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9번째 생일상을 차려주다

등록 2008.09.04 20:07수정 2008.09.0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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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생각은 고지식하여 가부장사상이 아직도 몸에 배여 있다. 돈도 겨우 먹고 살만큼 벌 뿐 넉넉한 벌이는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불쑥거리는 성격이 한 번씩 아내를 힘들게 할 때도 있다.


해줄 있는 일이 별로 없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아내 생일을 기억해 주기로 했다. 비싼 선물, 고급 식당, 화려한 이벤트는 못해주지만 생일상을 차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자기 생일에 생일상을 받는 아내 마음이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해마다 기다렸다.

작년에는 공공근로를 하느라 차려주지 못해으니 마음이 참 아팠다. 올해로 9번째 생일상이다. 서른아홉 번째 아내 생일상을 준비하기 위하여 장을 보는데, 아내는 그만 미역국만 끓여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생선 두 마리, 당면, 콩나물, 돼지고기, 파, 당근, 케익보다는 롤빵을 좋아해서 롤빵을 샀다.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5만원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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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를 손질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조카가 파를 주워서 먹고 있다. 낮에 큰 아빠 집에 와서 지내는데 나를 '아빠'라고 얼마나 졸졸 따라다니는지. ⓒ 김동수


"내 생일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냥 미역국만 끓여 먹으면 되는데."
"다른 사람은 비싼 선물, 고급 식당에서 칼질하는데 5만원은 아무 것도 아니요."

5만원은 아내에게는 큰 돈이지만 막상 장바구니를 보니 별 것 없다. 점심을 먹고 생일상 준비에 들어갔다. 나물로는 콩나물, 호박나물이다. 참치로 만든 전, 쇠고기 미역국, 생일에 빠질 수 없는 생선 구이, 잡채까지 하려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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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을 무치고 있다. 신기한지 조카 녀석이 가만히 보고 있다. 얼마나 장난이 심한지 모른다 ⓒ 김동수


"요즘 콩나물은 다듬지 않아도 되지요."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면 돼요."

"호박이 작아 씨를 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머님이 가져다 주신 것이예요. 호박은 살짝만 데처도 괜찮아요."


잡채를 하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잡채를 자주 해먹었지만 막상 하려고 하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막내동생 딸인 '예설'이는 끊임없이 손길을 내민다. 벌써 파 한쪽을 먹었다.

"여보 잡채를 해야 하는데 무엇부터 해야 하지. 채소, 돼지고기, 당면을 다 섞어면 안 되나?"
"잡채를 누가 그렇게 만들어요!"
"채소를 먼저 손질하고, 돼지고기는 소금, 후추로 밑간을 해놓으세요. 물이 끓으면 당면을 넣으세요. 당면이 불지 않도록 참기름 조금, 식용유로 볶아 둡니다. 손질 해놓은 채소를 볶고, 돼지고기를 볶아, 간장, 엿을 넣어 함께 볶아주면 됩니다."

아내가 시키는대로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반은 아내 손길이 필요했다. 앞으로 잡채를 하면 잡채 하나는 잘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채가 결코 싶지 않은 음식임을 오늘 깨달았다.

"잡채는 이 정도 하면 되었고, 당신 생일이니 쌀밥이 아니라 팥찰밥을 먹어야지."
"생일에는 팥찹밥을 먹어야지."

경상·진주 지역에선 생일에 하얀 쌀밥이 아니라 팥과 찹쌀, 맵쌀을 섞어 해먹는다. 팥찰밥을 먹어야 튼튼하게 자란다는 믿음 때문이다. 밥을 안쳐두고 생선을 다듬었다. 아주 작은 고기다. 두 마리에 5천원.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좋은 생선을 사셨으면 좋아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선이 너무 작다. 다음에는 좀 큰 놈을 사야겠다. 남편만 큰 놈을 먹으면 되나. 당신도 큰 놈 먹을 자격이 있었요."
"당신이 이렇게 만들어주는 것만해도 고마워요. 생선 크기가 무슨 대수인가."
"타는 냄새가 나는데. 아차 그릴 안에 생선이 있지. 깜빡했다. 어이구 좀 타버렸다. 어떻게 하지."
"괜찮네요. 이것도 맛 있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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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을 준비해서 만든 아내 생일상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 차림이라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다. ⓒ 김동수


이것저것 하다 보니 아이들이 왔다. 아이들은 아빠가 엄마 생일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고, 신기한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도와주지 않았으면 밥하는 아빠 모습이 신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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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엄마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 김동수


"자 이제 생일축하 노래 불러야지."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생일 축하합니다. 짝짝짝."
"자 맛있는 엄마 생일밥을 먹도록 합시다. 누가 밥을 했지요?"
"아빠가!"
"그래 아빠가 엄마 생일밥을 했다. 서헌이 너도 나중에 결혼하면 아빠처럼 너 생일밥 챙겨주는 사람을 만나야지."


아내는 자기 딸이 자기처럼 다른 것을 몰라도 생일밥은 좀 챙겨주는 남편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1년에 생일상 한 번 차려주는 것으로 아내에게 할 일 다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따뜻한 마음, 말, 삶을 살기를 다짐한다.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여보 사랑합니다. 건강한 정신과 마음, 몸으로 살아갑시다. 우리 아이 셋, 이 아이들이 세속주의에 물들지 않고, 돈과 권력의 노예가 아니라 비록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본에 자신을 팔어버리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잘 해주지도 못하고.'
#아내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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