 능선이 보이고~ ⓒ 이명화


하늘 한 귀퉁이가 밝아진다. 희망이 부풀어 오른다. 마침 그때, 갈림길 앞에 선다. 여기서 갈림길에서 쉬고 있던 한 무리들이 있어 조언을 구한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이 팀은 어제 그 우중에도 공룡능선을 탔고 설악산 종주를 하고 있다고 한다. "웬만하면 처음 계획대로 가는 게 낫다"고 한다. 마침 이 분들도 한계령 방향으로 간다 하여 그 뒤를 따라나선다. 앞서 가는 그들이 있어 용기를 내서 처음 계획대로 한다. 좁은 흙길, 돌투성이 길이 이어진다. 얼마만인가 흙길을 만난 것은.

어제는 하루 온종일 바위투성이 길에 높게 솟은 암봉들만 보고 걸었기에 흙길이 반갑다. 그런데 길옆에는 멧돼지가 파놓은 흙구덩이들이 여기저기 눈 닿는 곳마다 보인다. 벌집을 쑤셔놓은 듯 땅을 파헤쳐 놓은 곳들이 허다하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닌 듯하다. 괜시리 무서워진다. 해는 사라지고 다시 안개에 갇힌다. 끝청(1604미터)에 도착, 오전 10시 50분이다. 계속 능선길이 이어지고 다시 해가 난다.  휴~. 12시 정각, 전망바위에 올라 잠시 휴식한다.

한계령을 4.1킬로미터 앞두고 있다. 여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 좋다. 땀을 식히며 남은 도시락밥을 먹는다. 양식은 다 떨어지고 남은 것은 아침에 남긴 밥 조금, 막장 조금, 그리고 몇 조각의 마늘이 전부이다. 군것질거리도 없고 지치고 힘든 길이라 남은 음식은 꿀맛보다 더 달다. 남편은 이제껏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게 먹었노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람쥐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나 보다. 다람쥐는 사람을 피하기는커녕 가까이 맴돌며 먹이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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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을 만나다 흐림, 맑음, 비~가 계속되던 설악산 등반길~한계령을 바로 아래 두고~ ⓒ 이명화


다시 하늘이 열리면서 한 귀퉁이 푸르른 하늘빛이 드러난다. 얼마나 반가운 맑은 하늘인가. 바위 아래에는 비탈진 너덜지대이다. 해는 또 날 듯 말 듯하고 운무는 느리게 움직이며 여러 가지 표정을 연출한다. 저만치 우리가 가야 할 능선길이 조망된다. 햇살이 환하게 퍼진다. 점점 더 한계령 쪽 하늘이 맑아진다.

구름 낀 하늘 한족을 연 푸르른 하늘 빛,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듯하다. 높고 수려한 산세들... 구름이 덮었다 열었다 한다. 저 끝에 귀때기청봉이 보인다. 다시 일어나 걷는다. 얼마 가지 않아 용아장성능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뒤로 희미하게 오세암이 보이고 공룡능선이 멀리 보인다. 힘든 산행길에 선물처럼 이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준다. 다시 날씨는 완전히 맑음이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 하루 중에도 수없이 뒤집는 날씨가 계속된다. 전망바위에서부터는 계속 멋진 전망이 드러난다. 하지만 또 전망바위에서부터는 험한 구간이다. 바위투성이 길을 어렵게 걷는다. 계속되는 험로, 다시 완만해지다가 다시 이어지는 뾰족한 바윗길로 이어진다. 가끔 올라오는 등산객들과 맞닥뜨린다. 우리처럼 내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처음 출발할 때 우리 앞서 걸었던 팀도 어디서 지체하고 있을까 보이지 않는다.

2시 정각, 한계령 휴게소 내려가는 이정표를 만나고 잠시 휴식 후 출발한다. 한계령까지는 2.3킬로미터 앞두고 있다. 내리막 오르막 또 내리막 다시 오르막, 직각으로 뻗어 올라간 오르막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숨을 헐떡대며 몰아쉬고 올라간다. 머리가 띵 하고 아파온다. 겨우 오른 오르막 끝, 조망 바위 위에 쓰러지듯 앉는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다. 힘든 오르막길을 몇 개나 넘었다. 표지판이 드디어 나타난다.

한계령까지 1킬로미터 앞두고 있다. 거의 다 왔구나, 조금 마음이 놓인다. 지금부터 내리막길이 쭉 이어진다. 한 500미터 까지는 바위 길로 이어지고, 무릎이 시큰거린다. 거의 절뚝거리며 어렵게 한 걸음씩 내딛는다. 다시 500미터 앞두고 있는 표시판이 나온다. 계단길, 그리고 다시 돌길이 이어진다. 1킬로미터나 되는 내리막길을 겨우 내려오니 한계령 휴게소가 바로 아래 보인다. 전망바위에 올라 앉아 안개에 싸인 한계령 휴게소를 내려다본다.

물병에 남아 있던 한 방울의 물을 다 마신다. 말로만 듣던 한계령, 노래로만 듣던 한계령이 이런 곳이었던가. 양희은의 노래가 생각나 콧노래를 불러본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한계령 휴게소엔 많은 차량들, 그리고 사람들, 한계령 고개를 넘는 차들이 보인다. 3시 50분, 설악산 한계령 탐방 지원센터를 지나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3:55분), 호떡을 사서 먹고 속초행 금강고속(4:25분발)을 기다렸다 탄다. 산행은 끝났다. 이제 먼 길을 다시 돌아 설악동 야영장까지 갈 일만 남았다. 기나긴 노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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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화

<산행수첩>

2008.8.12(비):산행시간 9시간
설악동야영장(8:10)-설악동소공원(8:20)-신흥사(8:30)-비선대(9:40)-잦은바위골(10:40)-귀면암(11:00)-양폭대피소(12:20)-점심후출발(1:15)-무너미고개(2:50)-희운각대피소(3:00)-소청대피소(5:10)

2008.8.13(비온 뒤 맑음):산행시간,8시간 35분
소청대피소(07:20)-소청봉(7:40)-중청대피소(8:15)-장대비...대청봉(9:25)-중청대피소(9:50)-끝청(10:50)-너덜지대앞 조망바위(12:00)-삼거리(2:00)-한계령탐방지원센터(3:50)-한계령휴게소(3:55)

총 산행시간:17시간 35분
산행기점:설악동 소공원
*한계령~속초까지 버스요금 1인당 3900원(약 40분 소요)
#설악산 #공룡능선 #천불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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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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