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이젠 다른 일자리 찾아줄 때

법원도 반려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대로 둘 건가

등록 2008.08.30 16:46수정 2008.08.3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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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사회주의노동자연합 회원 7인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청구가 법원에 의해 기각되었다.

 

경찰은 수사를 보강해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고 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새로운 사실이 더 나올 게 없으므로 경찰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그나마 체신을 지키는 길이다.

 

국가보안법, 이젠 정말 없애버리자

 

이들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적용에 대해 법원조차 무리라고 생각할 정도면 이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한 경찰은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옷을 벗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번 건은 아무리 이명박 정부가 퇴행적인 행태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지만 시대의 흐름 전체를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다.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 여론이 이참에 다시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물론 보수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남북관계 경색 국면에 이어 간첩 혐의 사건까지 등장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국가 대 국가 평화 패러다임에 입각한다면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 있는 사안이다. 남과 북의 지배집단이 서로를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 한 쪽을 복속시켜야 할 상대로 보는 한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이긴 하다.

 

남과 북의 지배집단은 지금까지 적대적 공존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국가 대 국가 평화 패러다임은 이러한 적대적 공존 관계를 무너뜨리고 양국 사이의 관계를 정상 국가 사이의 관계로 바꾸는 역사적인 일이다.

 

이런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헌법의 영토조항 개정뿐만 아니라 구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을 완전 폐지하는 것이 전제되거나 최소한 병행되어야 한다.

 

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지적해왔듯이 사상과 양심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의 정당성은 이미 충분하다. 국제사회 또한 이미 여러 차례 국가보안법 폐지를 권고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http://swl.jinbo.net) 홈페이지 ⓒ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회주의노동자연합(http://swl.jinbo.net) 홈페이지 ⓒ 사회주의노동자연합

95년에 내가 겪었던 국가보안법 사건

 

국가보안법이 아무리 녹슬었다고 한들 이 법이 살아 있는 한 오래전 나에게 일어났던 일이 누군가에게도 계속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되니 끔찍하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에 자신이 누워있다고 상상해보라.

 

1995년 5월 15일 부산시경은 부산지역 대학생 17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은 이들에게 '빛나는 전망'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기관지 <맥박>을 통해 맑스주의를 선전하고 계급투쟁을 선동한 혐의”를 덧씌웠다.

 

이 날은 내 이름이 처음으로 공중파를 탄 순간이었다. TV를 보고 깜짝 놀란 친척들은 물론 옛날 학교 선생님들 중에서도 무슨 일이냐며 집으로 전화를 거신 분이 계셨다.

 

'빛나는 전망'은 93년 9월에 결성되었다가 95년 3월 해체된 조직으로 사건 당시 붙잡힌 사람들 가운데에는 군 복무자와 졸업생이 많았다. 나도 당시 95년 2월에 학교를 졸업한 졸업생 신분이었다. 경찰은 이미 사라진 조직을 가지고 국가보안법을 무리하게 적용했던 것이다.

 

'빛나는 전망'은 평범한 좌파 학생운동조직에 불과했다. 사회과학 공부도 하고 학생회 선거에도 나갔으며, 큰 파업이 있으면 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했다. 이를 두고 북한을 이롭게 하고 계급투쟁을 선동했다는 죄목을 씌웠으니 과대평가도 그런 과대평가가 어디에 있을까.

 

새벽에 잡혀가던 날 집에 쳐들어 온 경찰들 때문에 가장 놀랐던 사람은 나보다는 부모님이었다. 그 황망해하시던 표정을 십 수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경찰들은 방을 수색하며 불온서적으로 짐작되는 책들을 압수했고, 컴퓨터와 디스켓 박스를 통째로 가져갔다.

 

나한테서 가져간 디스켓은 모두 일반 프로그램이었거나 공학용 프로그램이었는데, 이것이 그날 저녁 공중파 뉴스 화면에 마치 무시무시한 문건이 들어있는 디스켓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갔다. 동생이 뉴스를 보면서 그 디스켓들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주었다.

 

나는 체포된 사람들과 함께 부산시경 대공분실에서 48시간 동안 집요한 조사를 받았다. 담담하긴 했지만 억지로 조서를 꾸미는 탓에 짜증이 왈칵 났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잠을 쫓으며 또박또박 대꾸를 했다.

 

담당 형사가 조서를 꾸밀 때 첫 문장부터 입씨름을 시작했다.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는 구절을 두고 밤새도록 논쟁 아닌 논쟁을 했다. 꼬박 이틀 동안 입씨름을 하니 몸은 많이 지쳤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오기도 발동했었다. 여기서 질 수 없다는.

 

경찰의 구닥다리 '뻘짓'에 그저 헛웃음만

 

95년인 당시에도 내게 닥친 사건이 생뚱맞다고 느껴졌다. 도대체 세금이 아깝게 느껴졌고 몇날몇일 동안 집 주변을 서성거렸을 형사들이 오히려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런 일이 2008년 오늘 나에게 또다시 닥친다면? 헛웃음만 나올 것 같다.

 

이번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도 내게는 옛날 '사노맹' 사건과 같은 묵직함 같은 것은 없었다. 시기를 맞춰 사건을 터뜨림으로써 공안 분위기를 형성하려는 의도에 대한 규탄의 함성이 앞서기 보단, 경찰의 '뻘짓'이 도를 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대공 관계 경찰들이 정말 먹고살기 힘들구나', '이제 그런 걸로 정국 전환을 시도하는 게 먹혀들지도 않을 텐데, 하는 짓이 왜 이리도 구닥다리일까'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경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촛불집회 배후에 이런 불순세력도 있었다는 논리를 써먹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 배후론이 이미 국민들에게 면역이 되어 있어서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나 있는 것일까.

 

시민들의 상식을 너무 우습게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으로 먹고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제발 다른 일자리 좀 마련해주자.

덧붙이는 글 | 최광은 기자는 사회당 대표입니다.

2008.08.30 16:46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최광은 기자는 사회당 대표입니다.
#오세철 #사노련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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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비교정치, 한국정치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복지국가연구센터에 적을 두고 있다. 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 UK)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박종철출판사, 2011) 저자이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평생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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