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여류화가의 세 가지 결혼 조건

김갑수 역사팩션 102회 제2부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8.19 20:44수정 2008.08.2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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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을 거절한 조순호, 불현듯 김문수를 떠올리다

일본인 와다 츠네이츠는 그곳에서 만난 변호사였다. 와다는 조순호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조순호의 여권이 달라진 경위를 듣더니 분노를 표시했다. 무엇보다 와다는 사적인 말을 일절 하지 않는 것이 조순호의 마음을 끌었다.

조순호는 두 차례 더 와다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놀랍게도 와다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높았다. 그는 한국의 건축과 공예를 세계 최고라고 말했다. 한 번은 와다가 조순호의 학교에 찾아오기도 했다. 물론 여권 업무와 관련된 일이었다. 조순호의 학교 가까운 곳에 볼 일이 있으니 자기가 서류를 갖고 학교로 가겠다고 예고한 뒤였다.

와다는 세 달 만에 조순호의 여권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조순호는 비용을 물었다. 와다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수임료는 원래 선불입니다. 처음에 안 받았으니 끝난 겁니다. 그 대신 제 말을 5분만 들어 주시면 됩니다."

와다는 그 날 조순호에게 뜻밖에도 정식으로 청혼했다. 그는 조순호가 아직 재학 중이니 졸업 전까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조순호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예의를 갖춰 거절했다. 자기에게는 정혼한 남자가 한국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생각이 바뀔 리도 없으니 졸업 전까지 기다리면 안 된다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다는 조순호를 사무실 문 앞에서 정중히 배웅했다.


와다의 사무실을 나오며 조순호는 불현듯이 김문수를 떠올렸다. 그녀는 갑자기 못 견딜 정도로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김문수는 지금쯤 나민혜와 도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 들었다. 그녀는 한없이 걸어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길을 한 시간 남짓 더 걸었다. 그녀의 얼굴이 멍멍해졌고 코끝이 빨갛게 변했다. 하지만 그녀는 코트 깃을 세운 채 벙어리장갑으로 입을 막고 걸었다.

얼마 후 진정을 찾은 그녀는 한 우동집의 휘장을 들치고 들어갔다. 그녀는 삿포로 우동을 좋아했다. 그녀는 튀김을 빼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빼달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다시 그녀는 김문수를 생각했다. 갑자기 그녀는 몹시 배까지 고프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우동을 국물까지 훌훌 마시고 집을 향해 걸었다. 기온이 급강하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서둘러 걸었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소화제를 먹었다. 소화제의 약취가 역하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꾹 참고 삼키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속이 조금씩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누워 있었다. 그러나 다시 속이 메스꺼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실로 갔다. 그러고는 왝왝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뺨까지 흘러 나와 있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손가락 사이로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때였다. 손가락 사이의 희미한 불빛에서 웬 남자의 눈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작지만 강한 눈빛, 그렇지만 하염없이 맑은 눈동자'

그것은 김문수의 것이었다. 그녀는 휘우뚱거리며 몸의 중심을 잃더니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청혼을 수락하고 보니 유부남

나민혜는 박우진이라는 남자의 집요한 구애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영남 갑부의 아들이라고 했다. 용모도 남에게 뒤질 것이 없는 남자였다. 나이가 조금 많은 것 말고는 흠잡을 데가 없는 남자였다. 그는 와세다 대학 법과를 마치고 변호사 시험을 위해 도쿄에 머무르고 있는 인재였다. 게다가 그는 성격도 무난한 호인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친구 조순호를 생각했다. 조순호 같으면 박우진 같은 사내를 좋아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민혜는 조순호가 부러워할 만한 남자를 자기 남자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는 가난한 김문수밖에는 없지 않나 싶었다.

그렇더라도 나민혜가 김문수를 녹록하게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문수는 세상 물정에 어둡긴 하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가치관이 견고한 사내였다. 따라서 그와 결혼한다면 아무래도 자기가 시달릴 것 같았다. 사실 이미 나민혜는 김문수를 포기한 지가 오래였다. 그녀가 김문수를 놓기로 한 것은 그의 집안이 의외로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박우진은 틈나는 대로 나민혜에게 들러 시계나 목걸이 같은 선물을 주기고 했고, 생일이나 전시회 때마다 엄청나게 화려한 장미를 보내기도 했다. 나민혜는 국내 집으로 편지를 보내 박우진의 집안을 알아보게 했다. 얼마 후 답장을 받은 그녀는 득의의 표정을 지었다. 박우진의 집안은 명실상부한 영남 갑부였기 때문이다. 처음 나민혜는 돈이 많겠거니 했지만 그 정도까지 갑부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박우진에게로 마음을 굳혀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박우진에게 계속 자기를 쫓아다니며 구혼하도록 만들었다. 박우진은 지칠 줄 모르고 나민혜에게 청혼하는 열성을 보였다. 두세 달쯤 지난 후 그녀는 박우진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나니 이제는 박우진이 딴 마음을 먹지 않을까 걱정되기에 이르렀다.

청혼이 받아들여지자 박우진은 나민혜에게 동침을 요구했다. 나민혜는 이번에도 몇 번 거절하다가 못 이기는 척 허락해 버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박우진은 침대에 앉아 말했다. 그날 박우진은 나민혜에게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실을 실토한다. 박우진은 자기는 한 번 결혼한 적이 있고 아이가 하나 있다고 말했다. 민혜씨는 착한 여자이니 보나마나 용납하리라 믿고 굳이 먼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민혜는 잠시 멍한 상태로 빠져 들었다.

며칠 후 그녀는 박우진에게 결혼 조건을 내세웠다.

1. 나민혜 외에 다른 여자를 만나지 말 것.
2. 그림 그리는 일에 전적으로 협조할 것.
3. 전처 딸, 시어머니와는 따로 살게 해 줄 것.

박우진은 나민혜의 요구를 그 자리에서 승낙한다.

그렇게 하여 나민혜는 가에츠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박우진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박우진의 본가가 있는 부산 영도에 가 살게 된다. 박우진에게는 손위 누이가 둘 있었다. 그들은 경상도의 전통적인 여인들이었다. 그들이 나민혜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나민혜는 자기가 그림을 더 그리고 전시회를 열기 위해서는 경성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상쩍은 여인의 방문

박우진이 경성으로 옮겨 갈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어느 날 밤 그의 집에 한 여성이 방문했다. 눈이 반짝거리고 몸집이 작은 젊은 아낙이었다. 나민혜는 젊은 여인에게서 왠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박우진 선생님 댁이지요?"
"그렇습니다만, 어디에서 오셨는지요?"
"죄송합니다. 계시면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할 일이라서…."
"들어오세요."

나민혜는 젊은 여인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박우진은 서재에서 법령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옷 차림이던 그는 방문객이 여자라는 말을 듣고 나민혜에게 옷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는 옷을 입고 사랑으로 건너갔다.

"저도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요?"
"같이요? 그렇게 하세요."

박우진은 마지못해서 허락한다는 투였다. 나민혜는 박우진의 뒤를 따라 사랑에 들어갔다. 박우진도 모르는 여자였다. 여인은 일어나서 박우진을 맞았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저는 김의한의 처입니다."
"아이고. 의한이, 그 친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박우진은 고보 시절의 친구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나민혜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나민혜가 차상을 들고 왔을 때, 박우진은 여인이 전한 편지를 읽고 있었다.

여인이 돌아가고 난 후 박우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민혜는 속이 끓어올랐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박우진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인가 보았다. 그러자 나민혜는 대뜸 핏대를 세우며 따지고 들었다.

"아내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요?"

의외로 박우진의 언성은 차분하고 낮았다.

"여보, 이번 한 번만 좀 모른 척할 수는 없겠소? 시일이 흐르면 다 얘기하리다."
"그럴 수 없어요. 용납할 수 없어요. 부부간에 비밀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 결혼 전 약속과 틀리니까요."
"또 그 약속 얘기."

박우진은 자상하게 미소 지으며 절실한 표정으로 나민혜의 얼굴을 보았다.(계속)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3부작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한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이 펼쳐집니다. 작가 김갑수는 최근 전작 장편 <오백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3부작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한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이 펼쳐집니다. 작가 김갑수는 최근 전작 장편 <오백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박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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