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을 겨누는 비수가 될 줄, 그 역시 몰랐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95] 중 독보사건

등록 2008.09.06 16:08수정 2008.09.06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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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구고두. 인조는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홍타이지에게 3번 절하고 3번 머리를 땅에 찧는 예를 행했다. ⓒ 이정근


임금이 산성에서 내려와 삼배구고두를 행했다. 홍타이지에게 3번 절하고 절 할 때마다 3번 머리를 땅에 찧었다. 치욕이었다. 하지만 조선 사대부들은 항복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대중화를 섬기는 소중화 조선이 어찌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임금의 항복을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 에둘러 표현하며 자위했지만 사대부들은 정신적인 대공황에 빠졌다. 세자가 볼모로 끌려가고 수많은 포로가 잡혀갔다. 청나라를 배척하자는 신하들은 심양에 끌려가 처형되거나 실각했다. 백성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죽어갔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집단 우울증이 조선 팔도를 휩쓸었다. 건국 이후 최대의 환란이었다.


조선 사대부들을 지배하는 존주양이 사상

척화를 주장하는 대신들과 격론을 벌였던 최명길 역시 명나라를 추종하는 선비다. 그의 학맥은 이항복과 신흠으로 이어진다. 성리학 원론에서 약간 비켜서 양명학에 관심을 보였을 뿐, 대부분의 조선 사대부들의 정서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가슴에도 각인되어 있었다.

힘 앞에 그의 재조지은(再造之恩) 신념이 갈등했다. 맞서 싸워 명분을 지키느냐? 꺾여 국체를 보존하느냐? 그는 후자를 택했다. 명분을 살리기 위하여 백성들이 도륙되고 강토가 피바다 되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강화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청나라의 힘의 실체를 인정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생각이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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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문. 창경궁 정문이다. ⓒ 이정근


창경궁에 돌아온 임금은 망연자실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권력을 쫓아 구름처럼 모여 들었던 대소신료와 내관들이 가족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에겐 힘없는 군주보다 가족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임금은 식음을 전폐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영의정에 오른 최명길은 무엇을 먼저 손대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난파선 선장이 된 최명길은 수습에 나섰다. 피폐해진 나라살림을 복구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우선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다.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었으니 배신의 변을 설명하고 구원을 요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길이 없었다. 서로(西路)와 연결된 대륙은 청나라의 수중에 떨어지고 해로는 위험하다.


목마르게 기다리던 명나라 소식

최명길이 방법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을 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평안도 선천 해안에 명나라에서 온 사람이 상륙했는데 쓸 만하다는 평안병사 임경업의 보고였다. 최명길은 그자를 즉시 한성으로 압송하라 명했다. 면담 결과 그자는 홍승주 군문에 있는 사람으로서 조선의 사정을 정탐하기 위하여 나온 자였다. 그자의 국적은 조선이고 묘향산에서 불도를 닦았다는 승려 독보였다.

비변사 당상관들과 의논한 최명길은 독보를 통하여 명나라에 자문을 보내자고 임금에게 품의했다. 인조의 재가를 받은 최명길은 ‘힘이 약하여 청나라의 압제를 받고 있다’는 자문을 작성하여 독보 편에 보냈다. 회답을 받아오기로 약속한 독보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그는 평안감사 정치화에게 율시 한 수를 지어 보내며 마음을 달래었다.

저 멀리 구름바다 낙조에 아득한데/雲海微茫落照間
봉래산 바라보는 눈 뚫어지려 하네/眼穿何處覔蓬山
장건의 뗏목 배는 길이 막혀 못오나/張蹇槎路伋多阻
서시의 다락배는 돌아오지 아니하네/徐市樓船久未還
가을바람은 백발을 속이기 쉬우련만/易被春風欺白髮
신선 영약 얻어 다시 젊기 어렵구나/難從仙竈借紅顔
한 없이 기다리다 지치고 상한 마음/年來無限傷心事
푸른이끼 틈 사이에 홀로 문 닫았네/窮巷蒼苔獨掩關
-<지천유사(遲川遺事)>

명나라에 도착한 독보는 황제에게 조선 조정의 자문을 바쳤다. 크게 기뻐한 숭정제는 독보에게 상을 내리고 여충(麗忠)이라는 호를 하사했다. 명나라 조정의 대접을 후하게 받은 독보가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오랑캐의 말이 날뛰어 속국을 거듭 침범하는데도 우리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멸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의 액운이다. 귀국이 역대로 충성하고 순종함을 바쳐오다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게 화친한 것은 사세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고 힘이 모자라서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니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다. 힘을 합하여 기어코 함께 협공하자.”-<인조실록>

현실 앞에 꼬리 내린 조선 사대부들

칙서를 받은 조선 조정은 한껏 고무되었다. 인조는 비국당상을 긴급 소집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신료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편하다’는 현실 인식파의 의견이 대립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인조는 독보의 내방과 회의 자체를 비밀에 부치라 명했다. 명나라와 힘을 합하고 싶었지만 합할 힘이 없었다. 결국 독보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선천을 찾은 독보가 이번에는 홍승주의 자문을 가지고 왔다. 평안감사 정태화로부터 보고를 받은 영의정 신경진은 난감했다. 지난번 자문을 작성한 사람은 당시 영의정 최명길이다. 최명길은 친동생 대신 다른 사람을 인질로 보낸 것이 문제가 되어 관직을 사임하고 초야에 묻혀 있다. 최명길이 아닌 다른 사람 필적으로 회답을 보내면 의심을 받게 된다. 신경진은 평안병사 임경업으로 하여금 독보를 대동하고 최명길을 찾아가라 지시했다.

“흠명독사태자태보 병부상서(欽命督師太子太保兵部尙書) 홍승주는 황상(皇上)의 명지(明旨)를 받들어 자문을 보낸다. 조선이 평소에 절개가 있고 공순했던 것을 감안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와 화친을 따져 묻지 않았다. 조선은 3백 년 동안 보살펴 준 큰 은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임진난 때 조선의 모든 백성이 우리 신묘께서 주신 은덕을 받지 않았느냐? 이는 천만년이 지나더라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자문을 읽어 내린 최명길은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산에 걸친 해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분명 눈부시게 빛나던 태양이다. 감히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빛이었다. 허나, 꼬리를 내리고 산마루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지는 해는 내일 다시 떠오르겠지...”

오늘 해는 내일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꼭 다시 떠오를 것만 같았다. 아니 꼭 다시 떠올라 주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이러한 소망은 최명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대부들의 공통된 희망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늘 아래 제일 큰 나라로 알고 있던 명나라. 천자가 있는 대명(大明). 천자의 아들나라로서 가슴이 뿌듯했던 조선. 분명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가 살아 있는데 손이 닿지 않는다. 가깝고도 먼 아버지의 나라다. 안타까움이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최명길이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임경업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것은 나라의 큰 일 입니다. 대감이 비록 정승의 직에서는 물러나 있다 하더라도 자문의 회답은 꼭 대감의 손으로 지어야 되겠습니다.”

자신의 목을 겨누는 비수가 될 줄이야 그 역시 몰랐다

최명길은 주저 없이 붓을 잡았다. 심혈을 기우려 자문을 작성했다. 완성한 자문을 독보의 손에 쥐어주며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독보는 떠나갔다. 이것이 홍승주의 손에 들어가 최명길의 목줄을 겨누는 독침이 될 줄이야 최명길 자신도 몰랐다. 이것이 ‘현직에 있지 않는 자가 감히 자문을 보낼 수 있느냐?’라는 정적들의 공격 자료가 될 줄은 그 역시 몰랐다.

포구에서 배에 오른 독보는 품속에서 최명길이 지어준 시 한 수를 꺼냈다.

가을이 정원에 드니 모든 잎이 우는구나/秋入園林萬葉鳴
귀밑털이 눈같이 희어 거울 속에 빛나네/鬢華如雪鏡中明
미래로 향하는 가이 없는 모든 관심사를/向來無限關心事
산중 스님 지팡이에 송두리째 붙여두네/都付山人一錫輕
-<지천유사(遲川遺事)>

독보가 바닷길을 왕래할 때 청나라 수군에 붙잡히지는 않았지만 청나라 첩보망은 냄새를 맡았다. 용골대가 심증 하나로 세자를 추궁했지만 소현은 부인했다. 물증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을 때 홍승주가 물증을 내놓은 것이다.
#소현세자 #독보 #임경업 #지천유사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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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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