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못하면 장애"... 프랑스, 너마저도

[해외리포트] 교육부 장관 발언... '자국어 지키기' 대표국의 서글픈 현실

등록 2008.09.04 15:06수정 2008.09.0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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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코스 교육부 장관. ⓒ www.oecd.org

9월은 프랑스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신학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학생들의 개학을 하루 앞둔 1일, 프랑스 대표 사영TV 방송인 TF1가 저녁 8시 뉴스 시간에 자비에 다르코스 교육부 장관을 인터뷰했다.

다르코스 장관은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프랑스인이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소리, 프랑스인이 외국어를 습득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이제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중략)…이번 학기부터 중등교육 과정에서 영어교육을 강화하겠다.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은 국제 경쟁 사회에서 커다란 장애, 핸디캡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영어의 세계화에 마지막까지 저항해온 프랑스의 교육부 장관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건 뜻밖의 일이다.

그런데 이전 같으면 이런 충격적 발언에 야당 정치인들이 들고 일어나 반발할 텐데, 이번엔 그런 조짐조차 안 보인다. 그만큼 프랑스의 세계적인 위상이 사그라지고 있다는 뜻일까?

영어(더 정확히는 미국어. 유럽에서는 '영어'와 '미국어'를 구분해서 사용한다)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세계 무역경쟁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는 프랑스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정치인들이기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날 다르코스 장관은 "중등교육을 마친 프랑스 학생들이 '비랭그(두 나라 말을 동시에 하는 사람)'가 되도록 하는 게 목적"이라며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 오후 4시 이후에 실행될 방과 후 교육시간 중 2시간을 할애해 영어 교육을 실시한다.   ▲ 인터넷을 통한 영어 교육을 강화한다(e-learning).
▲ 원하는 고등학생들을 10명 단위로 묶어 2월 스키방학 기간 중 1주일 동안, 여름 방학 기간 중 2주 동안 현지에서 무료로 언어 연수를 받게 한다.

지금까지는 부유한 집안 아이들만 외국에 나가 연수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교육부에서 그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취지이다. 한국과는 달리 사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프랑스이기에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인이 영어 못한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다"

7년에 걸친 프랑스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한 학생이 받는 영어 교육 시간은 총 700시간 정도(1주일에 3시간 꼴). 그렇지만 프랑스 영어교육의 결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부진한 편이다. 이것은 중등교육 이수자 중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이들이 많은 독일·네덜란드·북유럽인 등과 달리 프랑스의 경우 그 비중이 매우 낮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외국어교육 강화 필요성을 늦게나마 인식한 프랑스 정부는 2002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외국어 수업을 의무화했다(2004년에 프랑소와 피용 당시 교육부 장관도 초등학교에서 외국어 수업 강화 방안을 지속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것이 올해부터 1년 앞당겨져 초등학교 2학년부터 의무화가 적용되고 있다.

선택 가능한 외국어에는 영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독일어·러시아어 등이 있지만 초등학생 중 90% 이상이 영어를 선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업은 1주일에 두 번씩 진행되는데, 한 번에 45분으로 되어있는 수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만 진행된다.

그런데 문제는 기존의 초등학교 교사들 중에서 영어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교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이를 개선하기 위해 프랑스 교육부에서는 수시로 교사들에게 영어 연수를 시키고 있으며 새로 임용되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 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영어 원어민과 같은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영상으로 원격 영어수업을 실시하기도 한다. 올 봄에 실험적으로 40여개 학교에서 실시했던 이 시스템이 학생들 사이에서 각광받자, 이번 가을 신학기부터는 1000여개 학교에서 이 시스템을 활용할 예정이다. 프랑스의 현재 영어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대목이 발음 부분인데, 현지인과 하는 영어 수업은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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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고등학교의 프랑스어 수업 장면(앞쪽에 프랑스어 교재가 잔뜩 쌓여 있다). ⓒ 한경미


자국어 지키기 대표국에서 부는 영어 교육 바람

프랑스 시민들도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일간지 <르 피가로>가 올봄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초등학교에서 영어 교육을 확대하는 방안에 찬성하는 의견이 81%, 반대는 19%로 나타났다.

익히 알려진 대로, 자국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2006년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대표단 일원이 영어로 말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시라크 전 대통령이 갑자기 회담장을 떠난 일화가 있을 정도다.

또한 프랑스는 125년 전인 1883년에 '알리앙스 프랑세즈'라는 어학 기관을 창설, 전 세계에서 프랑스어 사용 인구를 늘리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을 해왔다. 아울러 프랑스는 세계에서 컴퓨터라는 영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드문 나라 중의 하나다. 자국어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이들은 '오르디나퇴르'라는 신조어를 창조하기까지 했다.

그런 프랑스인들마저 이젠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영어 사용을 점점 늘려야 하는 서글픈 시대를 살고 있다. 어른이 되더라도 영어를 활용해 외국인과 거래해야 하는 직업에 모든 어린이가 종사할 일이 없는데도, 대부분의 초등학생이 영어를 배워야 하는 현실도 그러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이들의 잠재적 재능을 발굴해 그 가능성을 열어줘야 할 교육의 총 책임자인 장관이 영어 교육 강화를 외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외국어는 어릴 때 가르칠수록 효율적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변명일 뿐이다.

그런 이유에서였다면 교육부 장관은 다른 외국어(예컨대 아동의 지적 능력 발달과 정신적 성숙에 밑거름이 될 훌륭한 유산을 많이 남긴 쟁쟁한 철학자와 작가 등을 많이 배출한 독일어) 교육도 강조해야 하지만, 장관 발언의 무게중심은 분명 영어였다.

또한 영어 교육을 강조하는 맥락도 셰익스피어·바이런·셸리 등 영어로 인류에게 걸작을 남긴 이들의 작품을 읽거나 비틀스·롤링스톤즈 등의 멋진 음악을 들으라는 취지로 보이지는 않는다.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강제되는 영어 교육은 이처럼 학생들에게 영어를 상업언어로만 바라보게 함으로써 영어라는 언어 자체를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면, 지나친 말일까?

프랑스 사회의 이러한 변화 추세는 영어 교육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교육 자체가 점점 취직 맞춤형 교육으로 변질되고 있다. 대학 입시에서도 취직 기회가 많은 분야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는 반면, 그동안 인재들이 모이던 인문학 분야는 성적이 안 돼 갈 곳이 마땅치 않은 학생들이 몰리는 곳으로 전락하는 추세다.

올해 1월, 파리 1대학인 팡테옹-소르본느 대학이 콩포라마라는 대형 가구 체인점과 손잡고 가구점에서 일할 지배인 양성을 위한 교육 과정(상점에서 진행되는 연수를 포함해 15개월 동안 진행된다)을 만드는 등 대학들도 경제 제일주의에 무릎을 꿇는 분위기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교육과 언어가 지금 정도(正道)에서 걷잡을 수 없이 이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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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시내에 있는 프랑스어 교육 기관 '알리앙스 프랑세즈.' 1883년에 창설돼 125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 한경미

#영어교육 #프랑스어 #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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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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