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학생의 날, 그 유래도 아시나요?

광주학생운동의 기치를 들었던 오늘, 하지만 기억에서 사라진 오늘

등록 2008.11.03 11:26수정 2008.11.03 11:26
0
원고료로 응원

오늘은 11월 3일, 학생의 날이다. 하지만 오늘이 학생의 날이라는 것을 아는 학생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당장에 학생들에게 가장 떠오르는 것은 수능이 코앞이라는 점, 그 때문에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이니, 학생의 날이고 뭐고는 애초에 머릿속에서 지워진지가 오래다.

 

나 또한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몇 년 되었지만 학생의 날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오히려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오늘이 학생의 날이구나라는 정도로 시큰둥하게 지나갔을 뿐... 단순히 학생의 날이라고만 달력에 작게 표시되어 있을 뿐, 정작 학생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기억에서 사라진 날일 뿐이다.

 

입시의 지옥 속에서 살며, 같은 반 학생들과 우정보다는 경쟁을 나눠야하고, 그러한 비극적인 시작은 고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이젠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이란다. 서울시는 국제중의 설립을 강행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로서 우리나라의 교육은 무한 경쟁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른바 파릇파릇한 생기도, 친구간의 우정과 의리도 없이 단지 헛된 성공의 길이라는 것에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공부만 하는 톱니바퀴가 되어 열심히 돌아가기만 할 뿐...

 

그래도 한번 돌아보자. 오늘은 누가 뭐래도 학생의 날이다. 학생의 날이 왜 학생의 날일까? 그건 바로 학생들에게 있어서 오늘은 잊지 못할 날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학생들로 인한 거국적인 민족운동, 그리고 이로 인하여 어른들에게 큰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던 크나큰 사건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잊혀진 오늘, 하지만 기억해야 할 오늘

 

a

성진회. 1926년 11월 3일 성진회가 조직되고, 이듬해 독서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이들은 광주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된다. ⓒ 송영대

▲ 성진회. 1926년 11월 3일 성진회가 조직되고, 이듬해 독서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이들은 광주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된다. ⓒ 송영대

 

지금으로부터 거의 80년 전의 광주, 3.1운동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치 자세를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바꿔, 기존보다는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며 조선인들에 대한 자세를 변경한다. 하지만 말이 그럴 뿐, 오히려 순사들을 더 늘리면서 조선에 대한 압박을 더욱더 강하게 하며, 철저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 된지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터라 조선땅에는 이제 일본인들도 제법 있다. 하지만 일본인들에 대한 대우와 조선인에 대한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 서로 다른 학교를 다니며 사회적으로도 다른 대우를 받으며, 조선인들은 어디까지나 멸시를 받는... 일본인보다 하등하다는 인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간 속에서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비록 몸은 일본에게 빼앗겼지만, 정신에게는 빼앗기지 않았다는 생각에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금씩 조금씩 활동을 시작하면서 여러 사상들이 그러한 독립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는 어른들 뿐만 아닌, 학생들도 마찬가지. 학생들은 단순한 기계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고 또 미래를 위한 우리나라의 초석이었기에 그들 또한 현실을 잘 파악하고, 미래를 위하여 하나둘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1926년 11월 3일 광주의 한 허름한 하숙집에 더벅머리의 소년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앳된 목소리로 그들의 결의를 읽어나갔다. 조선의 독립, 사회과학의 연구, 그리고 식민지교육체계의 반대 등을 주장하며 앞으로 이를 실천하도록 노력할 것과 동지들을 규합해 나가면서 자신들의 뜻을 퍼트리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성진회(醒進會)는 결사되고, 이후 독서회라는 이름으로 바뀌며 확대개편 된다. 그렇게 정확히 3년 뒤, 그들은 수많은 학생들 앞에 우두커니 서서 비장한 얼굴로서 힘차게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그들에 앞에 서있는 일본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힘찬 소리가 들린 후, 광주역 앞은 아수라장이된다. 바로 광주학생운동의 시작이다.

 

그들에게 11월 3일은 무슨 날인가?

 

a

광주학생독립운동탑. 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 내에 있는 탑으로서 광주학생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새겨놓았다. ⓒ 송영대

▲ 광주학생독립운동탑. 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 내에 있는 탑으로서 광주학생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새겨놓았다. ⓒ 송영대

 

광주학생운동. 1919년의 3.1운동과 1926년의 6.10만세 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은 잠시 주춤거리게 된다. 일본의 제제가 그만큼 강해지고 또한 삼엄해졌다는 것으로서 이때는 산발적인 조직들로서 활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민족운동의 기치는 꺾이지 않았고 산발적인 투쟁으로서 그 불씨가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성진회의 조직 이후 학생들을 중심으로 여러 조직들이 생겨난다. 기존의 성진회의 중심이었던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외에 여러 학교들이 동참하게 되고, 또한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소녀회가 조직되었다.

 

그 당시엔 조선인차별교육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던 상황, 그로 인하여 기숙사생들이 단체로 시위를 벌이거나 학교의 학생들이 뭉쳐서 동맹휴교를 하곤 하였었다. 이러한 동맹휴교는 당시 매우 조직적으로 이뤄져 일본에 대한 그들의 대항법 중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확실한 투쟁 중 하나였다.

 

그렇게 조선인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시기. 1926년 10월 30일에 기어코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조선의 여학생들을 일본학생들이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하고 이에 발끈한 조선학생들은 그들과 물리적 충돌을 빚게 된다. 하지만 이때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은 일방적인 일본인편을 들으면서 조선학생들을 집단구타한다.

 

다음날엔 오히려 현장에 없던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학생에게 도전을 걸면서 또다시 충돌이 빚어지게 된다. 이에 두 학교의 선생들이 중재를 하기 위해서 오지만 오히려 일본인 선생이 선동을 하면 욱신각신하다가 동시 퇴학으로 간신히 마무리 지은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아무런 충돌이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폭풍전야였을 뿐...

 

그리고 11월 3일, 독서회를 중심으로 광주의 학생들이 뭉쳐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이 시작된다. 이 날은 우리로서는 개천절(당시는 음력 10월 3일)이었으며 일본으로서는 4대 명절 중 하나인 명치절이고, 또한 성진회 발족 3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개, 그 숨막히던 상황들

 

a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 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 경내에 위치하여 광주학생운동에 대해 간략하게 알 수 있도록 전시를 해 놓았다. ⓒ 송영대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 현재 광주제일고등학교 경내에 위치하여 광주학생운동에 대해 간략하게 알 수 있도록 전시를 해 놓았다. ⓒ 송영대

 

학생들은 명치절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거리에 나섰고,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일본학생들과 마찰이 빚어진다. 이때 조선의 학생이 일본학생의 단도에 찔려 코와 안면에 부상을 당하게 되고 격분한 조선학생들은 이들에 대해 구타를 가해 일본학생들은 광주역까지 쫒기게 된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을 일본학생 백수십명은 목도와 단도를 들고 현장으로 오며, 조선학생들도 이 소식을 듣고 단체로 오면서 현장에서는 긴장감이 흐르지만 양측의 협의 아래에 해산하게 된다.

 

하지만 오후 1시가 되면서 광주학생 300여명은 교문을 박차고 가두시위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타학교 학생들까지 참여하여 수 백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일본학생들이 있던 광주중학교로 진격하나 2번에 걸친 진격에도 경찰들과 소방대, 재향군인 등의 저항으로 물러나며 다시 구호를 외치면서 광주보통고등학교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11월 12일 2차 시위를 벌이면서 1차보다 더욱더 과감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때는 이미 격문을 뿌려 수많은 학생들에게 알린 후 더욱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행동에 나서게 되며 일부 학교에는 학생들을 사실상 감금시킴으로서 참여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경찰들의 탄압에 맞서면서도 더 많은 학생들이 모여 운동에 참여함으로서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치게 된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해 일본은 수 백 명을 퇴학과 무기정학을 시킴으로서 탄압하나 오히려 백지 동맹이라는 방식으로 투쟁에 나서게 되며, 광주의 학생운동에 대한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광주에서 가까운 목포, 함평, 나주에서 이와 같은 학생운동이 시작되며 서울로까지 번지게 된다. 그리고 이윽고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본에 대항하는 거국적인 운동으로 확대된다. 이에 대해서는 신간회의 지원도 전국으로 퍼지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일본은 신간회 또한 탄압하게 된다.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독립운동으로서 기억된다. 이 운동에 참여한 학생만 하더라도 5만4천명, 그리고 퇴학 처분자가 582명, 무기정학을 당한 이가 2,330명으로서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학생의 날. 학생의 피로서 기억하라

 

a

광주학생운동 호회. 동아일보에서 방행한 호회로서 1930년 1월 17일자의 내용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광주학생운동 호회. 동아일보에서 방행한 호회로서 1930년 1월 17일자의 내용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주학생운동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하여 어른들로서는 머뭇거렸던 독립운동에 대해 새로운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이는 나아가 조선의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거대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학생의 날은 그러한 우리 선배 학생들의 신념과 넋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서슬 퍼런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도 결코 뜻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일어서서 그들의 불의(不義)를 지적하고 또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무던한 애를 썼던 학생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조국에 대한 울분과 독립에 대한 열망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일이리라.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게 옛 일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학생들에게 그러한 열정과 패기는 사라진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리라. 학교에서는 입시 스트레스로 지옥을 만들어주며, 대학교에 합격하는 것이 오직 인생의 목표인 양으로 가르친다. 학생들 스스로도 대학교에 들어가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며 그러면서 인생의 중요한 가치들을 하나하나 스스로 포기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한다. 80여 년 전 학생들이 일본에 피 흘리며 투쟁한 것은 바로 제대로 된 교육을, 즉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교육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열정의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을 수 있던 것이며, 우리는 이를 기억하면서 과거에 감사하며 또한 그들의 못 다한 꿈을 위해 노력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면서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바로 우리 후세들이 자유롭게 교육을 받으며 한국의 미래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이해서 써 본 글입니다. 학생의 날의 유래와 전개 등에 대해 적어보았습니다.

2008.11.03 11:26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이해서 써 본 글입니다. 학생의 날의 유래와 전개 등에 대해 적어보았습니다.
#학생의 날 #광주학생운동 #일제강점기 #광주 #독립운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감정위원 가슴 벌벌 떨게 만든 전설의 고문서
  2. 2 "김건희 여사 접견 대기자들, 명품백 들고 서 있었다"
  3. 3 유시춘 탈탈 턴 고양지청의 경악할 특활비 오남용 실체
  4. 4 윤 대통령이 자화자찬 한 외교, 실상은 이렇다
  5. 5 그래픽 디자이너 찾습니다... "기본소득당 공고 맞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