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시설 말도 못 맞추면서 '한미 찰떡공조'?

미국보다 강경한 한국 네오콘, 북핵 시설 '복구'시켜버렸다

등록 2008.09.05 14:41수정 2008.09.05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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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 우리측 수석대표인 김숙 외교부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자료사진) ⓒ 연합뉴스 전수영

6자회담 우리측 수석대표인 김숙 외교부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자료사진) ⓒ 연합뉴스 전수영

김숙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북한의 영변 핵시설 불능화 중단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5일 중국 베이징으로 떠났다.

 

그는 이날 오전 9시 40분께 외교통상부 청사를 나서면서 "북한이 핵시설 불능화를 중단하고 창고에 있던 일부 장비를 꺼내는 조치를 시작했다"며 "이번에 중국에 가서 미국·일본·중국 수석대표와 만나 긴밀하게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북한이 '일부 장비를 이동했다'고 표현했을 뿐 '복구'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취재진으로부터 "이전에는 핵 시설 복구라고 표현했는데 오늘 발언에는 복구라는 말이 왜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김 본부장은 다소 곤혹스러워 하면서 "어제부터 이런 질문이 자꾸 나오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라면서 "한미간에 인식이 같다, 같은 눈으로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찰떡 공조' 한미관계? 북핵 인식은 다른데

 

이 장면은 현재 북핵 문제와 관련 미국과의 관계에서 한국 정부가 처한 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미간의 이견 또는 차이라는게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미간 인식차의 반영일 수 있다. 더구나 말끝마다 '한미간의 찰떡 공조'를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이기에 이런 차이는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3일 밤 북한이 영변 핵시설 복구 작업에 착수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면서부터다. 북한은 이미 지난달 26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영변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원상회복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외신보도가 나온 뒤 문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 명의 성명이 발표됐다. "영변 핵시설의 원상복구 작업을 개시하는 것은 6자 회담을 통한 북한 비핵화 과정에 심각한 훼손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4시간 정도 뒤인 4일 새벽(한국 시각)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이 저장소에 보관했던 일부 장비들을 이동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불능화 작업에 들어간 영변 핵시설을 다시 복구하려는 시도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은 영변 핵시설 '원상복구'로 규정했는데, 미국은 복구 시도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한미간 판단 차이가 논란이 되자 4일 오전 고위급 외교부 당국자가 해명에 나섰다. 그는 "북한이 3일 불능화 작업시에 제거해 창고에 보관했던 장비들을 옮겨서 현장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파악됐다"면서 "북한이 이미 2일 미측에 (복구작업 개시를) 통보했고, 3일 실제 장비 이동이 있었기 때문에 (복구가) 실제 시작됐느냐 아니냐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나무를 심으려고 하는데 삽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고 '나무 심는 행위에 포함되느냐 아니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은 것 아니냐"고 비유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도 이날 오후 직접 해명했다. 그는 "보도자료를 내기 전에 미국과 협의를 했으며, 이 때 미국은 장비가 다시 현장으로 되돌아왔다는 표현을 사용했다"며 "이를 우리말로 '시작이다, 아니다' 논란을 벌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미간에는 사실관계 확인 등 여러 차례 상황을 협의하고 있다, 인식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

 

겉으로는 상생·공영, 속으로는 대북 대결의식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5일 오전 김 본부장의 발언에서 '복구'라는 표현이 빠지니까 취재진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부에서는 이 문제가 북핵 협상에 대한 한미간의 입장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한다.

 

북한을 원래 '악의 축'으로 지목했던 조지 부시 행정부는 정책을 바꾼 뒤 북한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2·13 합의에 따라 해왔던 협상이 순식간에 깨지는 상황을 바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겉으로는 상생·공영의 대북정책을 내놓고 있으나 대북 정책은 '한국판 네오콘'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마침 이번 사건이 발생하자 서둘러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복구하고 있다'고 선언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지난달 26일 북한이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원상복구도 고려할 것이라고 밝히자 한국 정부의 한 당국자는 거의 공개적으로 "북한은 테러지원국 해제가 실제로 이행되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의 표시로 긴장을 고조시켜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끌고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발언에 대해 "북한의 공식성명을 한국 정부 당국자가 '협상용'이라고 공개적으로 깎아내린 것은 평양 당국을 더 자극하는 신중하지 못한 처사"라는 지적이 있었다. 당시 미 행정부 쪽에서는 '협상용'이라는 식의 반응은 없었다.

 

상생·공영의 대북 정책을 내세우는 이명박 정부의 공식 발언과 나중에 행동으로 확인되는 속내가 너무 다르다는 비판도 많다. 실제 속내는 냉전적 대북 대결 구도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판 네오콘이 문제다

 

대북 전문가와 대북 지원단체 관계자들 사이에는 '한국판 네오콘'으로 불리는 현 정권 안팎의 일부 인사들이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을 표리부동하게 만든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 7월 11일 박왕자씨가 금강산에서 피살당했을 때 청와대는 이 사건과 남북 관계는 별개라고 했다. 그러나 이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국제 문제화하려다 북한과 심각한 마찰을 빚었다.

 

한 대북 사업가는 "이전 정권에서 진행했던 대북 사업만 근근히 유지되는 수준일 뿐 새 사업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며 "특히 북쪽 사업 파트너들부터 상황이 좋지 않으며 소극적"이라고 전했다.

 

이런 상황인데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3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출범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인도주의적 정신과 동포애에 입각해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식량지원을 검토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의 이기택 수석부의장도 이날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대북 식량 지원을 촉구했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난 5월부터 민간 단체들이 대북 식량 지원을 호소했으나 정부는 국민 정서를 들어 난색을 표해왔다. 특히 박왕자씨 피살 사건 뒤에는 "여론 조사를 해 본 결과 국민 감정이 너무 악화됐다"며 사실상 식량 지원은 물건너갔다는 분위기를 강하게 풍겼다. 그러다가 요즘 갑자기 대북식량지원 긍정적 검토를 시사했다.

 

한 대북 관계자는 "정부가 WFP를 통해 지원하겠다는 식량은 결국 옥수수 5만t 아니냐"며 "이명박 정부 행태를 보면 말과 행동이 다르고, '남북관계가 완전히 끝장났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알리바이를 만드는 게 목표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꼬집었다.

2008.09.05 14:41 ⓒ 2008 OhmyNews
#영변 #대북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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