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야채장수 윤봉길의 한탄

김갑수 식민지역사팩션(113회) 제2부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9.09 10:31수정 2008.09.0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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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온 정화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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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 백범 기념관

다시 상해로 돌아와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선생님의 보살핌 덕으로 완전히 건강을 찾았습니다. 의사 조순호 선생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선량하고 기품 있는 여성입니다. 저는 왠지 그녀가 김 선생님의 조카 문수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둘이 만날 수만 있다면 그들은 가장 잘 어울리는 남녀가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일입니다. 백범이 저를 찾았습니다. 백범은 어른 몇 분의 점심 준비를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제가 불려 가는 날은 보통 큰일이나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 임정의 어른들은 모처럼 모이면 으레 저를 찾곤 하십니다.

저는 깔끔하게 점심상을 보아 놓았습니다. 이동녕 선생과 조완구 선생이 왔고 얼마 안 있어 백범이 합류했습니다. 그 분들은 여느 때와 같이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백범이 저에게 술과 신문을 사다 달라고 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백범은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술을 즐기지 않았으며 더구나 낮술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자 거리 분위기가 좀 술렁거리는 것 같았고 호외가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인 청년의 폭탄 거사로 일본군의 민단장 가와바타가 즉사하고 원흉 시라카와는 중상을 입었으며 그 외에도 십여 명의 문무대관이 부상당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이유를 알아서 서둘러 술과 신문을 사가지고 들어갔습니다.


호외를 받아든 백범은 "일이 제대로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두 분에게 술잔을 권했습니다. 그 분들은 축배를 들었던 것입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폭탄을 던진 이는 중국인이 아니고 한인 청년 윤봉길이라는 호외가 또 나왔습니다.

며칠 전 백범은 일본 신문인 상해일일신문을 읽고 거사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

"이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상해 인근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한다는 기사가 일본계 신문에 보도되었다. 참석하는 사람은 물통과 도시락과 일장기를 지참하라고 되어 있었다.

백범은 굵고 검은 안경테를 매만지며 다시 한 번 기사를 확인했다. 백범은 윤봉길을 떠올리고 있었다. 윤봉길이 백범을 찾아온 것은 꽤 오래 전이었다. 윤봉길은 동포가 경영하는 일용품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시장에서 야채 행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백범을 만나자마자 한탄하는 어조로 말했었다.

"제가 야채를 지고 쏘다니는 것은 다 기회를 얻으려 했음인데 이제 일본 놈들이 상해까지 왔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백범이 윤봉길을 불러 자신의 거사 뜻을 전하자 윤봉길은 "감사합니다. 이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준비해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백범은 서문로에 가서 김홍일을 만났다. 그는 상해 병공창에서 일하는 송식표에게 교섭하여 일본식 물통과 도시락에 폭탄 장치를 하여 사흘 안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이틀 후 백범은 안심이 안 되어 김홍일과 함께 병공창으로 갔다. 송식표는 전문기사 왕백수와 함께 물통과 도시락 폭탄의 성능 시험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는 마당에 파 놓은 토굴의 사면에 철판을 둘렀다. 그러고는 폭탄을 그 속에 넣고 줄을 하나 끌어내더니 수십 보 밖으로 물러났다. 그는 엎드린 후 줄을 잡아 당겼다. 폭탄은 무섭게 터져 오르며 철판을 산산이 조각내 버렸다.

"지난 번 동경에서 불발된 것이 너무 안타까워 이번에는 20여 차례 실험을 하고 나서 실물에 장착한 겁니다."
백범은 폭탄을 받아서 친구 집에 보관했다.
"귀중한 약이니 불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해 주시오."

4월 29일이 다가왔다. 윤봉길은 매일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보며 분위기를 익혔다. 그는 거사 3일 전에 선서문을 써서 백범에게 제출했다. 그는 다음 날 안공근의 집에 가서 선서문을 가슴에 붙이고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다음에는 백범과도 한 장을 더 찍었다. 이어서 윤봉길은 약력과 유서를 썼다. 유서에는 고국의 청년들과 두 아들과 백범에게 주는 유시가 기록되었다.

시계와 돈을 백범에게 주는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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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천장절 날, 상하이 루쉰 공원에서 일제의 상하이사변 승전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사 ⓒ 윤봉길 기념사업회

백범은 윤봉길을 여관으로 보내고 폭탄 두 개를 찾아 김해산의 집으로 갔다.

"내일 윤봉길 동지가 중대 사명을 띠고 만주로 떠나게 되어 대접하려 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 주시오."

다음 날 백범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6시에 김해산의 집으로 가 윤봉길과 최후의 조찬을 했다. 백범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봉길의 기색을 살펴보니 차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마치 농부가 밭 갈러 가기 전 아침을 먹는 모습과 같았다. 백범은 성공을 확신했다.

옆에 있던 김해산이 백범에게 한마디 했다.

"지금 상해에서 민족 체면을 위해 할 일이 많은데 윤 동지와 같은 인재를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내는 이유가 뭡니까?"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맡기는 게 좋지. 윤 동지가 어디에서 터지는지 두고 봅시다."

시계가 일곱 시를 알렸다. 윤봉길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것은 시가 6원의 새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일원짜리도 안 돼 보이는 고물이군요. 제 시계는 이제 한 시간 후면 터질 것이니 바꿔 차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범은 윤봉길의 최후 선물을 뜨거운 가슴으로 받았다.

윤봉길은 대절해 놓은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는 이번에는 돈을 차창문 너머로 내밀었다.
"차비 주고도 5, 6원은 족히 남습니다."
자동차가 움직였다. 백범은 젊은이에게 고개를 숙여 절했다.
'지하에서 만납시다.'

해방 후 백범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안장하고 자신도 그 자리에 묻힘으로써 지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켰다.

윤봉길의 거사는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고 연일 후속 기사가 이어졌다. 중국의 <신보>는 윤봉길의 거사 상황을 톱기사로 자세히 보도했다.

당시 무대 아래에는 도처에 일본 헌병들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한 소년이 성냥을 그어 불빛이 번쩍이더니 한 가닥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 이어 폭발 소리가 났다. 일본 헌병은 즉시 소년을 등 뒤에서 잡아 두 팔과 허리를 끌어안았다. 주변의 일본인들이 가세하여 소년을 마구 구타했다. 금세 소년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지금은 헌병 1대에서 그를 압송하여 심문하고 있다. 범인은 한국인임이 밝혀졌는데 그는 25살의 청년으로서 프랑스 조계에 있는 어느 염색회사의 직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년 8월에 청도에서 상해로 왔고 한국독립당의 당원이며 모든 혐의 사실을 인정했다. 일본 헌병대는 공모자가 최소 3~4명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해를 떠나야 하는 임정

선생님, 중국인들은 우리에게 몰려와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우리는 오늘 저녁 상해를 떠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프랑스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정치 망명자로 인정해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프랑스는 점령군인 일본군의 압박을 견딜 수 없었는지 우리에게 빨리 상해를 탈출하라고 통고했습니다.

일본은 백범을 배후 인물로 지목하고 프랑스 조계에 들어가 임정 관련자를 모두 체포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백범을 잡으려다 안 되니까 이제는 잡으려 하지 말고 보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백범은 모든 사람에게 신속히 연락해 대피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내무부와 애국단원들의 활약으로 대부분 탈출에 성공했지만 안창호만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평소 백범의 테러 투쟁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켕길 게 없다고 생각했던지 피하지 않고 있다가 붙잡힌 것입니다.

사실 도산은 윤의사의 거사를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백범은 도산의 안전을 위해 이봉창과 윤봉길의 두 거사는 자신과 애국단이 전 과정을 주도했다는 성명을 각 언론기관에 보냈습니다. 이 일로 백범은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에게까지도 일약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부상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각계의 도움을 약속받게 되었는데 특히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얻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다급히 상해를 떠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서 임정과 우리의 몸을 의탁할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아, 다음 편지는 언제나 쓸 수 있을는지요? 선생님, 안녕히.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과 사랑이 그려집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과 사랑이 그려집니다.
#백범 #윤봉길 #홍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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