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건 상대방의 모든 것을 감싸 안는 것”

[함께 읽고 싶은 책]고은명의 장편동화 <후박나무 우리 집>

등록 2008.11.25 09:19수정 2008.11.2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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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하야, 엄마는 이번 일로 연하가 얼마나 엄마를 생각하는지 알게 되어서 기뻐. 하지만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도 많아. 엄마도 결혼 전에는 내가 이렇게 살게 될지 상상도 못했어. 외갓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부모님을 모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어.

 

하지만 아빠를 좋아하게 되면서 아빠가 가진 걸 모두 받아들이게 됐어.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거거든. 상대방이 가진 좋은 면, 좋은 조건뿐만 아니라 나쁜 면, 나쁜 조건도 다 감싸 안는 거 말이야.”

 

장편동화 <후박나무 우리 집> 결말에서 따온 열두 살 딸아이에게 엄마가 이르는 찬찬한 얘기다. 어떠한 문제든 어른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면 자칫 다그치기 쉬운데, 엄마는 아이의 입장에 서서, 아이가 힘들어하고 있는 문제를 친근하게 다독여내고 있다. 그게 저자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여자로 산다는 것, 남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실마리다.

 

 “엄마 말씀은 알겠어요. 하지만 더 불평등한 게 있다고 해서 여자라서 손해 보는 걸 참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엄마는 사랑으로 아빠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아빠도 엄마가 힘들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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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명 장편동화 <후박나무 우리 집>, 창비 "후박나무 우리 집"은 학교와 가정이라는 친숙한 분위기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남녀 차별의 문제점을 어린이 눈높이에서 차분히 깨닫게 하는 가운데 남녀가 친구처럼 살아가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산뜻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 박종국

▲ 고은명 장편동화 <후박나무 우리 집>, 창비 "후박나무 우리 집"은 학교와 가정이라는 친숙한 분위기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남녀 차별의 문제점을 어린이 눈높이에서 차분히 깨닫게 하는 가운데 남녀가 친구처럼 살아가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산뜻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 박종국

그렇지만 아이는 ‘나도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의 생각이 옳은 것 같다’며 엄마 말에 공감한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비뚤어진 생각들이 말끔하게 정리된 것이다. 아이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맞이를 한다. 왠지 열세 살에는 좋은 일만 생길 것 같다며.

 

<후박나무 우리 집>은 학교와 가정이라는 친숙한 분위기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들 다루고 있다. 특히, 한 지붕 네 가족의 다사다난한 이야기는 지난한 우리네 삶의 탄탄한 인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시장에서 철물점을 하는 진영이 아빠와 파출부일을 하는 엄마, 아들 가족을 모두 호주로 이민 떠나보내고 정부보조금으로 홀로 사는 지선이 할머니,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아버지와 엄마가 행상을 해서 살아가는 선우네 가족.

 

그렇게 한 지붕 네 가족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서로를 위하며 즐겁게 산다. 한 집에 워낙 여러 세대가 살아 대문을 잘 잠가 놓지 않을 만큼 정답다. 믿고 사는 정겨움이다.

 

<후박나무 우리 집>, 지난한 우리네 삶을 탄탄하게 그려내

 

이들 한 지붕 네 가족에게 삶의 질곡이 따른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선우 엄마가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한 지붕 네 가족의 끈끈한 유대는 돈독한 사랑으로 한결 돋보인다. 모두가 내 일처럼 구청에다 보건소까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다. 동네 사람들이 돈을 좀 걷기는 했지만 수술비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야기는 엄마의 제안으로 반전된다. ‘선우 가족의 이야기를 방송에 내보내서 시청자들의 도움을 구하면 어떨까’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0월의 마지막 밤’에 선우네 가족 얘기가 텔레비전에 방영된다. 그 결과 다음날부터 시청자들이 보내 준 성금이 삼천만원을 넘었고, 아줌마가 수술을 하고 완전히 나을 때까지 치료를 받기에 충분한 돈이 마련된다. 사랑의 징검다리 덕분이었다.

 

이 일을 통하여 매사 티격태격하며 싸웠던 아이들은 한층 더 가까워지고, 많이 어른스러워진다.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믿음 또한 신실해지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후박나무 우리 집> 이야기는 아이들의 일상을 중심으로 사려있게 풀어가면서 가정애사는 물론, 남녀차별 문제를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차분히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이 책은 남녀가 친구처럼 살아가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산뜻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읽힌다.

 

또한 이 책은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 연하를 화자로 하여 제사와 집안행사를 다양한 삽화로 그려내고, 과거와 현재의 풍속을 넘나들면서 페미니즘을 자연스럽게 얘기하고 있다. 전체 문장도 대화체를 사용함으로써 한결 부드럽고 술술 재미있게 잘 읽힌다. 그게 이 책의 묘미다.

 

여자아이로 세상에 태어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얘기는 무얼까. 그것도 내리 딸만 둘 셋을 둔 집안이라면 응당 들었을 한숨 섞인 푸념이다. “저 놈이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말을 듣고 자라게 마련이다. 이 책의 주인공 연하도 평소 집안의 내력이나 제사 같은데 관심이 많아 아들이었으면 바라는 부모님을 많이 섭섭하게 했다. 이러한 것은 누구나 일상다반사로 겪는 얘기가 아닐까.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이기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늘 누군가와 다퉜습니다. 남편과 결혼할 때도 집안일을 똑같이 나눠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딸아이를 낳았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내 아이가 나처럼 늘 누군가와 싸워야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내 아이가 살 세상이 지금보다 나아지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자는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 연하의 눈으로 엄마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엄마의 모습은 어떤가. ‘일복 많은 엄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차리고, 종일 일하고 들어와서 저녁을 차리고, 다 치우고 나면 한밤중, 주말엔 대청소까지 해야 한다. 또 한 달에 한 번 꼴로 다가오는 제사에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것도 다 엄마 몫이다. 정말 엄마는 슈퍼우먼이다.

 

아빠도 똑같이 일하고 들어오지만, 아빠가 텔레비전을 보며 쉬는 동안에도 엄마는 계속 일을 해야 한다. 연하는 그게 못마땅하다. 그래서 연하는 ‘내 이상형이 바로 우리 아빠야!’하는 자신감을 잃고 만다. 왜냐? 아빠 같은 남자와 결혼하면 스스로의 꿈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아이눈에 비친 "일복 많은 엄마"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남녀가 도맡아해야할 일을 크게 구분 짓지도 가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요즘의 아이들은 예전과 달리 그리 차별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올바르지 못한 차별이 많이 있어 여성들을 슬프게 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다른 형태로 남성들을 힘들게 만든다고 얘기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생각으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 그래서 좋게 어울리기도 하지만 탈도 많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이다. 절반의 여자와 절반의 남자가 다 좋게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 좋게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 남녀간의 차별은 일방성이 아니고 쌍방향성이다. 어느 한 측면에서 차별을 받는다고 느낄 때, 그만큼 상대방도 과도한 책임과 의무에 힘들어했다는 걸 알아야한다. 그런데도 이 책은 열두 살 아이로 하여금 장차 여자로 산다는 것, 남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좋은 실마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찾아낸다는 것, 그 해답이 <후박나무 우리 집>의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얘기다.

 

이 책의 말미에 ‘할아버지의 선택’이란 꼭지는 세대를 초월한 합일점을 도출해내는 이야기로 새로운 의미로 읽힌다.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덕에 평생 여행다운 여행을 처음 해보게 된 할머니, 얼마나 좋은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할머니 생신인데다 처음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라 긴장하는 엄마는 챙긴 짐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다가 가족의 놀림을 받는다. 이로써 모든 가족간에 잡다하게 불거졌던 갈등이 훈훈하게 다 해소된다.

 

“이번 니들 에미 생일엔 우리 다 같이 가까운 데라도 다녀왔으면 좋겠다.”  

 

이렇듯 한 편의 동화책은 온 가족이 묵혀두었던 감정적 응어리를 다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동화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선, 똑같은 동화책을 서너 권 사다가 아이는 아이들대로 읽고, 부모는 부모대로 읽는다. 그러면 나름대로 생각의 줄기가 잡힌다. 그런 다음에는 각자의 소감을 얘기하고, 전체적으로 맥락을 짚어본다. 이쯤이면 아름다운 책읽기다.

2008.11.25 09:19 ⓒ 2008 OhmyNews

후박나무 우리 집

고은명 지음, 김윤주 그림,
창비, 2002


#가족 #장편동화 #남녀차별 #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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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국기자는 2000년 <경남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작가회의회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수필집 <제 빛깔 제 모습으로>과 <하심>을 펴냈으며, 다음블로그 '박종국의 일상이야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김해 진영중앙초등학교 교감으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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