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를 바라는데 빨리 죽지를 않네

[역사소설 소현세자 101]저승사자, 정복자를 위협하다

등록 2008.09.20 17:39수정 2008.09.2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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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심양 황성 남문. ⓒ 이정근


홍승주가 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금주위에 오삼계를 투입했다. 하지만 사기가 떨어진 명나라 군사는 청나라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패주하는 명나라 군사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금주3성을 수중에 넣은 청나라군은 4개 대부(大府)와 94개 성(城)을 공략하여 접수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이제 산해관이 코앞이다. 

둥! 둥! 둥! 심양의 4대문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승전고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전쟁은 죽고 죽이는 참극이지만 전승은 우선 기쁘다. 홍타이지는 성황당에 나가 향을 사르고 전쟁에 지친 군사들을 손수 맞이했다.


심양은 축제분위기인데 세자관은 침울했다. 빈궁의 아버지 강석기가 위중하다는 소식이 고국으로부터 날아왔기 때문이다. 빈궁은 아버지의 안부를 알고 싶었으나 조선으로의 길이 용이하지 않았다. 의주에서 삭찬을 싣고 온 인부와 마부에게서 얻어들은 것이 전부였다. 결국 빈궁이 곽란을 일으키며 눕고 말았다.

남자가 여자 몸에 어떻게 침을 놓지?

곽란에 이어 다리와 무릎이 마비되는 증세가 나타났다. 마비에는 침이 즉효인데 어의들이 침을 놓을 수 없었다. 남자 어의가 빈궁의 몸에 침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평위산을 올렸다. 위를 다스리기 위해서다. 향박음자 2첩을 올리니 곽란증세가 호전되었다. 문제는 마비 증세다.

“이 일을 어찌 해야 하나?”
의관 채득기는 난감했다.

“의녀 한 사람이 속환되어 관소에 머물고 있는데 그녀로 하여금 침을 놓게 하면 어떨까요?”
의관이 병자년에 잡혀온 의녀에게 침을 놓게 하자고 건의했다.


“침을 잘못 놓으면 옥체를 상할 수가 있는데 침 자리도 모르는 의녀에게 침을 놓게 하여 빈궁마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을 누가 진단 말이오?”

“도리가 없잖습니까.”

우선 배꼽 부근에 뜸을 들이게 한 의관은 의녀에게 대충(大冲)과 공손(公孫) 두 자리의 혈을 가르쳐 주며 침을 놓게 했다. 차도가 없었다. 기혈이 허하고 가슴 졸임이 병이 된 것이다. 조중이기탕과 수자목향고 3환을 지어 올렸다. 별로다. 익위승양탕을 지어 올리니 원기는 회복됐지만 마비 증세는 여전했다. 의관 채득기는 침술을 잘하는 의녀를 급히 보내달라고 장사민을 급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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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루. 심양고궁에 있다. 전승축하연이 열렸던 곳이다. ⓒ 이정근


황궁에서 홍타이지를 비롯한 도르곤과 수뇌부가 모여 전승 축하연이 열렸다. 세자도 초대받았다. 전승축하연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들떠 있었다. 청나라는 북경을 손에 넣은 듯한 기쁨에 충만해 있었다. 홍타이지가 소현을 불렀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홍타이지의 손에는 공작 3마리와 앵무새 1마리가 들려 있었다.

“처음 보는 새입니다.”
“아마 섬라국에서 명나라에 조공하는 물건일 것이다. 이는 이번 돌아오는 군인들이 얻은 것들이다.”

섬라국은 오늘날의 태국이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홍타이지의 얼굴에 그늘이 있었다. 처음 보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이렇게 기쁜 날. 왜 그럴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용골대가 찾아왔다.

저승사자, 정복자를 위협하다

“황제께서 풍증으로 머리가 어지러우니 죽력(竹瀝)을 보내주시오. 그리고 조선의 의술이 용하다 하니 명의(名醫)와 침의(鍼醫)도 보내주면 좋겠소.”

홍타이지의 안색은 병색이었던 것이다. 풍증(風症). 오늘날의 순환기계통 질병이며 핵심 고리는 뇌다. 질환이 심각해지면 급사할 수도 있다. 회복된다 해도 운동장애와 언어 장애 그리고 식물인간에 이를 수 있는 무서운 질병이다. 죽력은 대나무를 항아리에 넣고 밀봉하여 간접 화기로 얻어내는 약재이며 뇌졸중과 중풍에 특효약이다.

홍타이지의 질환을 통보받은 소현은 착잡했다. 홍타이지는 원수다. 빨리 죽기를 원하는 대상이다. 조선 강토를 짓밟고 부왕에게 삼배구고두를 행하게 한 철천지원수다. 하지만 그가 죽는다고 국권이 회복될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강건한 국권은 누가 돌려주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건한 국권 회복의 터전은 전쟁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그 출발점에 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잠시 물러나 있다가 다시 관직을 꿰차고 있다. 임진년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류가 그렇고 도원수였던 김자점이 그렇다. 김자점은 병조판서로 고속 승진하여 펄펄 날고 있다. 소현은 부왕의 인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부왕의 위치에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야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백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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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황후. 홍타이지의 계비이며 도르곤의 연인이다. 또한 순치제의 생모다. ⓒ 이정근

생명이 촛불처럼 점점 타들어 가는데 후계를 정하지 않은 홍타이지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청나라의 황제는 홍타이지이고 실력자는 도르곤이다. 홍타이지에게는 장자 호격이 있다. 호격은 사망한 효단황후 소생이지만 장성하여 전장에 나가 전공을 세우고 있다. 홍타이지가 사망하면 도르곤과 호격의 격돌이다. 1차전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시동생과 연인? 그러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현 황후 장비소생 복림이 있다. 복림은 비록 다섯 살 어린애지만 술수에 능한 생모가 살아 있다. 또한 장비와 도르곤은 공적으로 형수와 시동생이지만 사적으로 연인이다. 야심이 많은 장비는 만주벌판의 여우 범문정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타이지는 전쟁 승리에 취해 있었다.

용골대의 의료진 차출을 명받은 조정은 어의 유달과 약의(藥醫) 박군을 보내 홍타이지를 치료하게 했다. 어의와 침의가 심양으로 떠나는 날, 인조는 어의 유달을 비밀리에 내전으로 불렀다.

“언제 죽겠는지 내밀히 알아보라.”

어의 도착과 함께 영중추부사 강석기의 부음이 심양에 전해졌다.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접한 빈궁은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청심원 2알을 복용하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세자관은 오례의(五禮儀)에 의해 발상했다. 숙포(熟布)와 최복을 모두 지어라 지시한 세자는 관원들에게 명했다.

“이는 막중한 예이므로 한 점 착오가 없어야 한다. 정묘년에 서평부원군의 상 때의 예법이 본받을 만하나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상례에 참례했던 최정승과 김판서가 마침 여기에 있으니 자문을 구하고 때마침 좌상 심기원도 동관에 와 있으니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라.”

명을 받은 관원이 최명길과 김상헌이 옥살이 하고 있는 북관을 찾았다. 옥살이에 몸이 피폐해진 김상헌과 최명길은 걷기는커녕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관원들이 업어 세자관으로 왔다. 세자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되돌아갔다. 소현은 사서 이정명을 북관에 파견하여 자문을 구하도록 했다.

“오례의의 본문에 ‘시자(侍者)는 최복을 입는다.’ 라는 문장이 있으나 그 아래 소주(小註)에는 ‘풍속에 따라 거친 배 허리띠를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품속을 파고드는 귀인 조씨

최복은 오복(五服) 중 가장 무거운 등급의 참최다. 한편, 강석기의 사망을 접한 조정은 술렁거렸다. 강석기는 세자의 장인이다. 하지만 세자는 심양에 있다. 강석기의 장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설왕설래 의견이 많았다. 귀인 조씨가 인조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영충추부사가 죽었다면서요?”

“그렇소. 아까운 인물이오.”

“세자빈은 심양에 있지를 않습니까?”
귀인 조씨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월당은 빈궁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우의정을 지낸 나라의 기둥이오. 세자와 빈궁을 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주어야 할 것이오.”

“세자와 세자빈이 돌아올 입장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해야 할 이유가 없지를 않습니까?”
품 속에 파묻혀 있던 귀인 조씨가 인조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튿날, 예조가 인조에게 계청했다.

“오례의에 따라 13일 동안 공무를 정지하고 애도를 표하는 일이 가한 줄로 아룁니다.”

“빈궁이 지금 이국에 있으므로 압존(壓尊)해야 할 일이 없으니 공제의 예는 거론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 듯하다.”
인조의 태도는 싸늘했다. 예상밖이었다. 사헌부가 재차 주청했다.

“길흉의 예는 각기 한 시대의 제도가 있습니다. 세자가 불행히 심양에 계시기는 하나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저곳에 계시거나 이곳에 계시거나 압존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제도를 다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듣기 싫다.”
인조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소현세자 #도르곤 #장비 #호격 #홍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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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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