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바쁜 당신' 북한산 노적봉 노적사로

북한산과 노적사의 가을

등록 2008.11.12 17:04수정 2008.11.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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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의 가을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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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노적봉과 노적사의 가을 ⓒ 김현자


북한산 ‘노적사’는 사적 제162호인 북한산성 안에 있는 몇몇 전통사찰 중 한 곳이다. 북한산성 축성과 수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성능(영조~숙종) 스님이 창건했다. 스님은 산성을 쌓기 전부터 있었던 중흥사 외에, 산성 내 중요한 요충지 11곳에 절을 짓는데 이때 창건한 진국사가 오늘날의 노적사이다. 창건 당시 85칸이었다고 한다.

노적봉은 전설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북한산에도 물밀듯이 밀려왔단다. 높은 산에 커다란 더미 하나가 우뚝 보이는지라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적장이 마침 길을 가는 노파에게 “저것은 무엇인가?”고 물었더란다. 노파 왈, “저것은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쌓아놓은 것이라더이다." 노파의 이 대답에 적장은 기가 죽어 퇴각 명령을 내렸다나!


어린 시절에 노적봉 이 전설을 책에서 읽으며 순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렴. 바위와 노적가리를 구분 못할까? 그런데 정말 밤이나 흐린 날에 노적봉을 처음 봤다면 노적가리로 오해하고도 남겠다 싶다. 어떻게 보면 누리끼리한 것이 곡식을 담은 자루를 쌓아놓은 것으로 충분히 지레짐작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니 무모한 싸움을 어찌 벌일 수 있으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는 노적봉이 북한산의 고운 단풍 속에 유난히 눈부시다. 노적봉은 이런 전설로 아이들에게까지 유명하지만, 노적봉이 품고 있는 노적사는 생각만큼 유명하지 못한 듯하다. 몇 년 전 있었던 동인당(요사)의 화재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이렇다 할 기사 하나 쉽게 눈에 띄지 않으니 말이다. 변변한 답사기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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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유물로 추정하는 북한산 노적봉 노적사의 석사자 ⓒ 김현자


사실 노적사에는 나그네의 발길을 끌만한 이렇다 할 국가지정 문화재 하나 없다. 원래의 사찰은 이미 진즉에 화재로 전소, 1960년대에 무위 스님과 몇 신도들이 다시 전각들을 짓기 전까지 이곳은 오늘날의 중흥사지(경기기념물 제136호)처럼 북한산성의 역사를 간직한 폐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지라 노적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구태여 꼽자면, 절 앞 산기슭 쪽에 있는 석사자상이다. 자세히 보면 등에 문수보살을 태웠음직한 흔적이 있는 이 석사자의 인상은 푸근하고 친근하다. 석사자를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함께 자란 누렁이가 생각났다. 석사자에 명문하나 없기에 조선후기 유물로만 짐작할 뿐이지만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만큼 가치가 있단다.

삼국시대에 부르던 북한산의 이름 부아악(負兒岳)은 역시 바위의 생김새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기를 업은 모습의 봉우리여서 부아악. 혹은 부아(負兒)는 향찰로서 불, 혹은 불알, 불두덩, 쉽게 말하면 남성 성기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는데, 아무튼 바위 생김의 특징을 따서 지은 이름임은 틀림없다. 산신령의 산이란 뜻에서 ‘부루칸모로’라고도 했다. -노적사 사찰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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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성문 중성문에 올라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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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외곽 11개 성문 중 하나인 대서문 ⓒ 김현자


삼각산으로 불렸다가 삼각산과 북한산이라는 이름을 함께 쓰다가 갈수록 북한산이란 이름으로 굳어지고 있는 북한산은, 삼국시대부터 시대에 따라 매번 치열한 접전이 있을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산성을 대대적으로 축성한 것은 조선시대 숙종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유재란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북한산성을 쌓을 때 들어간 물량은 쌀 1만6381섬, 무명 767동(同), 돈 3만4799냥, 정철(正鐵) 2785근, 신철(薪鐵) 22만9180근, 석회(石灰) 9638섬, 숯 1만4859섬, 생 칡 2002동(同), 넉새베 4동, 작은 모자 900개(立).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의 대부분은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전면적은 55만8641㎡(16만8989평). 성벽의 높이는 3~5미터, 총길이 9.24km. 행궁지를 비롯하여 중흥사지, 부흥사지, 어영청 유영지, 금위영 유영지 등의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현재 외곽의 산성에는 12개의 성문과 수문 1개가 있다. 그리고 성안의 중성문과 시구문, 암문, 위문 등이 남아 있어 이들 성문들을 산행중에 만날 수 있다. 노적사를 가면서 만나는 성문은 대서문과 중성문. 중성문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 볼 수 있다. 골짜기마다 단풍이 곱다. 3칸 중 1칸에 우물마루를 깔았음은 보초를 서는 중 잠깐 쉴 수 있도록 함이었나 보다.

북한산성의 수많은 유적지 중 한곳인 노적사는 북한산성 연구에 중요하기에 이렇듯 국가지정 문화재 하나 없어도 자체만으로 기억해야만 하는 절이다. 노적사를 품은 노적봉 아래에는 훈련도감 유영터가 있는데 초석들만 뒹굴고 있다고 한다. 노적사의 석사자는 어떤 존재였을까? 훈련도감 유영터의 초석들과 함께 우리가 반드시 풀어내야 하는 숙제인지도 모른다.


‘분명 대웅전이었는데? 전각을 바꾸기도 하나?’

1989년 가을, 그러니까 20년 전에 노적사에 딱 한번 간 적이 있다. 청년불자 활동을 함께 하던 법우(불가에서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로 도반, 선우라고도 함) 노적사에 올라 곶감을 만드는 일손을 거들었는데 단 한 번의 발걸음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극락전은 대웅전이다. 궁금해 어느 보살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답한다.

“지금 극락전이 옛날 대웅전이 맞아요. 옛날 대웅전에 모셔져 있던 분이 아미타부처님이었거든요. 아미타부처님은 극락전에 모시는 것 아시지요? 몇 년 전에 요사체가 불탄 것도 알지요? 6년 동안의 공사를 올 4월에 회향했어요. 그래서 대웅전을 신축, 석가모니 부처님을 새로 모시고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곳에는 원래의 '극락전' 현판을 걸게 된 거랍니다.”

절에는 수많은 전각들이 있다. 전각들마다 모시는 주인공들이 다르고 불자들의 기도는 그에 따라 달라진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주불이면 대웅전이나 대웅보전인데 화엄종 사찰에서는 석가모니 삼세불(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중 현재불인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시며 대적광전이나 광명전, 대광명전의 현판이 걸려있다. 금산사 대적광전(보물 제476호)이 대표적이다.

아미타부처님이 주불이면 극락전이나 미타전, 혹은 무량수전이다. 지옥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모신 곳은 지장전이나 명부전, 혹은 시왕전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은 관음전, 원통전, 대비전으로 부른다. 외에도 나한전(응진전), 팔상전(영산전), 미륵전(용화전, 자씨전) 등 많은 전각들이 있는데, 지레짐작 그냥 보는 것보다 그 전각의 주인공과 상징을 알고 보면 훨씬 재미있는 것이 사찰의 전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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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노적봉 노적사 대웅전의 처마 ⓒ 김현자


아, 노적사에 가면 처마를 잊지 말고 눈 여겨 보시길! 흔히 연꽃이 그려지는 연목부리초에 낯익은 글자들이 하나씩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이걸 보여주면 고궁이나 사찰 등을 찾은 아이들의 눈매가 어느새 처마를 쫒고, 그렇게 관심은 시작될 것이기에.

피폐해진 나를 찾아 나선 산행, 마음에 노적가리를 쌓다

2004년의 화재와 2006년의 가게 정리 이후 참 숨가쁘게 살아왔다. 아이들까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그놈의 돈이 뭐 길래!”는 내가 어떻게든 이겨내야만 하는 웬수가 된지 이미 오래다. 이러다보니 입에 ‘돈’이 붙었고, ‘하루’와 ‘한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다. 친구가 만나자고 해도 몇 시간이면 돈이 얼만데? 어느새 계산하고 있는 나.

이런 내게 붙은 수식어는 ‘바쁘다’, ‘만날 뭐가 그리 바쁘셔?’. '글쎄 내가 왜 이리 바쁘지?'

가족을 위해, 무엇보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부지런히 벌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날밤을 새워 일할 때도 많다. 일에 빠져 몇 끼는 우습게 건너뛰는 것도 예사다. 돈의 절박함이 우선이지만, ‘내 속 어디에 일에 대한 욕심이 이렇게 숨어있었던가!’ 할 만큼 2년째 그야말로 남들이 보면 대단한 일에 미쳐 살고 있다.

그런데 통장에 돈이 입금될 때마다 뿌듯하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 돈에 미쳐 소모품처럼 나를 너무 많이 잃고 말았다는 비참한 마음이 날이 갈수록 더 절박해지고 있다. 날밤을 자주 새며 눈에 띄도록 늘어난 흰머리도 이젠 보기조차 끔찍하다.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읽었던 책속의 이야기들은 내적 충만은커녕, 정리되지 않아 복잡하게 엉켜있다.

와중에 자꾸 떠오르던 것은 산행이었다. 그것도 눈 푸른 납자를 꿈꾸던 청년 불자 시절에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 남짓 숨이 가쁘도록 올라가 만났던 노적봉 아래 노적사. '세상에 찌들지 않은, 그만큼 순수하던 그때 그 시절에 만났기 때문이리라'

그간 사찰은 자주 찾았지만 절문 앞까지 차를 이용하기 일쑤요, 어쩌다의 단체산행 뿐, 혼자서 산행다운 산행은 20년도 넘어버린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 참으로 힘들게 나선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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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주차장 앞을 지나는데 내또래로 보이는 두 사람이 손전화에 서로의 모습을 담아 주고 있었다. 삶의 진정한 친구란, 인생이라는 산행을 황혼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아닐까? ⓒ 김현자


내가 왜 이리 많이 변했을까? 걸어 내려오는 동안 돌아보는 나는 너무 성급하고 얄팍해져 있다. 보이는 것을 채우기에 급급해 더 소중한 것들을 잃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다. 이런  마음 부재로 오래 잇고 싶은 인연들과 자꾸 어긋나고 있다. 경솔하게 지난 10월초 누군가에게 못질을 하고 말았다. 때문에 10월 내내 괴로웠고 원망과 상처가 깊어지고 말았다.

노적사는 노적봉의 생기가 가장 왕성한 곳에 세워진 절이라는데 맞나보다. 한 시간 남짓 혼자 걸어 내려오는 길, 그동안 먹고 사는 일 때문이라며 나도 모르게 놓아버린 내 자신이 희미하게나마 하나씩 추슬러지면서 눈물이 자꾸 나니 말이다. 내 맘을 몰라준다는 원망보다는 내가 준 상처가 도드라진다. 울음과 함께 차분하게 쌓여드는 노적가리 같은 편안함.

나를 찾아 나선 단 한 번의 산행으로 생활에 찌들려 내 스스로 놓고 말아버린 나를 어디 쉽게 찾을 수 있으랴. 안개처럼 막막하고 복잡하게 엉켜 붙은 사람관계의 그 복잡한 실타래가 어디 쉽게 풀리랴. 누군가에게 준 상처를 어디 쉽게 잊으랴. ‘계속 나서보리라’ 이 가을, 나를 찾기 위한 지속적인 산행을 시작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노적사에는 11월 8일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노적사는 구파발 2번 출구에서 셔틀버스(02-353-5016/02-354-7900)를 이용하거나 구파발역에서 시내버스 704/7733을 타고 북한산에 하차. 산행을 하면 됨(대서문->중성문->노적사)


덧붙이는 글 노적사에는 11월 8일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노적사는 구파발 2번 출구에서 셔틀버스(02-353-5016/02-354-7900)를 이용하거나 구파발역에서 시내버스 704/7733을 타고 북한산에 하차. 산행을 하면 됨(대서문->중성문->노적사)
#노적사 #노적봉 #북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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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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