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는 접는 게 좋겠다"

등록 2008.08.28 15:02수정 2008.08.2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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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말하기 참으로 어려운 시대가 왔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을 지나는 동안 한국 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을 하고 한국 사회의 내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왔다고 생각한 건 신기루였는지 모른다. 일종의 철인 정치적 환각에 빠져 있던 건 아닌가 싶다. 상대적으로 더 민주적이고 덜 권위적인 '통치자'가 청와대에 있는 동안 분명 일정 정도의 자유권과 사회권이 향상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역주의적 시각에서 모든 사회 문제를 치환하는 상당수 민중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새로운 사회 분위기를 제도적으로 공고화하기 위한 법 개혁도 일부분에 머물고 말았다. 우리 사회가 뒷걸음질하지 않을 안전판 마련에 소홀했던 데 대한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고 있다.

 

어느 정도는 예상됐던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천박하고 무식한 방식으로 진행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을 쫓아낼 때처럼 감사원과 검찰 등 국가기관이 총동원되고, 문화방송 <피디수첩>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제재로도 모자라 취재 원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압수수색을 실시하겠다는 몰상식한 발상까지 하는 데서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국민의 생명권과 국가의 검역 주권을 등한히 한 협상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대를 막겠다며 이 나라에서 가장 넓다는 16차선 도로를 콘테이너 박스로 빈틈없이 막는 경찰, 신고하지 않은 집회에 참가해 도로를 점거했다는 이유로 신분도 밝히지 않고 미란다원칙도 고지하지 않는 불법 연행과 감금을 일삼는 경찰, 그런 남부끄러운 짓을 한 경찰을 잘 했다고 칭찬하는 대통령도 있다.

 

지금 정부는 어차피 앞으로도 한나라당을 찍지 않을 것이 분명한 30%는 확실히 버리고 가겠다고 작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거칠게 몰아붙이는 것을 봐서는, 단순히 버리고 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반대 세력에게 공포를 내면화시켜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숨죽여 살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한 줌에 불과하던 국정수행 지지율이 두 줌으로 늘자 본전 생각이 난 것이다. 정치 기반이 되는 지역에서의 응원도 이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다.

 

2주 전 취재차 통화한 한 언론학자는 "얼마 전 부산에 갔더니 그 쪽은 정연주 사장이 '당연히 물러나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들을 갖고 있더라. 시작해보지도 못한 대통령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는 것 같다. 방송 때문에 대통령이 할 일 못 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고… 조중동식의 여론 확산이 그 쪽은 강한 것이다"라며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그 학자는 현재 언론계 상황에 대해 "(현 정부가)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지금은 언론학자가 얘기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며 말을 아껴 그의 말은 기사에 인용할 수도 없었다.

 

다가올 날들을 놓고도 당분간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게 좋겠다. 대선에 이은 총선에서 민중의 열렬한 지지로 국회의 레비아탄이 된 한나라당은 다가오는 정기 국회에서 공적인 구실을 민간에게 넘김으로써 '왜 국가란 게 존재하지?'라는 의문을 품게 만드는 법안을 입안하고, 그렇잖아도 집회와 시위를 옥죄기 위해 존재해 민중의 자유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는 쓰레기 같은 집시법에 분칠을 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다수당이던 시절에도 악법을 입으로만 철폐하고 국회에서는 무능하기 그지없던 민주당이 반토막난 의석으로 무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바보는 없을 터이다.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야 현실정치적인 의석수의 제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의회에 기대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시민사회 세력은 계속 거리의 정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럼 또 경찰은 악법을 무기로 삼아, 자의적인 "법치주의"를 부르짖는 대통령을 비빌 언덕 삼아 설쳐댈 터이니 '반민주주의의 악순환'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보라. 지난 10여 년간 숨직이며 조직 감축을 참고 있던 경찰내 보안 세력들이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등 7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해갔지 않은가.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주로 비정규직 투쟁을 해왔으며, 공개 활동을 해왔다. 북한 체제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밝혀왔다. 이들은 이적단체를 구성하고 국가 변란을 선정선동하고 안보에 위해를 끼치는 문건을 제작 반포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이들의 활동이 명백하게 현존하는 위협이라고 보기 어려움에도,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포하려 했다는 이유로 보안법을 걸었다. 1948년 만들어져 올해 환갑을 맞은 보안법은 이와 같은 보안 경찰들을 통해 싱싱한 젊음을 언제든 뽐낼 수 있는 것이다.

 

엄혹한 시기가 왔다. 반동의 파고가 우리 사회의 도저한 흐름을 유지하던 주요 지점들을 밀물처럼 덮고 있다. 그렇더라도 보다 나은 사회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 곳을 향해 어렵지만 한 발짝 내디디는 게 우리의 역사적 숙명으로 믿는 이들은 분명히 있다. 이 사회가 진보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 정도가 될 것이다. 우선 땅에 발을 굳건히 내디딘 채 현실의 모순을 깨뜨리기 위해 싸워나가는 것. 그리고 법조문을 구성하는 문장을 자구 그대로 해석해 입법의 취지, 헌법의 정신을 훼손해가며 생각에 굴레를 씌우는 이들에 맞서 끊임없이 자유로운 상상을 해나가는 것이다. 깊은 어둠일수록 새벽이 가까웠다는 신호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전종휘씨는 현재 한겨레21 기자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8.28 15:02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전종휘씨는 현재 한겨레21 기자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세철 #공안정국 #인권 #피디수첩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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