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 이발소 5대손 일호, 학교와 싸우다

[함께 읽고 싶은 책] 김혜원소설 <열일곱 살의 털>

등록 2008.09.26 10:55수정 2008.09.2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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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을 읽었다. 같은 청소년 성장소설이지만, 며칠 전에 읽었던 <완득이>와느 또 다르다. 완득이가 자기 생활 주변을 하나하나 들춰가며 새로운 삶을 진작시켰다면, '열일곱 살의 털'의 일호는 현재 자신의 모습 속에 지난 세월의 삽화를 그려냄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갖게 한다. 격한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글인데도 고개를 끄떡이며 등장인물들과 마음이 동한다. 바로 내 이야기인 듯한 삶의 단면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우선 책 읽는 재미가 다르다. 그저 '공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후련하다. 어른들이 쉽게 지나쳐 왔던 일,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밑그림으로 깔아놓은 게 일미다. 그렇다고 지지리도 못 살았던 그 시절, 그렇고 그런 류의 궁상맞은 이야기도 아니다.  

 

70년대 후반, 그러니까 내가 중등학교에 다녔던 때는 교복자율화니 두발자율화 같은 것은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이유 불문하고 남학생은 까까머리에 모자를 썼고, 여학생은 단발머리나 머리를 총총 땋아내려야 했다. 등굣길 풍경도 살벌했다. 교문 앞엔 학생주임과 선도부가 턱 버티고 섰었다. 두발, 복장, 지각단속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것 하나라도 걸리면 얼차려에다 머리에 고속도로가 뚫렸다. 여학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귀밑머리가 1㎝라도 넘으면 한쪽 귀밑머리는 짝짝이가 됐다. 그러나 어쩌랴. 누구 하나 '반항'하지 못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그때가 좋았다고, 참 아름다웠다고 한다. 단지 아스라한 추억 때문일까.

 

열일곱 살 소년에게 머리털이 자유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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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 김혜원, 사계절 <열일곱 살의 털>은 열일곱 살 일호의 자아 찾기로 청소년들은 물론 어른이 읽어도 유쾌한 책이다. ⓒ 사계절

▲ <열일곱 살의 털> 김혜원, 사계절 <열일곱 살의 털>은 열일곱 살 일호의 자아 찾기로 청소년들은 물론 어른이 읽어도 유쾌한 책이다. ⓒ 사계절

<열일곱 살의 털>, 처음 제목을 접하면 누구나 '어느 털이지?'하는 의구심을 가질 게다. 열일곱 살은 털이 많아지는 나이다. 남자들의 고민이야기인가 싶지만 책을 읽으면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다.

 

다른 털이 아니라 '머리털' 얘기다. 버젓이 머리카락이라고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는데도 하필이면 '털'이라고 했을까.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다. 그게 이 책을 이끌어가는 묘미다. 게다가 제목에서 '털'은 자유와 존중을 의미한다.

 

주인공 일호는 너무 물컹하고 온순한 '범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발소, 태성이발소의 5대손 일호는 머리카락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욕망이 뒤엉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열일곱 살 생일 아침에도 머리를 박박 깎을 수밖에 없었다.

 

열일곱 살 소년에겐 머리털이 자유의 상징이다. 일호는 머리털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실상 일호가 할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는 것은 오랜 시간 아들의 역할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쓸데없는 책임감 같은 것이다. 저도 모르게 외로움을 느꼈던 일호에게 그것은 '애어른'처럼 일찍 철들게 했고, 한편으로는 소심하게 만들었다.

 

일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두발검사에서 학교규칙인 '오삼삼'을 정확히 지킨 '두발모델'이 된다. 선생님의 잣대로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범생이 일호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선생님들의 눈에 지극히 평범하고 소심한 일호였지만 두발규제에 반기를 든 것이다.

 

단지 머리가 학교규정에서 약간 어긋났다고 해서 너무나 비인격적인 처사를 받는 옆 반 친구를 보고 저도 모르게 분노가 솟구친다. 난폭한 바리캉이 자신의 머리를 지나가는 듯한 분노에 치를 떤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거대한 공룡과 같은 학교와 한판 싸움을 시작하지만 사전에 발각되면서 고루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학교 측에 닦달을 받는다.

 

한때 '반항적'이지 않은 채 사춘기를 보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상담실에 불려갔을 때 누가 볼까봐 손등으로 눈물을 훔칠 만큼 물컹한 것 같지만, 체육선생에게 사죄하는 대신 두발규제 반대시위를 계속할 만큼 단단해진다. 그 순간, 범생이 일호는 가슴에서 뭉클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던 것이다. 

 

일호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이발소인 태성이발소의 3대 이발사다. 자부심을 갖고 머리를 깎는 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손자는 머리 깎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를 한다. 그리고 우연히 할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화해하는 또 다른 실마리가 된다.

 

왜냐면 그 일로 정학을 맞고 피켓시위를 하던 일호와 아들을 대동하고 학교를 찾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묘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어떻게 풀어갈까 내심 기대했는데 예상을 멋지게 뒤집은 것이다.

 

그런데 칠십 평생을 '제 털 뽑아 제 구멍에 박을 위인'으로 살아온 고지식한 할아버지한테도 심정변화가 온다. 나라에서 하는 일에 처음으로 의구심을 가진다. 재개발로 주민들이 고루 덕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할아버지는 세입자대책위원회에 합세하여 시위에 나선다. 그 일은 훗날 일호가 다니는 오정고등학교 학생들이 '별사건'이라고 부르게 될 일을 벌이면서 당신이 일호의 싸움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하여 일호는 할아버지가 존재함으로 해서 자신이 단단히 땅에 발붙이고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일호의 싸움과 궤를 같이하며 또 다른 싸움을 치르는 할아버지의 변모는 유쾌하고 놀랍다. 작가는 할아버지를 통해서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온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일호 할아버지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나라가 발전하면 모두 잘 살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다.

 

하지만 급속한 산업화와 현대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일흔이 넘어서야 자신이 선 곳이 벗어나기 어려운 그늘이란 걸 깨닫는다. 자신의 가치관이 무너졌을 때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할아버지는 현실을 인정하고 정면 돌파한다. 작가는 우리 인간의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힘으로 바뀌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열일곱 살 일호의 단단한 자아 찾기

 

처음으로 세상과 맞선 뒤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되는 열일곱 살 일호의 이야기에는 학교 두발 규제와 관련한 청소년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주인공 일호의 가족사, 우리 사회와 역사가 모두 담겨 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고, 사회의 부조리에 당당하게 맞서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게 미덥고, '단단해지는' 일호를 통해 가족의 사랑과 믿음을 새삼 확신하게 된다. 작은 영웅, 일호의 성장에 공감하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열일곱 살의 털>에는 우리 인생의 단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기에 인생의 길을 찾으며 헤매는 열일곱 살의 낯설음만큼이나 큰 고등학교 1학년 일호의 풋풋한 젊음이 자랑스럽다. 게다가 십수 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이 혈육의 정을 되새겨 보게 되고, 늦깎이로 해후한 부부의 낭만적 사랑이 기대된다. 홀로 정학 맞은 일호에게 미안해하는 친구 정진에게서는 정말 열일곱 살에 맞는 순진함이 느껴진다.

 

다시 '열일곱 살의 털'은 자랄 것이다 하지만 그 '털'이 자라는 만큼 그의 꿈도 자라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범생이 일호가 단단해지기 위해 치러내는 일련의 과정이 밉지 않았다. 또 하나 청소년을 위한 글이었지만 어른이 읽어도 정말 유쾌한 글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미디어 블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9.26 10:55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다음미디어 블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열일곱 살의 털

김해원 지음,
사계절, 2008


#열일곱 살 #일호 #자아 #김혜연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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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국기자는 2000년 <경남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작가회의회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수필집 <제 빛깔 제 모습으로>과 <하심>을 펴냈으며, 다음블로그 '박종국의 일상이야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김해 진영중앙초등학교 교감으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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