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을은 여름의 둔덕을 넘어 무르익고 있건만

뒷산으로 떠난 가을 여행의 맛 아실는지?

등록 2008.09.23 15:36수정 2008.09.23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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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풀 섶을 헤저으며 오솔길을 걷노라니 풀 섶에서 풀벌레 소리 요란하다. 이따금 놀란 까치도 깍깍거린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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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과 빨강을 주재료로 하여 색깔을 입힌 꽃들이 흐드러진 언덕, 꽃 이름을 알리려는 듯 저마다 벙긋벙긋 웃는다. ⓒ 김학현


그렇게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지팡이 하나 잡고 등산화를 신고 가을을 만나러 뒷산으로 올라갔다. 멀리 갈 것이 무엇이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산중이니 그냥 집 뒤로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밑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다. 어젯밤 찔끔 내린 비 때문인지 풀 섶이 촉촉하다.


작은 디카 하나면 온 세상이 다 순간에 정지하는 것임을 익히 알기에, 카메라 기술은 없지만 디카(실은 기술도 필요 없는 자동 디카다) 하나 손에 들고 풀 섶을 헤저으며 오솔길을 걷노라니 풀 섶에서 풀벌레 소리 요란하다. 이따금 놀란 까치도 깍깍거린다.

가을, 꽃단장이 아름답다

이름을 알 만한 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름을 헤아릴 수 없는 산야초들이 저마다의 특징을 입은 '꽃이란 이름의 옷' 자랑이 대단하다. 하양과 빨강을 주재료로 하여 색깔을 입힌 꽃들이 흐드러진 언덕, 꽃 이름을 알리려는 듯 저마다 벙긋벙긋 웃는다.

그래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언덕을 통째로 볼 때는 별 것 아니던 꽃들을 카메라를 들이대고 밀착하여 한 꽃송이만 찍고 보니 그럴 듯하다. 우리도 어울림에 약하다가도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라고 하면 제각각 일등일 때가 얼마나 많던가. 사람이나 꽃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

이럴 때 제대로 된 카메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래도 이리 편리한 작은 디카가 있는 것으로도 만족한다. 이 물상이 가진 아름다움을 정지하는 기술에 담아 필요할 때 꺼내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정지시킨 화면에 담는다고 혼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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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두릅꽃 온 봄과 여름동안 우리 집 밥상에 올랐던 취나물과 땅 두릅도 벌써 꽃을 달고 있거나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달고 있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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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산길, 오롯한 오솔길에서 밤 한 톨이 떨어져 나뒹군다. ⓒ 김학현


온 봄과 여름동안 우리 집 밥상에 올랐던 취나물과 땅 두릅도 벌써 꽃을 달고 있거나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달고 있다. 아, 이렇게 가을은 여름의 둔덕을 넘어 곁에서 무르익고 있건만, 아직 가을이 먼 줄만 아는 이 인생의 느림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더위 탓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식상하고, 나이 탓이라고 하면 게으름을 이르는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저 더운 한낮의 기온만 탓하고 있을 때 가을이 이렇게 다가온 것이다. 벌레 먹은 노란 나뭇잎이 이제 자신의 일을 마친 농부처럼 볕이 내리쬐는 언덕을 아랫목 삼아 떨어져 누우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 나의 겨울 준비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가을, 알알이 열매로 영글다

긴 여름을 살라먹고도 너무 빠르게 가는 가을. 그 가을만큼이나 빠른 열매들이 자신들의 영역표시를 하는 산이다. 고즈넉한 산길, 오롯한 오솔길에서 밤 한 톨이 떨어져 나뒹군다. 얼른 주워 호주머니에 넣으니 다시 나무 위에서 밤톨들이 소곤소곤 소꿉놀이를 하며 재잘댄다.

사각사각 나뭇잎 부딪는 소리가 바람을 연주자로 내세운 것으로는 너무 잘 어울린다. 바람은 나무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아서인지 더 아름답게 연주한다. 어느 새 '솔솔' 연주하던 바람은 '쏼쏼' 큰소리로 연주한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놀라 떨어진다.

나도 어느덧 흥얼거린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그러다 아니란 생각이 들어 노랠 멈췄다. 여름 노래라는 것을 생각한 순간 어울리는 노래가 아니란 생각까지 들었다. 다시 흥얼거린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누나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밭에 익은 곡식들은 금빛 같구나 추운겨울 지낼 적에 우리 먹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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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중 어렸을 때 온 동네 언덕을 헤집으며 따먹던 까마중, 그리 눈에 띄지 않던 까마중이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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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버섯이 얼마나 하늘을 그리워했는지 하늘로 문을 내고 뭉게구름을 쳐다본다. ⓒ 김학현


노래를 하다 밑을 보니, 어렸을 때 온 동네 언덕을 헤집으며 따먹던 까마중, 그리 눈에 띄지 않던 까마중이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똑 따 입에 넣어보니 달콤하긴 하지만 그리 맵시 있는 맛이 아니다. 왜 근데 어렸을 적엔 이 맛이 그리 좋았을까. 퉤퉤 뱉어버리고 다시 길을 오른다.

버섯도 제 한 몸 뉘일 만한 장소면 버젓이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고 있다. 빨간 버섯, 노란버섯, 찢어진 버섯. 버섯이 얼마나 하늘을 그리워했는지 하늘로 문을 내고 뭉게구름을 쳐다본다. 내가 버섯이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리도 아름다운 가을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유기하는 것이 아닐까. 가을 하늘 저 밑으로 고욤도 다닥다닥 자신들의 이야기를 쓴다.

가을, 죽는 것이 있고 사는 것이 있다

여름 내내 자란 칡넝쿨이 꽃을 피우더니 이제는 털 복숭이 콩처럼 생긴 열매를 달고 있다. 카메라에 칡의 지고한 결실을 담으려는 순간 무엇인가 나뭇가지가 꿈틀거린다. 자세히 보니 자벌레다. 꼭 나뭇가지 같다. 벌레도 자신을 보호하려고 저리 술수를 쓰다니.

술수로 말하면 인간이란 동물을 당할 자 누구랴. 아마 아무리 보호색이 뛰어나고 위장술이 뛰어난 동물의 세계에서도 인간만큼 그쪽 면에서 뛰어난 존재는 없으리라. 또 다른 자벌레가 자신을 식물로 숨기고 꼼짝도 안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이 아니란 게 금방 들통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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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매미로 알려진 주홍날개꽃매미도 사랑을 나누고 있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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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어떤 생물은 여름의 진한 몸부림 끝에 생명과 열매를 잉태한 것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것은 이리 지는 것도 있다니. 참으로 생명의 세계는 신기하다. ⓒ 김학현


중국매미로 알려진 주홍날개꽃매미도 사랑을 나누고 있다. 우리가 자신들을 얼마나 미워하는지도 모른 채, 자기들끼리 이리 태연하게 속삭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누구는 생태계를 교란하는 종이니 보는 대로 죽이라고 하던데, 그게 내가 한 두 마리 죽인다고 될 일이 아닌지라 그냥 눈감아 주기로 하고 카메라에만 담는다.

방아깨비, 송장메뚜기가 바닥에서 뛰논다. 그들 틈새에서 작은 여치 한 마리가 낮잠을 잔다. 그의 낮잠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단잠 자는 귀여운 모습을 담는다. 그렇게 하여 나는 가을이 숙명처럼 뒷산에 덮이고 있는 순간들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행복해 한다.

이제 더 이상 관찰하지 않아도 된다. 충분히 가을이 뒷산에서 익고 있다. 충분히 나눈 가을과의 대화를 마치고 하산하려는데 주검이 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의 주검이. 어떤 생물은 여름의 진한 몸부림 끝에 생명과 열매를 잉태한 것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것은 이리 지는 것도 있다니. 참으로 생명의 세계는 신기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 개체의 삶을 위한 주검일 것이 분명하다. 잠자리가 거미줄에 달리지 않았다면 그 거미줄을 치고 기다리던 거미의 운명은 어찌될까. 하루, 이틀, 사흘, …. 그렇게 기다리다 지치고, 지치다가 죽어가겠지.

가을은 죽음과 삶의 희비쌍곡선을 그리며 이리 초롱초롱한 눈을 뜨고 우리 곁으로 왔다. 자, 이 가을 야트막한 주위 산에라도 올라 하나님이 준 자연의 외경에 빠져 보라. 가을이 주는 넉넉함이 행복이라는 그림을 충분히 그려주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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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현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갓피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갓피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가을여행 #뒷산 #열매 #잠자리 #까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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